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어놓은 밑줄이 거대하여 일부만..
<강석경 - 나의 한가운데로 가는 여정>
♣ 아버지의 파산으로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상금 때문에 소설이라는 것을 처음 써 본 것.
♣ 세 차례 직장생활도 했으나 내 존재는 늘 물위의 기름 같았다. 가슴이 공허했고 영혼은 갈망에 흔들렸다. 언어는 늘 머릿속에 있었기에 원고지 위에서 그것을 모색해야 했다. 영혼의 눈은 어느덧 조각에서 문학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문학은 필연으로 다가온 자아찾기의 방편이었다. 전업작가 생활로 들어서면서 문학에만 매달리자 글쓰기가 높은 산을 넘는 것처럼 힘겨웠다.
♣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작가들은 자신의 상처를 문학의 화두로 삼고 있다. 그 상처를 푸는 방법으로 문학을 택한 것 같다. 분단 현실로 가족이 상처받은 작가는 끊임없이 분단소설을 쓰고 아버지의 부재도 번번이 작품에 등장한다. 사랑에 상처받은 자의 시엔 사랑과의 투쟁이 되풀이 그려진다. 그래서 문학을 패자의 기록이라 말하는지 모르지만, 작가의 상처 혹은 작중 인물의 상처는 곧 그 사회의 단면이므로, 작가들은 상처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속한 사회의 왜곡된 면이나 인생의 환부를 열어젖힌다. 그래서 보들레르는 이렇게 기도했다. "신이여, 지켜 보기에는 너무나 역겨운 상처의 밑바닥까지 응시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 인도여행 후 '모든 집착은 미개한 것이다' 깨닫고 내 존재의 기반인 문학까지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언어로 돌아오고 만 것은 그것이 본질인 영혼을 탐색하는 최적의 보루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고은 - 나의 문학은 폐허로부터 시작했다>
♣ 비 온 뒤의 앞산처럼 확실한 이런 질문으로 나는 문학을 하지 않는다. 그저 시인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밀물이었다. 그저 시인이 되었을 뿐이다. 썰물이었다.
♣ 학교에서는 장래의 화가였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는 내일의 시인이었다. 시인이기를 얼마나 열망했던가. 그런데 바로 일 년 전만 해도 나는 화가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외삼촌의 서가에서 반 고흐 전기를 꺼내 보았을 때 나는 "오직 고흐이리라. 그렇지 않으면 무이리라"라고 책상머리에ㅣ써 붙이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이 다음에 시인에의 열망이 다른 것이 되고 싶은 나머지 한때의 열병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가정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 시 혹은 문학은 반드시 그 시대의 어떤 상흔에서 그 의미를 이끌어낸다. 시인은 그러므로 상처받은 혼신이다. 나에게 시는 전쟁 이전의 꿈과 전쟁 이후의 절실성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 내 문학은 그런 폐허를 떠도는 자의 비가이기를 자처했다. 그래서 시의 본적지는 폐허이고 시의 현주소는 폐허의 기억을 가진 미완의 역사현장인 것이다.
<고형렬 - 세상에 시 한 송이 바친다>
<공지영 -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나뿐이므로>
♣ 칠 년쯤 전 겨울날 나는 마포에 있는 한 출판사를 향해 차를 몰고 가고 있었다. 일찍이 문자를 알아 조숙하기만 했던 아이는 소설가가 돼 있었다.
♣가장 먼저 다가온 느낌은 그래도 살 수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세 살 때 혼자서 오빠의 책을 베껴 쓴 이래 아마 거의 사십 년 만에 글씨 한 줄 없이 석 달을 산 것이다. 글 없어도 나는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잘! 소설가가 된 지 십오 년쯤의 세월이 흘렀다. 처음 몇 년 동안 나는 이런 질문에 주저 없이 대답하곤 했다. "왜 글을 쓰냐구요? 왜냐하면요, 그건 오직 그때만이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지요! 글을 쓰는 순간만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는 없거든요."
♣ 나는 아직도 내가 평생 글을 쓰며 살지 자신하지 못한다. 가끔 친구들에게 "나 글 쓰는 거 때려치우고 국수집 할까 봐, 나 김치국수 맛있게 비비잖아" 하면 친구들은 이제는 아예 대꾸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 따르면 글 쓰는 것은 나의 운명이라는 거다. 운명... 운명 말이다. '그럴까' 하고 나는 우물거린다.
♣ 그도 아니면 어떤 상황에서도 거짓말은 할 수 없는 치매증세 때문에 다른 직업은 아예 꿈도 꿀 수 없어서? 의례적 인터뷰라도 하고 오는 날이면 집에 와서 기절한 듯 서너 시간은 자다가 깨어나고 낯선 이들과 점심을 먹으면 어김없이 체해 며칠을 고생하는 특이체질이기 때문에?
♣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설가가 되고 나서도 처음으로, 일기장에 그렇게 썼다. "나는 작가 공지영이다. 그래서 고맙다, 지영아"라고.
<구효서>
♣ 내게도 문학은 꿈이었다. 내 사진의 배경은 언제나 책장이었으면 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학자풍의 내 모습을 어려서부터 떠올려 보곤 했다. 책이라곤 '토정비결' 한 권밖에 없던 집안에서 자란 탓이리라. 도서관도 책방도 없던 마을에서 자란 탓이리라. 내 꿈은 실현 가능한 그 무엇이었다기보다 책도 없고 안경 쓴 형제 하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지독한 실의와 부정이었을 뿐이었다.
♣ 내 꿈이란 고작 그 끔찍한 미래를 향한 막연하고도 불안한 거절의 몸짓일뿐이어서, 정작 그 꿈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는 무지했고 무관심했다. 당초 이루어질 수조차 없는 거라고 여겼으므로 내 꿈은 몰약에 의존한, 나른한 백일몽에 지나지 않았던 거였다.
♣ 기대라는 것 중에는 그 기대로부터 배반당해야만 얻을 수 있는게 있다는 사실을 그 즈음 깨닫지 않았을까. 내가 기대했던 문학은 내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함으로써 스스로의 몸을 드러냈다고 할까.
♣ 이렇듯, 내게 있어 문학이란 예나 지금이나 기묘한 질문만을 던져 놓은 채 짓궂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이며 무지개일 뿐이다. 내가 잡았다고 잡은 것은 언제나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듯 알지 못할 것이 문학이지만, 그 문학이 나를 이끌도록, 나는 매번 기꺼이 문학을 앞세우고 따라간다. 질문의 늪이 신비해서 심심할 새가 없다. 그것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라면 이유다.
<김광규 - 중얼거리기 위하여>
♣ 문자를 도구로 삼아 생게를 유지하기는 힘들다. 소설을 써서 전업작가로 입신한 경우는 더러 있지만, 시를 써서 전업시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이백이나 두보 같은 고전 시성으로부터 서양의 현대시인 T. S. 엘리엇이나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의 시인들이 대개 시업 이외의 생업에 종사했다.
♣ 1975년 여름, 계간지 '문학과 지성'에 네 편의 시를 발표한 것이 나에게는 창작의 공식적 출발점이었다.
♣ 아직도 수많은 시집이 출판되고 시 전문지도 심심찮게 창간되지만, 시의 독자는 날로 줄어들고, 일부 문인들만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시를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은밀한 속삭임도 못 되고, 일방적인 중얼거림으로 바뀌었다. 시인은 이제혼자서 중얼거리는 이상한 사람으로 되어 버린 것이다. '중얼거리다'는 상대방을 전제로 하지 않고, 메시지의 전달을 원하지도 않는, 글자 그대로 절대적 고백에 접근하는 언술행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케이션의 종언을 개의치 않는 중얼거림이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김기택 - 나를 견디는 일>
♣ 삼십대 초반이던 어느 날 회사에서 외출했다가 들어오니 책상에 신문사 문화부에서 전화 왔었다는 메모가 놓여 있었다. 메모를 보는 순간, 신춘문예에 응모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 전에 한 번도 문예지나 신춘문예 본선에서 거론조차 된 적이 없었고, 신춘문예 사고를 보고 약간 흥분된 마음으로 투고는 했지만 속으로는 거의 포기하고 있었던 터라, 뜻밖이었다. 어쨌든 별 희망 없이 지루하게 살고 있었던 나에게는 큰 용기가 되었고, 한때의 취미로 머물다가 없었던 일이 될 것 같았던 나의 시쓰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등단작을 다시 보며 습작기를 돌이켜 보면, 내 시는 나 자신에 대한 증오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습작기의 나는 육체적으로 매우 열등하고, 환경적으로도 보잘것없을 뿐만 아니라 앞날은 캄캄했고, 어느 곳을 돌아보아도 기댈 곳이 없었고, 그것을 헤쳐 가기에 내 자신이 너무 무능해 보였고,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었으며, 나의 몇몇 사소한 약점이나 버릇은 나에게 견디기 힘든 치욕감을 주기도 하였다.
♣ 쥐는 스스로 제 안에 갇혀 나오지 못하고, 밝은 곳으로 나가기를 두려워하고 자꾸 어두운 곳으로 숨으려 한다. 나도 지능적으로 숨을 곳을 찾으려고 한다. 평균적인 삶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가정 속으로, 너무나 흔한 외모여서 눈에 잘 띄지 않는 직장인의 모습 속으로 숨는다.
가능하면 남들에게 노출되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러면서도 먹고 살아야만 하는 삶의 압력에 눌려 나는 쥐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눈과 몽둥이가 있는 대낮의 한가운데를 어쩔 수 없이 통과하고 있다. 나는 자꾸 쪼그라들고 작아진다. 내가 쓴 '쥐' 안으로 점점 갇히고 있다.
♣ 등단 십오 년째에 접어든 지금도 나는 여전히 한 회사의 건물 속에, 한 가정의 가장 속에, 수많은 평범한 사십대의 남자들 속에 숨어 있다. 숨어서 안 쓰는척하며 최소한의 작품만 쓰고 있다. 일정 기간에 쓴 작품들이 모이면 시집을 낸다.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반복적으로 하고 있는 이런 행위는 무엇인가? 이런 시쓰기를 계속 해야 하는가? 혹시 시인이라는 외부적인 프리미엄을 누리기 위한 습관적인 행위는 아닐까?
<김성동 - 홀로 피어나는 '그늘의 꽃'>
♣ 문학잡지사에서 현상모집하는 신인문학상에 응모를 하기는 하였으나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중생이 이를 옥물고 써 본 그것이 이른바 '소설'이라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인지, 당최 자신이 없는 것이었다.
♣ 그래서 무엇인가를 써 보았던 것이었다. 무언가를 써서 응모해 보았던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데 무엇일까? 무언가 세상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는 이야기이겠다. 할 말이 많다는 것은 맺혀 있는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겠다. 맺혀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은 세상 또는 세상 사람들한테서 상처를 받았다는 이야기이겠다. 그것도 회복 불능의 깊은 상처를. 그리하여 세상과 세상 사람들이 잘못되었다는. 잘못되었으므로 뜯어고쳐야 된다는. 뜯어고쳐서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어야 된다는.
응모를 했다고는 하나 이 많이 모자라는 중생 작품이 '쯩'이 있는 숱한 응모작들과 겨루어 당선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선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으므로 백만 원이라는 상금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은 어디에도 그 터무니가 없었다. 상금을 받을 수 있는 희망의 터무니가 없었으므로 생계의 대책이 없었다. 소설을 쓰는 석달 동안을 국수와 라면 쪼가리로 연명하였으므로 당장 끼니가 골칫거리였다. 1978년 여름이었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깊어 있었다.
<김연수 - Ten days of happiness>
♣ 내가 죽고 난 뒤에도 내 작품이 영원히 남아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 그런데 이건 근본적으로 내 폐쇄적인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처음 나는 글을 긁적이기 시작했다. 글 쓰는 일이 영화감독처럼 다른 스태프와 함께 일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면 나는 퍼즐 왕이나 등대지기가 됐을 것이다.
♣ 1999년쯤이었다. 그 즈음, 나는 내게 돈도 명예도 가져다 주지 않을 것이며, 그렇다고 해서 사회나 문학을 쇄신하는 사상이 담기지도 않을 게 분명한 장편소설을 쓰고 있었다. 퇴근한 뒤, 열한시부터 새벽두시까지 매일 써 내려갔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썼을 때쯤이었다. 컴퓨터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더니 밤하늘이 보였다. 문득, 고독해졌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오직 그 문장에만 해당하는 일을 나는 하고 있었다. 그 소설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그 소설로 인해 내 삶에는 어떤 변화가 있을지,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저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 그 문장뿐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모든 상처는 치유됐다. 파스칼의 회심과 같은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는 지금 소설을 쓰고 있다'라는 문장에 해당하는 행위가 어떤 것인지 단숨에 깨달으면서 파스칼의 지복과 비슷한 감정을 잠시 느꼈단 말이다.
♣ 모세를 닮은 재벌 삼세가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내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남산 꼭대기에 세워 준다고 해도 나는 그 일들과 맞바꾸지 않을 것이다.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그 일들을 잊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살아가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나는 때로 너무나 행복하므로 문학을 한다. 그 정도면 인간은 충분히 살아가고 사랑하고 글을 쓸 수 있다.
♣ 청나라 사람 장호는 이런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 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 되고, 사람은 벽(癖)이 없어서는 안된다."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 산다. 힘들고 어렵고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진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내가 어디까지 견딜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인간이다.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얼굴에 표시내는 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매번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까지 글을 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고쳐 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김영현>
♣ 나는 대학신문사에서 주최하는 대학문학상을 타서 일약 대학문단의 혜성 같은 존재가 되었다.
♣ 소설을 쓰고 싶었다. 아니, 소설이 아닌 그 무엇이라 하더라도 끄적거려 보고 싶었다. 나는 정신적으로 어딘가가 망가져 있었고, 자칫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도록 치명적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열과 발작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자신을 추스리며 서 있었다. 나는 글쓰기에서 어떤 희망을 찾았다.
♣ 나는 사람들이 다 퇴근하고 난 출판사의 책상에 앉아 하루에 한 편의 단편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 첫번째 소설이 '깊은 강은 멀리 흐른다'였다. 창작과비평사에 갖다 주었더니 당시 계간지는 폐간되고 없었던 터라 신작소설집에 넣어 주었다. 실로 십여 년 만에 다시 '소설가'로 등단한 셈이었다.
♣ 지난 겨울 내내 나는 장편을 쓰기 위해 조립식으로 지은 서울 근교의 허름한 화실에서 보냈다. 혹설로 길이 끊어지고 보일러가 얼어터져 불씨 하나 없는 방에서 한밤중 나는 혼자 한 마리 거대한 벌레처럼 변해 꿈틀거리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징그럽고도 괴기한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문득 이것이 이 생에 지워진 나의 숙명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나는 작가라는 것이다. 작가란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처럼 설사 그 누가 읽어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 무언가를 쓰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목마른 열정으로 차 있던 나의 청년기가 나로 하여금 이 문학의 숲 입구에 서 있게 하였다면, 작가라는 선택된, 어쩔 수 없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지금 이 숲을 지나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나는 행복한가? 그렇다. 지극히 행복하다. 나는 이제 내 인생에 겸손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시간의 강 위에 흘려 보내야 하는 것과 남겨 두어야 하는 것도 알고 있다. 헛된 명성에 눈멀지도 않고 내 능력 밖의 일 때문에 부대끼지도 않는다.
<김용택 - 문득 시가 내게로 왔다>
♣ 그렇게 몇 개월을 심심하게 보내고 있는데, 그 먼 산골까지 책을 월부로 파는 사람이 나타났다. 내가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책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이었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고 나는 낮에는 동무들과 산에 나무 가고, 밤에는 도스토예프스키에 매달려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했다. 그 해는 눈도 많이 왔다.
♣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박목월 전집' '이어령 전집' '니체 전집' 그리고 한국문학 쉰 권짜리 전집도 그때 읽었다. 아무도,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전혀 낯선, 그러나 그 어디에선가 보았던 것 같은 그 샛길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만났다. 나는 날마다 나를 응시하고, 나를 신기해했다. 늘 버리고, 무엇인가 설레는 그 무엇을 새로 얻었다.
♣ 어느 날 나는 방에 누워 멀거니 여기저기 쌓인 책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놀랐다. 그렇구나. 저 책을 사람들이 쓴 것이로구나. 그래, 맞아. 나도 글을 써 보아야기. 그리고 나는 글을 써 보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나는 외로웠다. 내겐 아무도 없었다. 친구도 스승도 문학을 이야기할 그 누구도 내겐 없었다. 오직 나는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면서 나를 키워 갔다. 그렇게 십삼 년이 흘러갔다.
♣ 그렇게 내가 산과 강과 내 몸을 모두 기대고 살기를 십삼 년,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 어두운 산에서였는지 아니면 흐르는 강물 그 어느굽이에서였는지, 내게로 시가 왔던 것이다. 내 몸이 환해지는 시, 암울한 내 청춘의 어둠 속을 뚫고 달려왔던 한 줄기 불빛 같은 시, 세상을 알아낸 것 같은 시, 시가 내게로 왔던 것이다. 그때 내 나이 서른다섯 살이었다.
♣ 세상에 태어나 사람이 바람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나는 바람결에 스치는 풀잎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인생, 그 얼마나 하찮고 보잘것없는가. 도대체 우리들 삶이 그 무엇을 이룬단 말인가. 우리들이 사는 이 세상은 지금 행복한가. 나는 잘 살고 있는가.
♣ 나는 지금도 내 의지와 열정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싶다.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하며 사는 것이다. 로댕의 말이다. 문학을 왜 하는가? 살아야지. 죽어도 괜찮다는 하루를 나는 그냥 살 뿐이다. 문학은 최고의 삶을 사는 일이다.
<김원우>
♣ 모든 상품의 다른 이름이 쓰레기이듯이 소설처럼 그것이 없이도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는 하등의 지장이 없는 생산품일수록 그것의 개인별 효용도를 따지기도 무색해지기 때문에 그렇다. 당연하게도 이 대목에서 저속한 수단과 고상한 목적이 제멋대로 혼선을 빚고, 대중매체들이 그 수상한 도착증세를 부추기는 현장을 논란거리로 삼을 수 있을 텐데, 그 밑바닥에는 작가 일반의 윤리의식이 내면화되어 있지 않다는 생생한 결함을 수월하게 지적할 수 있을 뿐이다.
<김원일 - 고단한 기억을 치유하기 위하며>
♣ 이십오 세로 소설을 써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다. 문학에 뜻을 둔 십대 후반부터 햇수로 따지자면 사십 년 넘게 열심히 한 우물을 판 셈이다. 그 동안 쓴 소설이 권수로 따져 서른 권이 넘으니 적은 분량은 아니다.
♣ 문학가가 되는 길은 재력, 인맥, 학력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로부터의 배움이 필요 없는 분야이다. 대본집에서 빌려 볼 망정 책이 길잡이요 공책과 필기구만 있으면 자신이 살아온 삶의 한 자락에 문학적 장치를 섞어 억하심정을 풀어낼수 있기 때문이다.
♣ 누구와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자폐에 가까운 울증, 홀연히 딴 생각에 사로잡히는 잡념 많은 사춘기에 나는 쉽게 문학의 길로 아련하게 빠져들었다. 그 동기는 토마스 만의 짧은 단편 '환멸'을 읽은 어느 날 충격으로 닿아 왔다고 다른 글에서 고백한 바 있다.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그 어떤 직업에도 적응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로 여겨질 때 여린 바이올린 선율처럼 예술적인 어떤 기미에 현혹되는 자신을 발견했다면, 그런 삶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심약한 사람도 이 세상에서는 소수나마 존재한다는 예시였다. 그러므로 나는 시작부터가 생산적이고 힘찬, 현실성 강한 건강한 작품을 쓸 능력이 달린다는 데서 내 문학을 출발시켰다.
♣ 1986년에 십팔 년 동안 봉직한 출판사 직장을 놓자 전업작가로서 글쓰기에 매달려, 내 소년기의 고단한 편린이 깔린 '마당 깊은 집'을 썼다.
<김주영 - 자유는 나의 숙명, 고통은 나의 벗>
♣ 소설쓰기를 치열하고 끈질기게 계속한다면, 세속적으로 근근히 살아 남을 수는 있겠지만, 이빨을 앙 물어도 돈 되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매우 확실해졌다. 혹은 가문의 법통이나 줏대를 세워 나가는 데 명분을 보태주거나, 사회적으로 또는 가족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도 확실해졌다. 명성을 얻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 역시 한순간 화려했다가 소멸하는 불꽃놀이와 같다.
♣ 뒤에서 밀어붙이는 도도한 물결에 곧잘 딴죽 걸리거나 빈축 사고, 앞 물결에 따귀 맞기 일쑤여서 작업에 대한 성취감도 잠시 잠깐이다. 고고하게 살기는 너무나 어렵고, 세속적인 성취감을 획득하기에도 더욱 어렵다. 그래서 생각은 언제나 구름 위에 있어도 몸뚱이는 개천 바닥에 떨어져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처럼 이상과 현실이 빚는 갈등의 수렁에 양다리가 빠져 있어 몸둘 바를 모른다.
♣ 문학을 하기 위해 겪게 되는 광범위한 고통의 최면도 익숙해지면 피둥피둥하고 온전한 살점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한한 자유가 존재하는 곳에 고통이 없으면 그 자유가 빛나지 않는다는 것도 함께 깨달았다.
♣ 내 소설이 세상 속으로 나가서 소금이나 향유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바람이다. 그러나 어쩌면, 탄탄한 문장과 짜임새있는 구성으로 미끄러지듯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고, 어린 시절 마을에서 살았던 곰배팔이나 절뚝발이가 그랬던 것처럼 평소에는 반편의 취급을 당하지만, 자신에게 부여된 궂은 일을 군소리 한마디 없이 치러 나가려는 의지를 가진 소설가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런 일인가.
<김지하>
♣ 등단 전에 내 주변엔 '폰트라(pontra,poem on trash, 쓰레기 위에 시를!)'라는 사귐이 있었다. 여기서 어느 날 한 여자 선배 왈, '네가 결혼하거나 연애를 하려면 반드시 사회적 지위가 있어야 하니 시인으로 문단에 등록해라'라고 자꾸만 권유했다. 그래서 마지못해 등단했다. 그런데 그 뒤의 나의 시가 과연 '폰트라'의 길을 갔던가?
♣ 되풀이하지만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한마디로 말하자. '살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