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5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 세상에 미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큰일이란 없다. 학문도 예술도 살아도 나를 온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빛나는 성취를 이룰 수 있다. 한 시대를 열광케 한 지적, 예술적 성취 속에는 스스로도 제어하지 못하는 광기와 열정이 깔려 있다.
2. 43 김영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세상에 대한 환멸을 못 이겨 종내는 젊은날의 우울증 증세가 도져 심각한 지경까지 이르렀던 모양이다.
3. 66 김득신
대저 사람은 스스로를 가벼이 여기는 데서 뜻이 꺾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느라 학업을 성취하지 못하며, 마구잡이로 얻으려는 데서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만다. 공은 젊어서 노둔하다 하여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독서에 힘을 쏟았으니 그 뜻을 세운 자라 할 수 있다. 한 권의 책을 읽기를 억 번 만 번에 이르고도 그만두지 않았으니, 마음을 지킨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작은 것을 포개고 쌓아 부족함을 안 뒤에 이를 얻었으니 이룬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4.
무엇이 좀 잘된다 싶으면 너나없이 물밀 듯 우루루 몰려갔다가, 아닌듯 싶으면 썰물 지듯 빠져나간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싫은 소리는 죽어도 듣기 싫어하고 칭찬만 원한다. 그 뜻은 물러터져 중심을 잡지 못하고, 지킴은 확고하지 못해 우왕좌왕한다. 작은 것을 모아 큰 것을 이루려 하지 않고 일확천금만 꿈꾼다. 여기에서 무슨 성취를 기약하겠는가?
5. 68
세상 사는 일이 하도 심드렁하다 보니, 옛사람의 맑은 정신이 뜬금 없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삶의 속도는 나날이 빨라져, 어떤 새것도 나오는 순간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다. 그런데도 내면에는 마치 허기가 든 것처럼 충족되지 않는 허전함이 있다. 정말 마음 맞는 벗이 하나 있어, 멀리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지는 그런 만남이 문득 문득 그리울 때가 있다.
6. 이덕무
74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읽는 멍청이라고 해도 또한 기쁘게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풍열로 눈병에 걸려 눈을 뜰 수 없는 중에도 어렵사리 실눈을 뜨고 책을 읽었던 책벌레였다. 열 손가락이 다 동상에 걸려 손가락 끝이 밤톨만하게 부어올라 피가 터질 지경 속에서도 책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써 보내던 그였다. 그는 마치 기갈 들린 사람처럼 책을 읽었다. ... 한 권 책을 얻으면 기뻐 이를 읽고, 또 중요한 부분을 베껴 적었다. 이렇게 읽은 책이 수만 권이었고, 파리 대가리만한 작은 글씨로 베낀 책만 수백 권이었다.
7. 82
그의 편지글에 보면 "옛날에는 문을 닫고 앉아 글을 읽어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었지요"라는 구절이 있다. 정작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의 우리들이다. 인터넷 시대에 세계의 정보를 책상 위에서 만나보면서도 천하의 일은 커녕 제 자신에 대해서조차 알 수가 없다. 정보의 바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혼란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이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나는 없고 정보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내가 소유한 정보의 양이 늘어갈수록 내면의 공허는 커져만 간다. 주체의 확립이 없는 정보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그만 시련 앞에서도 쉽게 스스로를 허문다. 거품 경제 속에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다 갑자기 닥친 잿빛 현실 속에서 그들의 절망은 너무도 빠르고 신속하다.
8. 105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룰 수 없는 꿈을 쫓아 긴 밤을 한숨 쉬며 애태웠을까? 분노를 삭이고, 재기를 꿈꾸면서, 안타까운 후회와 허망한 희망으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지만, 막상 먼동이 하얗게 터오고 나면 남는 것은 불면의 피로와 부질없는 생각의 형해뿐이다.
9. 136
넓지는 않지만, 방문을 열면 한낮 해가 제 마음대로 들어와 놀다가는 방. 환한 햇살이 물밀듯 들어와 삶의 그늘을 지워주는 방. 별다른 장식은 없어도 내 읽고 싶은 책은 갖춰두고, 사랑하는 아내와 차를 마시며 독서에 열중할 수 있는 방. 향을 피워 정신을 맑게 하고, 세상에서 저만치 떨어져 있지만 천지고금을 굽어보고 우러르며 아득한 옛 선인들과 만나고, 천고를 벗삶아 마음껏 노닐 수 있는 방.
10. 185
지금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글 속에서 노닐고 있다.
11. 225
"귀에 대고 하는 말은 듣지를 말고,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며 할 얘기라면 하지를 말 일이오. 남이 알까 염려하면서 어찌 말을 하고 어찌 듣는단 말이오. 이미 말을 해놓고 다시금 경계한다면 이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인데, 사람을 의심하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소.
12. 260
"까불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아라. 얻었다 좋아 말고, 잃었다 슬퍼 말아라.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것이지. ... 있지도 않은 마음을 잡았다고 하지 말아라. 허공 속의 연기를 보았다고 하지 말아라. 종을 떠난 종소리를 어이 쫓아 잡으리. 오는 인연 막지 말고 가는 인연 잡지 말아야지."
13. 263
늘 여유와 한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옛사람은 "젊었을 적 한가로움이라야 한가로움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다 늙어 한가로운 것이야 할 일이 없는 것이지 한가로움이라 말할 것이 못 된다. 숨가쁜 일상 속에서 짬 내어 누리는 한가로움, 일부러 애써서 찾아내는 한가로움이라야 그 맛이 달고 고맙다.
14. 270 <국영시서>
"국화는 여러 꽃 가운데 특히 빼어난 점이 네 가지 있다. 늦게야 꽃을 피우는 것이 한가지이고, 오래도록 견디는 것이 한 가지이며, 향기로운 것이 한 가지이고, 어여쁘지만 요염하지 않고 깨끗하지만 차갑지 않은 것이 한 가지이다. 세상에서 국화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국화의 운치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 네 가지 범위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서리를 아랑곳않고 꽃을 피우는 국화의 매운 마음과 향기를 사랑한다.
15. 274
처음에 짐짓 허튼 수를 한 번 두어 상대의 김을 뺀 뒤, 아예 기대를 하지 않게 해놓고서 느닷없이 정면 공격으로 일격에 무찔러버린다.
16. 277
고수들은 뭔가 달라도 다르다. 그들의 눈은 남들이 다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들을 단번에 읽어낸다. 핵심을 찌른다.
17. 297
글에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
제 할 말을 다 했다고 해서 그쳐버리고 말면 글에 여운이 생기지 않는다. 여운이란 길게 남는 뒷맛이다. 한 번 더 음미하게 만드는 힘이 여기서 생긴다.
글에는 또 파란이 있어야 한다. 평면적인 설명이나 서술만으로는 안 된다. 강물이 드넓은 벌판을 만나서는 잔잔히 흐르다가 굽이친 골짜기를 만나면 여울을 이루듯, 문장에는 변화와 곡절이 있어야 한다.
18. 302
우리 마음속에는 이런 저런 근심이 독이 바짝 오른 독사처럼 똬리를 틀고 고개를 세우고 있다. 여차하여 빈틈을 보이면 단숨에 물어 그 독이 금세 온몸에 퍼지고 말 것이다. 번뇌는 왜 생기는가? 욕심 때문에 생긴다. 내가 남을 이겨야겠고, 더 많이 가져야겠고, 그것도 모자라 통째로 다 가져야겠기에 생긴다. 잠자리가 편치 않고 꿈자리가 사나운 것도 모두 이 마음속에 똬리를 튼 독사 때문이다. 음산한 기운이 그 빈틈을 파고들어와 내 영혼의 축대를 허물지 않도록 마음의 창을 닦고 또 닦아 깨끗하게 지켜야겠다.
위순(委順)이란, 말 그대로 순리대로 내맡기라는 것이다. 몸에 고요를 깃들이고, 마음에 허공을 담으며, 분별지로 세상을 가르지 않고, 자연의 법에 따라 일을 처리한다면, 마음속에 잡된 생각이 일어날 까닭이 없다. 마음을 단련한다 함은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공부를 닦는 것을 말한다. 텅 비고 고요하니 분노가 일어날 일이 없고, 앞서려는 다툼도 없고, 아무리 써도 축나지 않는다. 달이 허공에 떠서 천지 사방을 밝히듯, 맑은 물이 바닥을 훤히 비추듯 일렁이는 생각을 걷어내고 걷어내고 걷어내면 고요만 남는다. 그 고요가 바로 '본 마음'이요 '참 나'다.
19. 323
절정은 미리 알고 기다린 자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것이 절정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늦는다. 속인들은 언제나 버스가 다 지나간 다음에 난리를 치지만, 지혜로운 이는 천기를 먼저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