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여행자들 ㅣ 오늘의 젊은 작가 3
윤고은 지음 / 민음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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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은 우울증 같은 거라 어디에든 잠재했다. 자극이 임계점을 넘으면 그 우울증이 곪아 터지기도 하지만, 용케 숨어 한평생을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다.’ 12쪽

 

 예기치 못한 사고, 질병은 예외도 없이 모두에게 닥칠 수 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내가 아닌 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위무하며 살아갈 뿐이다. 그러니 타자의 시선에서 누군가의 불행은 안타까운 감정,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 미약하나마 성금이나 자원봉사라는 행위를 통하여 할 일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윤고은의 『밤의 여행자들』도 다르지 않다. 재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진짜 재난이 무엇인지 묻는다.  

 

 주인공 요나는 정글이란 여행사에 근무한다. 정글에서 요나가 기획하는 여행상품은 재난 여행이다. 말 그대로 지진, 태풍, 가뭄, 화산, 쓰나미, 해일 이 발생한 재난 지역을 여행하는 것이다. 10년 동안 근무한 요나는 정글에서 퇴출 대상으로 상사 김으로부터 성추행까지 당한다. 정글에서 최대 위기에 처한 요나에게 김은 휴가 겸 출장을 권한다. 기획자가 아니라 여행자가 되어 재난 상품을 검토해보라는 것이다.

 

 ‘재난이 한 세계를 뚝 끊어서 단층처럼 만든다면, 카메라는 그런 단층을 실감하도록 돕는 도구였다. 카메라가 찰칵, 하는 순간 그 앞에 찍힌 것은 이미 인물이나 풍경이 아니다. 시간의 공백이다. 때로는 지금 살고 있는 시간보다 짧은 공백이 우리 삶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다. 요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모든 여행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출발선을 넘은 게 아닐까, 하고. 여행은 이미 시작된 행보를 확인하는 일일 뿐.’ 35쪽

 

 요나가 선택한 여행지는 ‘사막의 싱크홀’ 란 상품으로 베트남 남부의 무이라는 섬이다. 5박 6일의 일정으로 섬의 사막에 위치한 싱크홀을 둘러보고 홈스테이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곳은 더 이상 재난 지역이 아니었다. 재난을 이용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불편할 뿐이다. 요나는 일정을 마치고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그만 일행과 헤어지고 만다. 신분증과 여권도 없이 무이로 돌아온다. 리조트 매니저는 요나가 정글의 직원임을 확인하고 무이를 위한 새로운 프로젝트를 부탁한다. 더불어 리조트와 무이를 지배하는 폴에 대해 들려준다. 요나가 여권도 역시 폴에게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주었다.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요나는 새로운 재난 시나리오를 만드는 제안을 받아들인다.

 

 ‘재난 여행을 준비할 때는 어느 각도로 칼을 들이대도, 누구나 감동하고 슬퍼할 만한 재난의 단면들이 나타나도록 고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동공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강렬한 이미지다.’ 145쪽

 

 요나는 새로운 재난 상품을 만들고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럭이라는 청년의 도움을 받아 무이 곳곳을 둘러보던 요나는 그곳의 진짜 삶과 마주한다. 어디든 폴의 그늘에 있었다. 폴이 기획한 시나리오는 끔직했다. 무이의 개발을 위해 허위 재난을 만들면서 걸림돌이 되는 가난한 하층민인 수상 가옥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사막에 거대한 구멍을 파는 도구이자 재난으로 발생할  갖가지 사연의 희생자로 말이다. 누군가는 폴의 계획대로 이미 재난을 위해 죽었고, 곧 죽을 것이었다.

 

 ‘사람들은 과거형이 된 재난 앞에서 한없이 반듯해지고 용감해진다. 그러나 현재형 재나 앞에서는 조금 다르다. 이것이 재난임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해도 방관하거나, 인식하면서도 조장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싱크홀은 저편 사막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175쪽

 

 무이에서 재난은 곧 현실이었다. 어디 무이 뿐일까? 소설 속 직장이 정글이듯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작가는 우리의 삶을 정글이라 단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낸 건 아닐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재난은 이미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다. 긴 불황으로 이어진 청년 실업, 불안한 직장 생활, 거대 권력 앞에서 무너지는 소시민의 삶, 우리가 사는 곳이 무이와 다르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재난 여행이라는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을 통해 윤고은이 말하고 싶었던 건 결국 우리 현실이 재난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난을 극복하는 일은 현실을 이겨내는 것이고, 재난으로부터 소중한 이들을 지켜는 일이다. 그것이 매우 어렵고 힘들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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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척 - 제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문학동네 청소년 20
최서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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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스갯소리로 쌍둥이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세대 간의 격차가 심하다는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소년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건 괜찮은 어른이 아니라 같은 또래일 뿐이다.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아는 척>의 작가가 바로 그렇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소설로 옮겨 왔다. 객관적인 시선이 아닌 같은 또래의 그것으로 묘사했기에 생동감이 넘친다.

 

 소설 속 주인공 박, 윤, 강은 고등학교 3학년인 여고생이다. 수능을 앞둔 입시생이다. 윤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학생으로 소위 모범생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담배를 피우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부모님과 심각한 갈등 중이다. 박은 지각 대장으로 아이들은 노는 애로 취급한다. 강은 지속적인 가정 폭력과 왕따의 피해자로 그림을 잘 그린다. 셋은 아주 친한 사이지만 학교 선생님이나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세 명의 아이들은 화자가 되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3 교실에서 벌어지는 일들, 수시를 두고 상담하는 교사와 아이들, 사각지대에서 일탈을 일삼는 아이들,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편견을 갖고 대하는 선생님의 안일한 태도, 부모라는 권위를 내세워 아이를 몰아세우는 부모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윤은 늦은 사춘기를 앓고 있었다. 성적과 대학으로 인생을 결정하려는 부모를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공부를 하겠다는 의사를 왜곡하며 은근히 강요하는 담임도 마찬가지다. 어렸을 때 아빠가 돌아가신 후 박은 거의 혼자 지낸다. 엄마는 항상 바쁘기 때문이다. 박은 엄마의 관심, 아니 간섭이 필요했다. 반대로 강은 무관심을 원했다. 괴롭힘은 괜찮았다. 그 사실이 부모에게 알려져 가해지는 폭력이 더 무서웠다. 그림만이 강을 해방시켰다.

 

 셋이 함께 만날 수 있는 공간은 학교나 집이 아닌 놀이터뿐이다. 다른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시각에 셋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한다. 셋은 자신들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하는 학교와 세상을 향해 분노를 표출한다. 그 사건으로 셋은 학교에서 유명 인사가 된다. 하지만 그게 다다. 작가 최서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렇다. 속상하고 화가 나는 감정, 자신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모르는 마음의 표현일 뿐이다. 그냥 열아홉의 이야기. 모든 열아홉이 읽고 그 진심을 나눠야 할 책이다.

 

 ‘우리는 열아홉이다. 젊다고 하기엔 어리고, 어리다고 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 세상이 너무 어둡고 축축해서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말하기엔 누려 보지 못한 세상이 너무나 넓었고, 세상이 마냥 아름답고 행복한 곳이라고 여기기엔 너무 많은 것을 알아 버린 나이였다. 누가 뭐라든 우리는 열아홉이다. 어리석은 열아홉도, 철없는 열아홉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열아홉도 아닌 그냥 열아홉.’ 1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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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빨강 - 제11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ㅣ 사계절 1318 문고 87
김선희 지음 / 사계절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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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느끼는 맛에는 매운맛만 있는 게 아니다. 쓴맛도 있고 신맛도 있고 떫은 맛, 단맛, 짠맛도 있다.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는 맛들도 있다. 시큼털털한 맛이라든가, 달콤짭짜름한 맛, 매콤씁쓰레한 맛. 삶은 여러 가지 맛의 변형이다.’ 205~206쪽

 

 비교적 수월하게 사춘기를 보냈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나는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딸이었다. 괜히 툴툴대고 차려 놓은 밥도 일부러 먹지 않고 그냥 학교에 갔다. 집보다는 학교가 더 좋았고, 칭찬이 인색한 엄마보다는 선생님이 더 편했다. 그 시절을 지금을 비교하는 건 적절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이성과 외모에 관심이며 갑자기 변화하는 몸을 받아들이는 마음은 아이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감정들을 다스리기도 버거운 상태인데 집안 상황까지 나쁘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삐뚤어 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주인공 열여덟 살 동이는 자신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동이는 사고로 일곱 살 아이로 변해버린 아버지를 생계를 위해 닭집을 운영하는 엄마와 취업 준비로 항상 화가 나 있는 형을 대신해 돌봐야 한다. 사고 전 권위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작은 형이라 부르며 사고를 치는 동생 같은 아버지를 씻기고 먹이는 일은 동이의 몫이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착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보통의 청소년 소설과 다르게 심각한 학교 폭력나 왕따, 입시 위주의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고 스트레스를 야동을 보는 것으로 해결하는 성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의 소년 동이와 무서운 집착에 가깝게 매운 맛을 좋아하는 소녀 미령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동이는 친구 희우를 통해 미령이 운영하게 카페 ‘더 빨강’에 가입한다. 매운 걸 잘 먹지도 못하면서 미령과 친해지고 싶어 정모에 나간다. 아이들은 모두 매운 음식을 신나게 먹는다. 하지만 동이는 그런 분위기가 낯설기만 하다.

 

 “매운 걸 좋아하는 데는 저마다 이유가 있을 거야. 어떤 사람은 그냥 좋아서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이거나 욕구 불만일 때 먹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삶이 재미없고 시시하게 느껴질 때 매운 걸 먹고 정신이 번쩍 들 수도 있고.” 43쪽

 

 동이와 미령은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동이는 아버지를 돌보고 치킨 배달을 하는 육체적인 고통과 집 재건축 보상금을 주식 투자로 날리고 빚을 남기고 사라진 형 때문에 걱정하는 엄마를 지켜봐야만 했다. 미령은 어린 시절 유괴 당했던 상처 때문에 힘들었다. 미령이 만든 매운 맛 카페가 자살 카페라는 소문이 돌며 자살 여행을 계획한다는 걸 듣고 동이는 미령에게 자신의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낸다. 동이는 달라진 아버지를 통해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가족에 대해 생각한다.

 

 어떻게든 미령을 말리고 싶었던 동이는 여행에 합류한다. 여수에 도착한 미령과 친구들은 각자 준비해 온 재료로 매운 음식을 요리하고 먹을 준비를 한다. 긴장한 동이는 먹지 말라고 살아야 한다고 소리친다. 미령은 단순하게 매운 맛 대결을 위한 여행이라는 걸 확인시킨 후 동이에게 유괴 이야기를 한다. 유괴 후 자신을 향한 시선 때문에 외로웠던 시간과 매운 걸 좋아하게 된 이유를 말한다.

 

 “어느 날 멋모르고 매운 고추를 먹었는데 왠지 모르지만 확 당기는 거야. 지루하게 걷고 있는데 누가 발을 거는 느낌? 그때 정신이 번쩍 들더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강렬하게 느낄 수 있었어. 그냥 걷는 건 재미없잖아. 누가 발도 걸어주고 뺨도 때려 주고, 그래야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느끼지. 또 살아야겠다는 전투력도 생기고. 너희는 나하고 다른 이유로 매운 걸 먹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살아 있기 위해서 매운 걸 먹는다는 공통점이 있잖아.” 191~192쪽

 

 미령은 통증처럼 밀려오는 매운 맛을 통해 살아 있다는 걸 느꼈던 거다. 저마다의 이유로 매운 걸 좋아하지만 살아 있기 위해서 매운 걸 먹는 건 같았다. 그래,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평생 일곱 살로 사는 아버지, 갚아야 할 빚으로 고생해야 할 엄마,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형이지만 가족이고 살아 있으니 괜찮다.

 

 사는 동안, 동이가 맛보게 될 맛은 무한할 것이다. 그 맛을 다 맛보는 게 삶일 것이다. 빨강으로 기억될 열여덟을 지나 다양한 색으로 마주할 수많은 동이와 미령의 인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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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은 깊어가고 아침은 느리게 온다. 가장 춥다는 아침을 맞았다. 이제 점점 추워지는 날들만 남은 것일까. 찐 고구마를 먹는 날들이 많아졌다. 이유는 밥이 먹기 싫어서다. 고구마와 커피, 스카프를 두르는 아침, 열어 놓은 창문을 통해 날카로운 바람의 움직임이 들려온다.

 

 어제는 계획적이면서 충동적인 한 권의 책을 주문했고, 리스트는 우선은, 갖고 싶은 책이다. 『1913 세기의 여름』은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100년 전의 여름,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여름이 존재하는 책일까. 여하튼 갖고 싶다. 하성란의 웃는 얼굴을 표지로 쓴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 『카레 온 더 보더』, 영화로 화제가 된 코맥 매카시의 『카운슬러』, 김경집의 『인문학은 밥이다』, 조해진, 신해욱, 김미월의 여행기로 기대만발인『누구나, 이방인』,많은 이들이 기다렸을 황정은의 두 번째 장편소설『야만적인 앨리스씨』,가와이 간지의 『데드맨』, 매력적인 표지와 독특한 제목으로 내용이 더 궁금한 『하품은 맛있다』,지인이 강력 추천한 『모든 것은 빛난다』를 담는다.

 

리스트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소설가 한강의 시집, 김 숨의 단편집.

 

 

 

 

 

 

 

 

 

 

 

 

 

 

 

 

 

 

 

 

 

 

 

 

 그리고, 이런 시들을 옮긴다.

 

 

 옛 가을의 빛 - 허수경 

 

 개들은 불안한 고독의 날개를 가진 나비를 쫓아다녔다

 저수지에 고인 물의 살 속으로 깊이 침입하던 바람은

 수초를 기슭으로 자꾸 보냈고

 하여 저수지 기슭에는 붉은 물풀들이 행려거지처럼 누워 있었다

 

 고추가 마르던 집 앞에서 빛은 고독한 매운내를 풍기며 앉아

있었다

 가지가 마르던 마당에 보라빛으로 고여들던 어둠은

 할머니가 피우는 담배연기 속으로 들어가 해맑은 죽음의 빛으

로 살아났다

 

 병아리가 종종거리는

 맨드라미가 붉은 손을 자꾸 흔드는

 그 마당에 가만히 앉아서 김칫거리를 다듬던 새댁의 눈 안에 고

인 눈물빛

 

 벙어리 소녀는 낡은 거울 앞에서

 낡은 결혼예복을 입어보았다

 결혼예복 속에는 원앙 두 마리가 낡은 금빛 자수에 안겨 있었다

 낡아가는 빛을 보면서 말을 할 줄 모르는 소녀가  수음을 했다

 

 우물에 기대어 먼 빛만 바라보았다

 묵직한 우울함이 우물에 가라앉은 빛이 될 때

 먼 산숲에서 핀 버섯이 가만가만 공기 속으로 돋아났고

 흙은 아렸다

 

 얼마나 무료한 나날들이 빛 속에 있는가

 그날 죽을 것 같은 무료함이 우리를 살게 했지, 아주 어린 짐승

의 눈빛 같은

 나날이었다

 

 

 갈색의 책 - 이제니 

 

 나 혹은 너는 나무숲에서 오래된 책 한 건을 발굴했다

 나무숲은 꼭 갈색일 필요는 없다 아주 희미한 갈색의 암

시 정도만

 먼지와 빛의 깊이를 지닌 고고학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해

두자

 

 누군가 경건한 얼굴로 문장을 읽어내려갔다

 행간과 행간은 지독히도 넓었고 침묵 또한 꼭 그만큼 벌

어졌다

 

 정말 가슴 아프게도 들리지 않습니까

 무엇이 말입니까

 소리내어 말할리 없잖아

 

 꿈에서 깼을 땐 단 하나의 단어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어머니,

 흔들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가 기억하는 얼룩과 네가 기억하는 얼룩

 흰 것 위에는 검은 것, 검은 것과 흰 것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오후 네시의 햇빛이 스러

지듯이

 보도블록 깨진 틈 사이로 모래알들이 쓸여들어가듯이

 

 누구든 좋으니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아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떨어져나간 겉장, 제목도 없는 책

 나는 일평생 나라는 책을 읽어내려고 안간힘 썼습니다

 

 갈색의 갈색의 갈색의 책

 

 무슨 말이든지 하세요 그러면 좀 나아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침묵하는 법을 배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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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이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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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정적 사고보다는 긍정적 사고가 낫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그것조차 버거운 삶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많다. 내 말은 우리의 현실이 의지대로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거다. 죽을 만큼 노력해도 한 발짝 앞으로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구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고, 누구에게 너덜너덜 찢긴 가슴은 보여줘야 할까. 자유 자재로 슬픔을 표현한 최진영의 소설집 『팽이』를 읽으면서 마음이 답답해졌다. 소설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책에 수록된 10편의 소설은 평범한 일상의 편린처럼 보인다. 평범이라는 말을 써도 좋다면 말이다. 우선, 표제작 <팽이>의 화자 재이는 단칸 방에서 오빠와 둘이서 산다. 처음엔 엄마도 함께 살았다. 그러다 어느 날 엄마는 엄마의 집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니까 엄마가 아닌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난 것이다. 재이는 좀 느린 편이다. 열살이 될 때까지 글자를 다 읽지 못 해서 오빠에게 한글을 배우고 기다리고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혼자 사는 법은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오빠도 자신의 세상으로 떠나고 어른이 되어서도 혼자 살아간다. 자신이 도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팽이처럼 말이다. 누군가 옮겨주지 않으면 멈추고 마는 삶인 것이다.

 

 ‘우리가 허락된 크기만큼 자라는 동안 무너지지도 부서지지도 않고, 우리의 숨과 비밀과 유년을 덧바르며 거듭 견고해진 방. 까만 그곳에서, 야광 팽이가 팽팽 돌고 있었다. 가장 빨리 돌 때의 팽이는 거꾸로 도는 것도 같았고, 꼿꼿이 서서 움직이지 않는 것도 같았다. 나는 거꾸로 돌거나 가만히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를 팽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가만히 지켜봤다.’ (285~286쪽, 팽이 중에서)

 

 <팽이> 속 재이처럼 혼자서야 하는 삶이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자립은 쉽지 않다. 그러니 꿈을 꾼다는 건 그 자체로 사치라 할 수 있다. 함께 사는 코끼리 앨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사랑, 믿음, 꿈에 대해 말하는 <앨리> 속 화자도 마찬가지다. 그가 하는 이야기를 진심으로 받아주지 않는다. 그러니 화자가 키우는 코끼리 앨리를 누구에게도 소개할 수 없다. 사랑한다고 믿는 애인은 결혼이란 현실적 문제 앞에 이별로 변하고, 영화를 만들고 싶은 꿈에 대해 형은 정신 차리라 말한다.

 

 ‘불행을 피하겠다는 게 아니다. 진짜로 불행해지는 그때 그 순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되지 않나.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불행 때문에 현재를 망치고 싶진 않다. 형이 정말 어른이라면, 나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가족이라면, 내게 미리 불행을 주입하는 대신 내가 진짜 불행해지는 바로 그날 나를 위로하고 쓰다듬어줘야 한다. 위로와 걱정은 일이 일어난 다음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 (134쪽, 엘리 중에서)

 

 정확한 이름을 알려주지 않은 채 아버지가 준 장소를 찾지 못하는 이야기 <어디쯤>, 엄마가 죽고 남겨진 빌라에서 혼자 살아가는 <월드빌 401호>속 종철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세상과 단절한 상황에서 불안하고 두려운 삶을 살아간다. 그런가 하면 <창>의 주인공은 비정규직 여성으로 직장에서 왕따를 당한다. 동료들은 한결같이 그녀를 험담하고 상사는 무시한다. 무슨 이유인지 알려주지 않는다. 사회는 그녀를 더욱 외롭게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모두가 적이 될 수 있는 사회, 불안과 불신이 팽배한 세상, 사랑한다고 믿는 이들조차 나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모님의 산소에서 갑자기 나타난 3억 돈 가방을 둘러싼 남편과 아내의 갈등을 다룬 <돈가방>이나 출근한 남편이 여고생 강간살인 피의자로 조사를 받는 <남편> 은 믿음에 대해 묻는다. 내 편이라 믿고 모든 걸 다 안다고 믿은 가족을 우리는 진짜 믿고 있을까.

 

 누구도 불행하고자 애쓰지 않는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행복해지려는 욕망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불행이라는 늪을 건너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진영의 소설 속 인물들이 그렇듯 여전히 불행의 늪에 있다. 그래서 해답이 아닌 문제만 제시한 그녀의 소설이 더 아름답고 더 애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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