1. 5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살아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

2. 43 김영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못 이겨 종내는 젊은날의 우울증 증세가 도져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렀던 모양이다.

3. 66 김득신
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공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기를 억 번 만 번에 이르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
무엇이 좀 잘된다 싶으면 너나없이 물밀 듯 우루루 몰려갔다가, 아닌듯 싶으면 썰물 지듯 빠져나간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하고 칭찬만 원한다. 그 뜻은 물러터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킴은 확고하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일확천금만 꿈꾼다. 여기에서 무슨 성취를 기약하겠는가?

5. 68
세상 사는 일이 하도 심드렁하다 보니, 옛사람의 맑은 정신이 뜬금 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삶의 속도는 나날이 빨라져, 어떤 새것도 나오는 순간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내면에는 마치 허기가 든 것처럼 충족되지 않는 허전함이 있다. 정말 마음 맞는 벗이 하나 있어, 멀리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지는 그런 만남이 문득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6. 이덕무
74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해도 또한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풍열로 눈병에 걸려 눈을 뜰 수 없는 중에도 어렵사리 실눈을 뜨고 책을 읽었던 책벌레였다. 열 손가락이 다 동상에 걸려 손가락 끝이 밤톨만하게 부어올라 피가 터질 지경 속에서도 책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써 보내던 그였다. 그는 마치 기갈 들린 사람처럼 책을 읽었다. ... 한 권 책을 얻으면 기뻐 이를 읽고, 또 중요한 부분을 베껴 적었다. 이렇게 읽은 책이 수만 권이었고, 파리 대가리만한 작은 글씨로 베낀 책만 수백 권이었다.

7. 82
그의 편지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천하의 일은 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 없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쉽게 스스로를 허문다. 거품 경제 속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다 갑자기 닥친 잿빛 현실 속에서 그들의 절망은 너무도 빠르고 신속하다.

8. 105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룰 수 없는 꿈을 쫓아 긴 밤을 한숨 쉬며 애태웠을까? 분노를 삭이고, 재기를 꿈꾸면서, 안타까운 후회와 허망한 희망으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지만, 막상 먼동이 하얗게 터오고 나면 남는 것은 불면의 피로와 부질없는 생각의 형해뿐이다.

9. 136
넓지는 않지만, 방문을 열면 한낮 해가 제 마음대로 들어와 놀다가는 방. 환한 햇살이 물밀듯 들어와 삶의 그늘을 지워주는 방. 별다른 장식은 없어도 내 읽고 싶은 책은 갖춰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차를 마시며 독서에 열중할 수 있는 방. 향을 피워 정신을 맑게 하고, 세상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지만 천지고금을 굽어보고 우러르며 아득한 옛 선인들과 만나고, 천고를 벗삶아 마음껏 노닐 수 있는 방.

10. 185
지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 속에서 노닐고 있다.

11. 225
"귀에 대고 하는 말은 듣지를 말고,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며 할 얘기라면 하지를 말 일이오. 남이 알까 염려하면서 어찌 말을 하고 어찌 듣는단 말이오. 이미 말을 해놓고 다시금 경계한다면 이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인데, 사람을 의심하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소.

12. 260
"까불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아라. 얻었다 좋아 말고, 잃었다 슬퍼 말아라.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것이지. ... 있지도 않은 마음을 잡았다고 하지 말아라. 허공 속의 연기를 보았다고 하지 말아라. 종을 떠난 종소리를 어이 쫓아 잡으리.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말아야지."

13. 263
늘 여유와 한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옛사람은 "젊었을 적 한가로움이라야 한가로움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다 늙어 한가로운 것이야 할 일이 없는 것이지 한가로움이라 말할 것이 못 된다. 숨가쁜 일상 속에서 짬 내어 누리는 한가로움, 일부러 애써서 찾아내는 한가로움이라야 그 맛이 달고 고맙다.

14. 270 <국영시서>
"국화는 여러 꽃 가운데 특히 빼어난 점이 네 가지 있다. 늦게야 꽃을 피우는 것이 한가지이고,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한 가지이며, 향기로운 것이 한 가지이고, 어여쁘지만 요염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차갑지 않은 것이 한 가지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국화의 운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네 가지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서리를 아랑곳않고 꽃을 피우는 국화의 매운 마음과 향기를 사랑한다.

15. 274
처음에 짐짓 허튼 수를 한 번 두어 상대의 김을 뺀 뒤,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게 해놓고서 느닷없이 정면 공격으로 일격에 무찔러버린다.

16. 277
고수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그들의 눈은 남들이 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단번에 읽어낸다. 핵심을 찌른다.

17. 297
글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

제 할 말을 다 했다고 해서 그쳐버리고 말면 글에 여운이 생기지 않는다. 여운이란 길게 남는 뒷맛이다. 한 번 더 음미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서 생긴다.

글에는 또 파란이 있어야 한다. 평면적인 설명이나 서술만으로는 안 된다. 강물이 드넓은 벌판을 만나서는 잔잔히 흐르다가 굽이친 골짜기를 만나면 여울을 이루듯, 문장에는 변화와 곡절이 있어야 한다.

18. 302
우리 마음속에는 이런 저런 근심이 독이 바짝 오른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고개를 세우고 있다. 여차하여 빈틈을 보이면 단숨에 물어 그 독이 금세 온몸에 퍼지고 말 것이다. 번뇌는 왜 생기는가? 욕심 때문에 생긴다. 내가 남을 이겨야겠고, 더 많이 가져야겠고, 그것도 모자라 통째로 다 가져야겠기에 생긴다. 잠자리가 편치 않고 꿈자리가 사나운 것도 모두 이 마음속에 똬리를 튼 독사 때문이다. 음산한 기운이 그 빈틈을 파고들어와 내 영혼의 축대를 허물지 않도록 마음의 창을 닦고 또 닦아 깨끗하게 지켜야겠다.

위순(委順)이란, 말 그대로 순리대로 내맡기라는 것이다. 몸에 고요를 깃들이고, 마음에 허공을 담으며, 분별지로 세상을 가르지 않고, 자연의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마음속에 잡된 생각이 일어날 까닭이 없다. 마음을 단련한다 함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를 닦는 것을 말한다. 텅 비고 고요하니 분노가 일어날 일이 없고, 앞서려는 다툼도 없고, 아무리 써도 축나지 않는다. 달이 허공에 떠서 천지 사방을 밝히듯, 맑은 물이 바닥을 훤히 비추듯 일렁이는 생각을 걷어내고 걷어내고 걷어내면 고요만 남는다. 그 고요가 바로 '본 마음'이요 '참 나'다.

19. 323
절정은 미리 알고 기다린 자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절정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늦는다. 속인들은 언제나 버스가 다 지나간 다음에 난리를 치지만, 지혜로운 이는 천기를 먼저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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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7
남이 보는 '자기'와 내가 보는 '자기'는 다르다. 그 괴리감이 느껴지는 경계는 선이 아니라 지대에 가깝다. 일종의 '중간지대'라고 할까. 중간지대는 내면의 자기와 외면의 자기가 일치하지 않아서 생기는 갈등의 소용돌이 영역인데, 그 소용돌이 영역에서 심리적으로 어떤 대처를 하느냐에 따라 한 인간의 느낌과 태도가 결정된다.

2. 28
미국의 연구자들은 동일한 물리적 자극에 대한 통증의 정도가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증명했다. 그동안 의료계의 통념은 그것이 심리적 요인에 의한 차이일 것이라는 쪽이었는데, 실험을 해보니 동일한 자극에도 어떤 이들이 더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것은 뇌의 특정 부분이 남들보다 더 활성화되기 때문이었다. 같은 자극에 대해 유별나게 더 큰 통증을 호소한다고 엄살쟁이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실험의 결론이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주관적 존재인 것이다.

3. 29
인간의 기억은 우월한 쪽으로 흡수된다. 과거는 찬란했으나 현재가 보잘것없는 사람은 과거 쪽으로, 과거에 비해 현재가 월등한 사람의 과거는 화려한 현재를 돋보이게 하는 장식용으로만 가능하다.

4. 41
박찬욱
박찬욱은 특정한 무엇에 빠지거나 뭐 하나만을 고집해서 생기는 '빛과 그림자'가 거의 없는 스타일이다.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도 적어도 '꼴통'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전감 혹은 안정감, 그것은 그의 영화관과는 무관하게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비롯하는 느낌이다.

"평론가보다 자기 영화를 더 잘 평론할 수 있는 사람, 일단 글을 썼다 하면 기자, 평론가들이 펜을 꺾고 싶게 만드는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하루하루가 더럽게 즐거워서 영원히 이 일이 안 끝나기를 바랄" 정도로 영화 만드는 일을 좋아하는 박찬욱

5. 63
'감이 없다'는 게 별거 아니다. 다른 현실이란 있을 수 없고 내가 알고 있고 좋아하는 것만 현실이라고 우기다 보면 필연적으로 현실감각을 잃게 된다. 현실감각을 유지하려면 타인의 행위 뒤의 동기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현상적 시각이 필요하다. 내가 보고 싶은 상황만 보지 말고 나와 타인의 전체적 현실을 동시에 인식해야 한다.

6. 79
이창동
"사물의 반응이나 언어에 무디어지는 게 두려워 삶을 흔들어놓고 싶어" 마흔이 넘어 소설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직업을 바꾸었다는 사람

7. 104
박근혜
부성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여성의 첫번째 특징은 극도의 자기절제를 보인다는 것이다. 분석심라학에서는 이런 여성의 삶을 "특수요원 훈련받듯 사는 삶"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며 그에 부응하기 위해서 극단의 의지를 발휘한다.
개인적인 삶에서 최종의 목표가 '자기를 완전히 이기고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박근혜.

8. 126
철사장은 중국 무술에 있어 최고의 파괴력 및 살상력을 발휘하는 최강의 장법을 가리킨다. 철사장의 연공에 힘써 고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타격시 일체의 외상을 남기지 않고 적의 내부 또는 내장만을 상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철사장 숙련자의 일격은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중상을 가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서 전수자가 극히 제한되어왔다고 한다.

9. 143
심은하
그녀는 <8월의 크리스마스>로 영화를 이해하게 됐고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영화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10. 188
인간은 원래 과거에 겪은 쓰라린 일보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을 더 잘 회상할 수 있다고 한다. 또 과거의 괴롭고 쓰라렸던 일들이 지금의 행복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믿는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는 쓰라린 과거를 딛고 일어섰다고 믿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11. 199
불문학자인 김화영 교수에 따르면 프랑스 출판사들이 우리 작가의 작품 중에서 번역출판하길 원하는 첫째 조건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이란다.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은 삶의 근원적 딜레마를 건드리기 때문일 것이다.

12. 209
현대인이 많이 겪는 노이로제 중에 '공황장애-panic disorder'라는 질병이 있다. 공황장애는 에고 없이 극심한 불안이 온몸을 뒤덮듯 나타나는 병이다. 운전중이나 대화 도중, 또는 비행기를 타고 가는 중에 바로 그 자리에서 곧 죽을 것만 같은 불안이 갑자기 들이닥친다. 임상적으로 그 불안의 강도는 사형집행 직전의 사형수가 경험하는 불안감의 서너 배가 된다고 할 정도다.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심의 근원은 불안이 엄습하는 그 순간에 내 몸과 내 정신이 나의 컨트롤밖에 있다는 느낌, 즉 자기통제력을 상실했다는 느낌에서 기인한다. 그것이 불안을 공포로까지 몰아가는 것이다.

13. 218
나훈아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의지에 비해 '이상적 자기'가 너무 높게 설정되어 있으면 강박증 환자가 되기 쉽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그 목표가 매우 낮다. 나훈아는 '이상적 자기'를 거의 천상의 수준에 올려놓고도 그에 준하는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능력이나 의지를 두루 가진 특별한 사람처럼 보인다.

14. 264
손석희
아나운서 손석희는 군더더기가 없는 살마이다. 그의 멘트는 목표물을 향해 공중에서 일직선으로 내리 꽂히는 매를 연상시킨다. 그만큼 간략하고 정확하다. "말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 중 손석희처럼 언어의 절제미를 보여주는 사람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의 절제된 이미지와 깔끔한 진행, 그가 지닌 합리성과 논리적 비판.

15. 278
심리학자들의 의견에 의하면 사람들은 좋은 경험과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나쁜 경험과 연합되어 있는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한다. 이 원리에 따르면 처음에는 아무런 좋고 싫은 감정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상황과 지속적으로 짝지어질 경우 그 상황에 맞는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가령, 어떤 살마을 볼 때마다 즐거운 일이 생긴다면 처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없었지만 그 사람은 즐거움과 연합되어 좋게 평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은 대개 의식적이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16. 285
존재성이 있는 사람이라야 타인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인간의 본질은 '존재성'에 있으며, 존재성이란 자신의 존재를 명확히 드러냄으로써 상대의 존재도 그만큼 명백해지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재성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만 일어난다.

17. 289
김대중
김대중의 장점은 세상이 다 아는 것처럼 글을 잘 쓴다는 것이다. 김대중의 글은 모든 문장이 주제를 향해서 일사불란하게 집중한다.

18. 318
김훈
김훈은 글쓰는 일은 영원히 '일인 대 만인의 싸움'이라고 단언한다.
"무리를 아늑해 하지 않으며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는 인간의 숙명.
"나는 '대답이 없다'라고 글을 쓰다가 '대답은 없다'라고 써야 되는 것인지를 생각하다가 밤을 새워요. 둘은 전혀 다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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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2
근래 내 생활이 더 보잘것없게 되면서 삶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비관적인 생각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러나 너와 함께 보낸 시간 덕분에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유쾌한 기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고, 자신이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존재가 아니라 무언가 도움이 될 수도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인것 같다.
일하는 것이 금지된 채 독방에서 지내는 죄수는 시간이 흐르면, 특히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리면, 오랫동안 굶주린 사람과 비슷한 고통을 겪게 된다. 내가 펌프나 가로등의 기둥처럼 돌이나 철로 만들어지지 않은 이상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다정하고 애정어린 관계나 친밀한 우정이 필요하다. 아무리 세련되고 예의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런 애정이나 우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며, 무언가 공허하고 결핍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네가 이번에 나를 찾아준 것이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2. 14
겨울이 지독하게 추우면 여름이 오든 말든 상관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부정적인 것이 긍정적인 것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냉혹한 날씨는 결국 끝나게 되어 있고, 화창한 아침이 찾아오면 바람이 바뀌면서 해빙기가 올 것이다. 그래서 늘 변하게 마련인 우리 마음과 날씨를 생각해볼 때, 상황이 좋아질 수도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된다.

3. 17

영혼에 깊이 새겨진 것은 영원히 살아 있어서 계속 그 대상을 찾아다닌다고 하지 않니.

그후 진지하게 독서에 몰두했다. 성경, 미슐레의 <프랑스 혁명>, 지난 겨울에는 셰익스피어와 빅토르 위고의 책, 그리고 디킨즈와 스토우, 최근에는 애쉴리와 좀 덜 고전적인 여러 작가들, 마이너 계열의 위대한 거장 등......

이처럼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은 부주의해지기 쉬워서 이따금 엉뚱하거나 충격적이고, 관습과 예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때가 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예를 들어, 내가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건 너도 알고 있지. 나도 그걸 알고 있고, 또 그게 충격적일 수 있다는 점도 인정한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봐라.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은 단순히 외모를 가꾸는 일에 환멸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한마디로 돈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처럼 그렇게 하는 건,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고독을 보장해주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 고독이 너를 일에 몰두하게 하고, 네 생각 전부를 차지하면서 꿈꾸고 생각에 잠기게 할 것이다.

4. 18
나는 지금 내가 선택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공부하지 않고 노력을 멈춘다면, 나는 패배하고 만다. 묵묵히 한길을 가면 무언가 얻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5. 20
게다가 고질적인 가난 때문에 이런저런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 어렵고, 온갖 필수품이 내 손에는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것만 같다. 그러니 우울해질수밖에 없고, 진정한 사랑과 우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 또, 내 영혼을 갉아먹는 지독한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사랑이 있어야 할 곳에 파멸만 있는 듯해서 넌더리가 난다.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신이여,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나요!

6. 34
그림 몇 점을 보낸다. 네가 그걸 보면 하이케(브라반트 북부에 있는 에텐 근방의 마을)의 풍경을 떠올릴 거다. 그런데 이제는 제발 솔직하게 말해다오. 왜 내 그림은 팔리지 않을까? 어떻게 해야 그림을 팔 수 있을까? 돈을 좀 벌었으면 좋겠다. '절대 안 된다'는 대답을 확인하기 위해 찾아갈 경비가 필요하다.

7. 41
너는 내가 화가가 된 것을 후회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고 말하겠지.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런 후회를 하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충실한 훈련은 게을리한 채 승리자가 되려고 허겁지겁 달려왔을 것이다. 그날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오직 그 하루만 사는 사람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이 지루하게 생각하는 해부학, 원근과 비례 등에 대한 공부를 즐겁게 할 정도로 그림에 신념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라면 계속 노력할 것이고, 느리지만 확실하게 자기 세계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돈에 쫓겨서 잠시 자신을 잊고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끄는 작품을 만들어내려면, 그 결과는 늘 불쾌한 것이었다.

8. 69
무엇보다 내가 돈 버는 일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세가 그 목적에 가장 빨리 도달하는 지름길이 아니겠지. 참되고 가치 있는 작품을 그리는 게 가장 기본이 되는 거니까. 그렇게 되려면 작품이 팔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으로 작업할 것이 아니라, 작품에 정말 훌륭한 어떤 것이 들어있어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연에 대한 정직한 탐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라도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9. 86
늙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10. 103
나는 헤르코머가 이미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 미술학교를 열었을 때 한 말이 마음에 드네. 그는 학생들에게 부디 자신이 그렸던 방식에 따라 그림을 그리지 말고, 스스로의 방식으로 그리라고 격려했지. 그리고 "내 목표는 헤르코머의 학설을 따르는 사도 집단을 만드는 게 아니라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표현형식을 확립하는 것이다"라고 했다네. 사자는 원숭이 짓을 하지 않는 법이지.

11. 110
도시에 사는 화가가 농부를 아무리 멋지게 그려도 그 인물은 농부라기보다 파리 근교에 사는 사람을 떠올리게 할 뿐이라고 네가 지난 편지에 썼던 내용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12. 111
유용한 일을 해내려는 사람은 대중의 승인이나 평가를 기대하거나 추구해서는 안 되며, 열정적인 가슴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람들의 공감과 동참만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13. 115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할 것이고, 농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다. 실제로 자신이 누구인가는 잊어야 한다.

14. 116
그 그림에 너무 빠져 지내느라 이사해야 한다는 것도 잊을 뻔했다.

15. 117
최근 작업을 마친 캔버스 네 점이 어딘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그걸 계속 가지고 있으면, 다시 손질해야 할 것 같다.

16. 133
너무 오랫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탓에 네가 보내준 돈을 받았을 때는 어떤 음식도 소화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 꼭 치료하도록 노력하마. 사실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면 힘이 넘치고 정신이 명료한데, 집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야외에서 작업하는 게 너무 힘든지 순식간에 허약해지는것 같다. 그림이 사람을 아주 지치게 하는 것 같다.

17. 134

우리가 삶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면서도 평온함을 유지한다면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내가 돈을 받을 때 간절하게 바라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비록 그동안 밥을 못 먹고 있었지만, 아니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그림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돈이 손에 들어온 즉시 모델을 구하러 나가서는 돈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작업한다.

18. 135
그는 신비스러운 미소를 특유의 무게를 갖고 아름답게 포착해서 그렸지. 렘브란트는 마술가 중의 마술가다.

19. 136
문명화된 사람들 대부분은 우울증과 비관론이라는 병에 걸려 있다. 나도 웃고 싶은 마음을 잃고 살아온 게 몇 년인지..... 이게 내 잘못인지 아닌지는 따지지 말자. 나는 좋은 웃음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절실히 느낀다.

20. 138
내 직업이란 게 더럽고 힘든, 그림 그리는 일 아니냐. 내가 나 자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았겠지. 그러나 즐겁게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비록 내 젊음은 놓쳐버렸지만 언젠가는 젊음과 신선함을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불확실하나마 미래를 상상하며 지낸다.

21. 142
나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비뚤어지고 적의에 차서 성을 잘 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마음의 평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거나 전혀 알지 못할 때라도,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약국에서 파는 약보다 더 좋은 약이 될 것이다. 대부분의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발전하게 돼 있다.

22. 143

네 자신을 즐겨라! 부족하게 즐기는 것보다는 지나치게 즐기는 쪽이 낫다. 그리고 예술이나 사랑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라. 그건 주로 기질의 문제라서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예술가가 되려는 생각은 나쁘지 않다. 마음속에 타오르는 불과 영혼을 가지고 있다면 그걸 억누를 수는 없지. 소망하는 것을 터뜨리기보다는 태워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나에게 그림을 그리는 일은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

네가 말한 것처럼, 예술은 아주 숭고하고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도 마찬가지겠지. 문제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래서 예술적 감성을 타고났고 예술에 모든 것을 바치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흔히 사람들의 오해를 받고, 또 그만큼 그들의 영감이 이 세상에는 부적절하게 비치는 경우가 많아 좌절하기도 한다. 우리는 두 가지(예술적 삶과 현실적 삶)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어야 한다.

23. 152
너도 알다시피 나의 작업은 변덕이 아주 심하다. 과일나무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는 지금의 열정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다음에는 경기장 그림을 그릴지도 모른다. 그후에는 데생을 많이 하고.

24. 153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말을 해라. 즉시 유화를 그만두고 경비가 덜 드는 데생을 하마. 별다른 이유 없이 너를 궁지에 몰아넣어서는 안 될테니까. 원하는 곳에 잠시 앉아 있을 수도 없는 파리와 달리, 이곳에서는 그림 그릴 소재가 아주 많고 여러 방식의 습작이 가능하다.

25. 154
요즘은 사람이야말로 모든 것의 뿌리라는 생각이 든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는 우울한 감상이 영원히 지속된다 할지라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물감과 석고만으로 작업할 게 아니라 구체적인 사람의 살 속에서 작업하는 게 더 가치를 갖는지도 모르지. 그런 의미에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업을 하는 것보다 아이를 낳는 게 더 가치 있는 삶이겠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역시 나처럼 일상적인 삶을 누리지 못하는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면, 나는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

26. 156
이곳은 파리만큼 비인간적이거나 부자연스럽지는 않다. 그러나 내 기질상 결혼 생활과 작품 생활을 동시에 해나가는 건 힘들 것 같다.

27. 185
화가가 자기 그림에 너무 몰두해서 감정적으로 점점 피폐해지고 가정생활이나 다른 일에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 되어간다고 할 때, 그래서 그가 단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기 희생과 자기 부정, 그리고 상처받은 영혼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 역시 그만큼 힘든 일이다. 너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화가와 똑같은 방식으로 너 자신을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28. 190
나는 성공에도 행복에도 관심이 없다. 내가 신경 쓰는 문제는 인상파 화가들의 열의에 넘치는 기획을 오래 지속시키는 일이다. 그들의 안식처와 양식을 보장하는 문제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29. 194
다음 시대의 화가들이 더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발판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은 너무 짧고, 특히 모든 것에 요감히 맞설 수 있을 만큼 강한 힘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몇년 되지 않는다.

30. 205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지금 원하는 건 빚을 지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아. 넝게 진 빚이 너무 많아서 그걸 모두 갚으려면(꼭 갚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내 전 생애가 그림 그리는 노력으로 일관돼야 하고, 생의 마지막에는 진정으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건 문제가 아니다. 유일한 문제는 그림 그리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질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리고 늘 이렇게 많이 그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다.

31. 235
이곳 사람들이 그림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다소 미신적인 생각이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로 나를 슬프게 한다. 사실 그 말은 꽤나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이어서, 살아가면서 다른 것을 잘 움켜쥐지 못한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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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청춘, 그 설익음과 진지함에 대하여

망설임과 방황의 시간만큼은 누구 못지않게 많았다. 인내력 역시 부족했다. 참을 수 없는 일에는 폭발하고 말았다. 참기 어려운 일을 참고 살기보다는 남은 인생을 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울타리에 무엇인가가 나를 팽팽히 묶어놓을라치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 모습을 감추고 싶어하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인생에서 가장 큰 회한은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할 때 생긴다. 얼핏 보면 대단히 성공하고, 무척 행복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바라던 인생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후회가 남을 수밖에 없다. 또 이와는 반대로 비참한 인생으로 끝나버린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과 선택으로 초래된 결과라면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체념은 가능하리라.
육체는 젊지만 정신이 노화된 청년들은 모두 엇비슷할 정도의 행복한 인생을 보낼 수는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자신에게 또 다른 인생이 있지 않았을까 하며 도전과 가능성의 시기를 그냥 지나쳐왔음을 후회할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 길이 아니면 미련없이 돌아섰다
29
"스스로에게 무얼 바라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 건지 반문해보면, 결국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고 인간답게 사는 삶이 좋다는 결론에 이르잖아요. 저는 안락한 생활만을 원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나빠져도 굶어죽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그렇다면 인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생활이 뭐지요? 요즘 세상은 모두가 엘리트를 꿈꾸고 머리만 굴리면서 생활하는 걸 추구하잖아요. 하지만 인간이 정말로 인간답게 살수 있는 건 몸을 움직여서 일하고 무언가 구체적인 걸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죠."
33
"학생시절에 마르쿠제가 쓴 책을 읽었는데 요즘 다시 봤거든요. 옛날에는 어려워서 잘 몰랐던 부분이 이해가 되고 너무 재미있어서 밤을 샜어요. 마르쿠제는 '노동 이외의 것에서 유토피아를 찾지 마라. 노동 속에서 유토피아를 찾아라'는 말을 했지요. 인내하면서 하는 노동은 소외된 노동이고 그 속에는 유토피아가 없어요. 그렇지만 놀이와 같은 노동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강요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로 하는 노동. 욕구를 억누르면서 하는 노동이 아닌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노동. 자신의 능력을 발견하는 데서 기쁨을 얻는 노동. 놀이인지 노동인지 알 수 없는 자유로운 노동 속에 유토피아가 있다는 거지요. 그 책을 보면서 가슴이 시원해졌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싫은 일도 성실하게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는 본질적으로 제가 게으른 인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점이 콤플렉스처럼 느껴졌는데 이 책을 보고는 제가 옳다는 걸 확신했어요."

♣ 피아노보다 칼이 좋았다 - 후루카와 시로
53
오다는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나이프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회사 일을 한 뒤, 밤 9시까지 공장에 남아서 나이프를 만들었다. 공장장으로 일했기에 그런 작업이 가능했다.
54
작업이 끝난 다음에는 만들고 싶은 만큼 나이프를 만들라고 하셔서 직장을 옮겼어요. 마음대로 나이프를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주어졌지만, 후루카와는 이전만큼 열중해서 나이프를 만들지는 못했다. 후지마이크로에 있었던 4년 동안 만든 나이프는 기껏해야 스무 자루 정도라고 한다. 1년에 다섯 자루를 만들 것이다. 옆에서 자극하는 사람이 없어졌다는 점, 새로운 철강재, 새로운 열처리법을 익히면서 기술의 한계에 부딪친 점이 원인이었다.
55
노름에 빠져 이렇게 살아도 되나?
"사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하나는 나이프를 만드는 일 자체가 오묘하거든요.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공장에서 혼자 칼을 갈고 있으면 왠지 기분이 착 가라앉아서 마음이 어두워져요. 그게 싫었어요. 그런 기분을 이겨낼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모자랐죠. 또 하나는 새 회사로 옮기면서 정신이 많이 해이해졌어요. 월급도 많이 오르고 근무 조건도 좋아지고 생활형편도 안정이 되니까 한눈팔 게 되더라고요."
56

언젠가는 오다처럼 나이프를 만들면서 살겠다는 생각에 회사를 옮긴 것인데, 이제는 나이프는 쳐다보지도 않고 노름에 미쳐 사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회사를 그만둔 뒤, 나이프 만드는 데 내 자신을 걸어보기로 결심했어요. 그때가 스물여덟이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이 서른이 넘어서는 계획 없이 이리저리 직업을 바꾸며 방황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서른까지는 시행착오 시기이니 조금은 방황을 해도 되지 않을까? 앞으로 2년. 2년동안 나이프에 내 인생을 걸어서, 진정 내 일이 될 수 있을지 시험해보자고 생각했지요."

나이프를 만들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없었던 거네요?
"일단 저금을 깨가며 사는 수밖에 없었어요. 저금이라 해봤자 100만엔 정도였지요. 그래서 생활수준을 낮췄어요. 처음에는 나이프 만드는 것만으론 생활이 안 돼서 아르바이트도 했어요. 회사를 떠나 혼자 일하면서 깨달은 것은 조직에 빌붙지 않고 혼자 일해서 벌어먹는다는 것이 굉장히 힘든 거구나 했지요."
58
후루카와는 인생을 선택해야 할 순간에 이르면 항상 쉬운 길이 아닌 험난한 길을 선택했다.
"글쎄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걸어왔네요. 나이프를 만드는 것도 그렇고요.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는데, 쉽게 하는건 싫었어요. 쉬운 건 항상 타협을 불러오거든요. 타협이 싫어요."
타협하지 않는 인생이 편하지는 않다. 그래도 즐거움은 많은것 같다.

♣ 미치지 않은 것이 신기하다 - 무라사키 타로
66
아버지가 타로를 앞에 앉혀놓고 이렇게 설득을 한 것이다.
"원숭이 재주는 앞으로 점점 더 발달할 것이다. 네가 후계자 1호가 되면 이 세상에서 제일인자가 되는 셈이다. 어떤 세계에서든 최고가 되는 게 가장 좋다. 그렇지만 이건 모험이기도 하다. 잘못하면 실패로 끝나버리고 평생 네 무대를 잃을수도 있다. 그렇지만 남자라면 한번 도전해보거라."
80
사는 것이 고통임을 깨달은 순간 강해졌다
83
"가금 이토록 젊은 나이에 아민큼 성공해서 이렇게 행복한 가정을 갖다니, 과연 괜찮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너무 잘나가니까 다시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항상 새로운 목표를 만들어서 도전하고 있어요."

♣ 고기의 신이 되다 - 모리야스 츠네요시
105
한평생 이 일을 하겠다는 결심으로 고기에 관한 책은 다 봤다.

♣ 카메라를 본 순간 빠져들다 - 미야자키 마나부
122
미야자키는 사진을 찍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밤하늘을 나는 날다람쥐의 사진을 찍어서 <아사히카메라> 월간 콘테스트에 응모했는데 5위에 입선한다. 이를 계기로 자신감이 붙어서 더욱 열심히 카메라에 빠져들었다.
124
"산길을 걷는데 전에는 피로라는 걸 전혀 몰랐거든요. 그런데 쉬 피로해지고 끈기도 없어지고 기력이 점점 떨어졌어요. 너무 이상해서 의사를 찾아갔더니 신장과 간이 굉장히 안 좋다면서 즉시 입원하라고 하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병이라곤 몰랐거든요. 건강에는 남들보다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조금 놀랐어요. 밤에 밤도 잘 못 자고 무리해서 계속 산길을 걸어서 그런 것 같았는데, 간이 나빠져서 기력이 떨어진다고 하니 자꾸 우울해지더라고요.
125

사진을 찍으면서 자신의 인생은 카메라와 동물을 빼놓고는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동물사진 작가'가 직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살아갈 방향은 이것밖에 없었다. 건강을 헤쳐가며 들로 산으로 걸으며 사진을 계속 찍었다.
"사진만으로는 벌어먹을 수도 없고, 정규직으로 입사할 만큼 건강하지도 않았죠. 하긴 취직을 하면 아무 때나 사진을 찍을 수 없을것 같아서, 그 다음에는 무조건 아르바이트만 했어요. 정말 이것저것 많이 해봤죠. 트럭 모는 일, 주유소 일, 버스 차장, 전기 공사 케이블 설치, 막노동도 했지요. 결국 결혼할 때까지는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했어요. 스물다섯 살에 결혼을 했는데 회사를 그만두고 5년간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았어요. ... 이제는 사진만 찍어도 먹고살 수 있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힘든 시기를 보내왔죠."
126
"한번은 제 솜씨를 시험해보려고 <아사히카메라 연감>에 사진을 보내 응모를 했어요. 매년 화제가 된 사진을 모아서 만드는 책인데, 선정 작품 외에 프로, 아마추어를 불문하고 일반 부문에서 세 작품의 신작 사진을 실어주거든요. 그런데 입선이 됐어요. 전국에서 단 세 사람뿐이라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죠.

♣ 매가 낫지, 여자보다 훨씬 낫지 - 마츠바라 히데토시
163
"저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거든요.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보는 것 말고는 이렇다 할 일도 없어서 돈 쓸데가 없어요. 자급자족을 하면 돈이 없어도 의외로 풍요롭게 살수가 있어요. 실제로 생활해보면서 이것이 진정 인간다운 삶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옛날부터 이런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사는 걸 동경했거든요. 지금 생활은 거의 제가 꿈꾸던 것에 가깝게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죠."
164
"저는 어렸을 때부터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확실했어요. 좋아하는 거라면 어떤 일이라도 참고 했지만, 싫어하는 일은 잠시도 못 참는 성격이었어요. 좋아하는 게 뭐였냐고요? 자연이죠. 어렸을 때부터 다른 애들하고 노는 시간보다 새나 동물과 노는 시간이 많았어요. 자라면서 제 생활을 생각해보니 자연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확신이 들었죠. 넥타이를 매야 하는 월급쟁이 생활은 정말로 싫었고, 죽을 때까지 넥타이는 안 매고 살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죠."

♣ 사랑에 취하고 와인에 취하고 - 다사키 신야
189
다사키는 1년 동안 여행자금을 저축했다. 그동안 모은 60만 엔에 부모님 원조 30만 엔을 합친 90만 엔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되도록 절약해서 오랫동안 머무를 작정이었다.
192
"처음에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어요. 어느 누구와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는 생활이었잖아요. 외로웠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포도밭 사이 오솔길을 혼자서 터벅터벅 걸어다녔죠."
195
보르도의 친구들이 너무 그리웠다. 되도록 빨리 프랑스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번 더 저금을 해야 했다. 낮에는 카페에서 일하고 밤에는 고급 프랑스 요리점에서 웨이터로 일하면서, 아침부터 밤까지 열심히 일하며 다달이 10만 엔씩 저금을 했다.

♣ 처음부터 색에 끌린 것은 아니다 - 도미타 준
그저 세월이 가는 대로 질질 끌려서 살아가기만 했다.
내가 진정 스스로 살아갈 길을 잡고 싶었다......
232
오로지 책만 봤어요. 그것도 소설만요. 도스토에프스키나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했어요. 문학 청년이라 할 수 있죠. 하지만 문제는 제가 문학재능이 없거든요. 거걸 진작에 알았기 때문에 문학을 하겠다는 마음 같은 건 품지 않았어요.

♣ 소리를 만드는 아티스트로 거듭나다 - 요시노 긴지
261
"하루하루가 새로운 발견이었고 너무나 재미있어서 어쩔 줄을 몰랐죠. 날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더구나 월급까지 받으니 정말 좋다고 생각했어요."
269
"물론 회사의 발령 지시대로 다른 부서에서 얌전히 일을 하면 그곳에 남아 있을 수는 있었곘죠.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려고만 했다면 그런 선택도 했을 거예요. 결국 제가 뭘 위해 사느냐는 문제에 이르게 되더라고요. 제 음악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어도 언젠가는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하나만 가지고 그만뒀죠.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어요. 태평양 한가운데에 고무보트를 탄 채 내버려진 것 같긴 했죠."
270
"하루에 두세 편을 녹음했으니 꽤 수입이 괜찮았어요. 그렇지만 마음은 황폐해졌죠. 돼지같이 꽥꽥거리며 돈만 쫓아가는 제 자신이 비참했어요. 거리를 걷다보면 저를 뺀 모든 사람들이 자신감에 찬 인생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어요. 열심히 일한 덕분에 1년 뒤에는 100만 엔을 모을 수 있어죠. 그때 문득, 이 돈으로 앞트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런 짓을 하면 정말 질질 끌려가는 20대를 보낼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결심을 고쳐먹고 이걸 전부 써버리자고 마음먹었죠."

♣ 에필로그
청춘, 수수께끼 같은 공백시대

나는 요즘 젊은이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볍게 떠도는 대세순응주의자가 너무도 많다.
인간도 사회도 너무 가벼워져서 적당주의에 물들어가는 것 같다.

물론 구카이는 그 항해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살아서 일본에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당나라에 유학을 간다고 해서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목숨을 거둘 가능성도 컸다.
항구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미지의 바다를 앞에 두고 구카이는 불안했을 것이다. 출범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자신의 인생을 거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구카이는 배를 타고 떠났다. 분명 '수수게끼의 공백시대'가 그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줬을 것이다. 자신감이 있었기에 그는 자신을 내걸 수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에게 걸었던 것이다. 앞으로 자신이 개척해 나아가야 할 상황에 모든 것을 맡긴 것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강한 의지만 있다면 자연스럽게 스스로 단련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의지가 강하면 자연히 출범을 결의할 날이 찾아온다.

♣ 번역을 마치고
역자의 직업상 많은 젊은이들을 가르치고 대화를 나눌 기회가 많다. 그들이 조심스럽게 꺼내보인 고민거리 가운데 가장 자주 말하는 건 "이 일을 하고 싶은데, 과연 이 일을 해도 될 것이냐, 전망이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그때마다 역자의 대답은 늘 똑같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얼 하고 싶은지조차도 모르고 살아간다. 그런 축복을 그냥 외면하고 지나갈 텐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이 아무리 겸손한 표정을 보이고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있어도, 그들에게는 알 수 없는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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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76
나는 2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순조롭게 제약회사의 지사에 취직했다.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허전한 듯했지만, 월급을 타면 친구들과 프렌치 레스토랑에 가거나 티파니에 들러 액세서리를 사면서 그런 대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물론 그런 별것 아닌 기쁨에 백 퍼센트 만족했던 건 아니다. 그러나 가끔 서점에 들러 <그 정도면 충분하다. 현재를 즐겨라>와 같은 제목의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며 '아, 역시 이걸로 된 건가' 하고 자족하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 무엇에 대해서도 흥미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내게 있어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사건이었다. 그렇다고 금세 흥미를 가질 만한 뭔가가 떠오른 것은 아니다. 고작 생각나는 거라곤 외국어를 배워볼까. 아니, 차라리 로마로 유학을 떠나볼까. 아니, 좀더 현실적인 것으로는 친하게 지내는 남자친구와 해외에서 결혼식을 올려볼까 하는 정도의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내가 실제로 흥미를 가질 만한 것들이 아니라 만약 흥미를 갖게 된다면 분명 주위에서 부러워할 일들이었다.

2. 77
갑자기 스피커가 고장나 조명이 환하게 켜진 댄스플로어에서 "네게는 괴로움은 없다. 그러나 진정한 기쁨 또한 없다"라는 악마인지 천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나의 내면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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