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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이란 어쩌면 가장 손쉬운 사랑의 회피수단이지. 그러니까 가장 통속적인 사랑의 결말이 이별이란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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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전공하는 친구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0.4초, 유전자는 어떤 유전자와 몸을 합치면 좀더 나은 유전자를 재생산해낼 수 있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했다. 모든 것은 DNA의 자기증식 본능일 뿐이라고. 우리의 몸과 정신은 다만 DNA의 숙주, 숙주가 하는 일은 의지로 해결될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마음 편하게 즐기면 그뿐이라고, 그러는 게 진화에 협력하는 것이라고 그 친구는 말했다. 친구는 자신이 몹시 급진적인 선각자라고 믿고 있는 자 특유의 뻔뻔스럽고도 해맑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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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때문만은 아니었고...... 우리 박신부님이 말이야. 책을 쓰셨는데 그런 말이 있더라구. 신학교엘 갔는데 그만두고 싶었다나? 그런데 차일피일하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고 내가 그만두면 우리 어머니가 얼마나 실망하실까, 우리 본당 신부님은 얼마나 실망하실까, 내 친구는? 내 동료는? 내 은사는? 그래서 용기 없는 자기 자신을 질타하며 시간이 많이 흘러 신부가 되었는데 어느날 알게 되었다고 하시더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 끌려왔다고 생각했던 거, 자기가 눈치보았다고 생각하는 거, 다른 게 아니라 실은 그게 사랑이고 그게 소명이라는 걸...... 나 그때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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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것과 회사를 그만둔 것, 혹은 진석과 헤어진 것 그중 어떤 것이 먼저 떠나라고 그녀를 부추겼는지 그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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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해를 사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6. 157
이제 곧 서른이 되니까, 아버지도 돌아가셨는데 시집도 가지 않고 새엄마와 성 다른 남동생과 함께 사는 일도 염치가 없긴 했으니까, 서른이 넘은 사람은 자기 인생에 책임을 져야 하고, 독일이나 빠리에서가 아니라 사막에서 사막으로 떠돌다가 이 지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건 스스로의 책임일 뿐일 테니까, 그러자 그녀는 낯선 별로 떠나는 여행객처럼 얼마간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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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또복권이 당첨된다 해도 넌 결혼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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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겹다 해도 젊다는 것은, 힘겹지 않아도 늙은 시간보다 반추하기에 즐거운 것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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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그와 헤어진 일보다 더 힘든 것은, 누구도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진석과 수연은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듯한 친구들에게 다시는 그녀와 연관해 그의 이름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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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출판사에 입사해 교정을 보았던 책에서 로미오가 줄리엣의 사촌을 죽이고 울부짖던 말, 나는 운명에 희롱당하는 바보야! 하는 절규가 들려오는 것처럼, 누구에겐지 모를 배신감이 울컥거리며 올라왔다. 이럴 때 누구를 가장 많이 원망해야 하는지 알 수도 없어서 수연은 문득 여기까지 찾아와 나연을 찾아낸 자신이 미웠다.
11. 210
"저에 대해 물으신 게 먼저였죠? 아무런 장애가 없다면 나연이랑 결혼하게 되겠죠. 그러나 그게 우리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죠. 결혼은 우리가 결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때, 남들도 그러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그때, 마침 내 앞에 애인 없이 나타난 상대방과 하게 되는 거니까. 그러고 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이 나타나도 우린 그 사람과 결혼할 수 없는 거, 그게 보통의 룰이겠죠."
"그게 보통의 룰이군요."
수연이 명섭의 말끝을 따라 했다.
12. 218
"그래. 네가 수연이구나. 살아 있으니까 널 만나는구나. 어떻게 이렇게 왔니? 어떻게 이제야 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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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 원망하지 말아라. 좋은 분이셨다. 만일 네게 엄마에 대해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그건 미워서가 아니라 매우 사랑해서였을 거야. 네 아버지 네 엄마 정말 사랑했으니까. 너무 사랑하면 너무 무서워져서 아무 말도 할수 없고 아무 기억도 하고 싶지 않은 법이니까. 네 아버지 죽을 때까지 아마 엄마 잊지 못했을 거야. 네 엄만 참 좋은 여자였으니까."
14.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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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고집인지, 신념인지 혹은 종교인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들을 만난 때 그들을 내가 써야 할 글과 연결짓지 않는다. 뭐랄까, 언제부터인가 고민해온 문제, 즉 산다는 것이 쓴다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생각, 그러니 혹여라도 내가 글을 쓸 생각으로 그들을 만난다면 내가 그들을 내 취재거리로 생각하게 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백퍼센트 진지하게 인간적으로 그들을 만나지 않으면 안된다고,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고 내 생각을 이마에 써붙이는 것도 아닌데 혼자, 비장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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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살고 나면 쓸 수 있어, 열심히 살면 그러면 쓸수 있어, 친구야 그렇지? 하지만 나는 거의 오년이 넘도록 글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엔 좀 쉬자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써지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고, 떨어지는 이파리와 부는 바람, 피는 꽃을 봐도 그저 멍했다. 사십년 만에 처음으로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했던 시간들이었다.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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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처음으로 오래도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스물아홉살 무렵이던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아니, 내 앞에 다른 현실처럼 펼쳐지던 한밤중의 악몽이 두려워서 동굴처럼 막막한 잠을 자려고 마셔댔던 독주들을 치워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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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가, 왜 묘사하고 싶다고 생각했던가, 왜 저 사람의 웃음 뒤에 울음이 차오르고 있다고 느끼고야 말았던가? 나는 그런 통찰력을 받았던가? 왜 스무살 시절 엄마의 말을 듣지 ㅇ낳고 내 인생을, 감히 여자가 이 한국이란 땅에서, 나는 내 인생을 살겠어, 누구의 것도 아닌 내 인생을 내 인생으로 살아가겠어, 라고 그토록 굳게, 돌이킬 수도 없이 결심했던가. 가끔씩 글이 풀리지 않으면 그런 쓰잘데없는 회한들을 기억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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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혼자 책상 앞에 앉아 멍해 있으면, 나를 배반하지 않는 것은 글쓰기뿐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건 전적으로 내게 달린 일, 나의 감각을 인화해내고, 나의 경험을 완성해주어서, 내게 삶을 삶으로 명확하게 살도록 해주었으니까. 잘못되었을 경우 내 탓이라고 하면 되니까, 책임의 실체가 있고 능력의 부재가 뚜렷한 거니까. 최소한 운명이나 배신은 아닌 거니까...... 그러니 이제는 알게 된 것이다. 쓰는 일보다 사는 일이 더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두 개가 적어도 내 인생에 있어서는, 실은 처음부터, 갈라놓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모든 인생길이 나침밤처럼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새삼 내가 작가라는 일이 감사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그러는데, 진심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