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 바늘

월경
눈보라콘 - 부산, 부라보콘
⊙ 당신의 바다 - 곰장어, 남편
등뼈 - 디스크
행복고물상 - 아내의 구타
유령의 집 - 용두산
⊙ 포옹 - 곱사등이, 사랑


단편 '바늘'
1. 32
'바늘을 잘게 잘라...


단편 '당신의 바다'
2. 115
내가 그곳에 갔었다는 것을 당신은 알까? 등을 돌리고 누운 당신의 뒷못브에서 죽은 곰장어의 모습이 보인다. 곰장어는 온도에 민감해서 말랜 채 굳은 근육은 꼭 억울하게 죽은 여자의 부릅뜬 눈을 연상시킨다. 그 단단한 시위.

3. 121
더러운 행주를 쥐고 있는 내 손을 들여다본다. 손목 근처에 초승달 모양의 덴 자국과 고춧가루가 묻어 있다. 곰장어를 뒤집다가 뜨거운 판에 손목을 데곤 한다. 고춧가루가 묻어 있는 이 손에 붉은 펜자국이 지워지지 않던 날이 있었다. 내 손은 활자들 사이를 활보하면서 하루 열 시간씩 교정을 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야 내 눈에 생채기 같은 붉은 자국이 보이곤 했다. 좁은 계단을 올라 책과 종이들이 가득한 사무실로 들어서면 언제나 가슴이 턱 막혔다. 코끝이 맵도록 많은 종이들. 창문이 없어 환기가 잘 안되는 사무실. 나는 책장으로 둘러싸인 구석자리에 앉아 하루 수백장의 교정지를 넘겼다. 신국판 싸이즈의 종잇장에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면 여전히 사각형의 책들과 사각형의 좁은 공간이 가로막고 있었다. 펜을 들고 교정지를 넘기다가 팔뚝에서부터 손목까지 길고 힘차게 선을 긋곤 했을 것이다. 붉은 펜이 책들 사이에 끼여 있다가 손바닥에 뭉뚝한 자국을 남기기도 했겠지.
내가 당신을 만난 곳도 바로 그곳이다. 당신은 대필원고나 교열지를 넘기기 위해 사무실에 오곤 했다.
...
그러나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집을 짓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당신과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사는 문을 닫았다. 퇴직금은 고사하고 몇달치의 밀린 월급조차 받지 못했다. 당신과 나는 동시에 직장을 잃었다. 당신이 말한 대로 집은 바위 틈새에 끼여 곧 부서질 것 같았다.

4. 132
"어머니는 어쨌든 집에 있는 아버지가 고마워서 갈치며 납새미를 끼니마다 올리곤 했지. 들고 나간 생선을 모두 팔 때까지 집으로 들어오지 않던 어머니가 말이야. 아버지가 집앞에서 죽기 전까지....."
"집앞에서?"
"그래. 길앞 길바닥에 납작하게 깔려서."
"사고였어?"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뛰어나갔는데 마침 화물차가 지나간 거야. 아버지가 워낙 급하게 뛰어들었대. 나중에 보니까 아버지 주머니에 돈이 들어 있더라. 우리가 살고 있던 집의 보증금이었어."


단편 '등뼈'
5. 153
하지만 누군가 먹고 난 뼈를 다시 주워들거나 애써 조개의 관자를 뜯어내는 여자의 모습은 궁핍하고 비천한 동물을 연상시켰다. 여자에게 왜 구질구질하게 그런 걸 먹느냐고 못마땅하게 물은 적이 있었다. 여자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뼈에 가장 가깝잖아요.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뼛살을 먹는 데 열중했다. 뼈에 가장 가까운 살. 정말 여자가 그 살을 좋아했을까?


단편 '행복고물상'
6. 161
모든 것이 다 잘 풀리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희망에 가득 찬 순간 어두운 소식을 접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도 위안이 될 수 있다. 불행에 단련된 사람은 제 앞에 닥친 희망을 낮설어하게 된다.


7. 해설 - 이광호

그녀의 소설에는 예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그녀들은 늙고 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못생기고 늙었거나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그녀들은 숙명적인 일탈성의 자질을 함유한다. 그 불구성은 그녀들이 처한 삶의 지독한 소외를 말해준다. 90년대 소설에서 발견되던 도시적 매력을 가진 전문직 여성은 이 소설들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육식에 대한 집착은 그녀들의 본능적인 동물적 욕구를 반영하며, 외부세계에 대한 공격성과 적의를 암시한다.

폭력과 식욕, 그리고 성적 욕구는 천운영의 소설에서 행위의 기본적인 동기들로 서로 매개되어 있다. 그 비이성적이고 난폭한 행위들은 어떤 내적 억압의 분출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서 그녀들이 부여받은 야수성의 이미지는 제도적 현실에서 억눌린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욕구를 표현한다.

천운영 소설에서 그녀들이 견뎌내야 할 불우는 가족 단위의 어두운 운명론에 기대고 있다. 이 젊은 작가는 그 오래된 운명론에 독특한 미학적 자질들을 새겨넣는다. 그 미학적 자질들의 선명함과 강렬함 때문에 우리는 그 운명론의 퇴행적인 성격 따위에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게 된다. 그녀가 부여하는 동물적 관능의 미학은 매우 극단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한국소설에서 경험하지 못한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인 수준을 경험할 수 있다.

'나'의 행복은 '부라보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보라콘' 속에 있다. 닿을 수 없는 부재로서의 진짜에 대한 욕망이 인간을 살게 하고, 인간을 성장시키고, 가짜의 문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천운영을 통해 한국의 여성소설은 독특한 야생의 미학을 자기 목록에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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