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자
정찬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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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종종 삶은 여행이라 말한다.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는 일 말이다. 그건 어쩌면 머물지 않고 어디론가 계속 가야하는 삶의 고단함을 달래기 위한 말인지도 모른다. 존재함과 동시에 부여된 삶이라는 짐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삶이 닿은 여행지가 언제나 멋지고 좋은 곳은 아니지만 때로 낯선 곳에서 낯익은 누군가와 마주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 만남을 인연이라 하기도 한다. 데자뷰처럼 가물거리는 기억 속의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존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환생을 다룬 『유랑자』를 읽으면서 내 삶의 궤적을 떠올리며 나의 전생이었을 누군가를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치지는 않았을까 조바심이 난다.

 

 소설은 화자인 나, 케이가 어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서울로 향하며 시작한다. 과거 자신을 버리고 무녀가 된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었지만 바그다드 전쟁터의 한 병원에서 만난 이브라힘가 들려주는 전생의 이야기를 통해 그녀의 생을 이해하게 된다.  케이는 이브람힘을 만난 기억이 없다. 그러나 이브라힘은 케이에게 기록관인 자신을 죽인 십자군 병사였다고 말한다. 거기다 그는 그 전의 생에서 예수를 사랑한 여자였다고 한다. 기록으로 역사로만 배웠던 사실들이 아닌 경험에 의한 전달로 생생하게 예수와 제자의 유랑을, 죽음이 낭자한 잔인한 십자군 전쟁을 묘사하는 이브라힘은 그 시대를 다 겪어온 듯 고요하고 차분하다. 

 

 원하지 않았던 무녀로의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혼령을 위한 넋굿을 보면서 케이는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무녀의 몸을 빌어 고통 속에서 생을 살아온 어머니의 진심을 듣는 시간, 케이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아주 오래 전부터 연결된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연이 아닌 그 이상이라는 걸 느낀 것이다.  소설은 전생과 현실을 드나들며 그들의 삶을 들려준다.  그러니까 이런 방식을 통해 우리는 이브라힘의 전생을 통해 무의식 속의 생과 마주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소설을 읽는 동안 나의 전생과 현재의 생을 마주하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환생을 다룬 소설 『유랑자』는 우리 모두의 생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까. 자신의 생을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는 운명을 살고 있는 우리네 모습 말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이 누군가의 전생이 아니며 누군가의 미래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그러니 우리는 정말 끝없는 생을 살고 있는 존재들은 아닐까. 소설 속 이브라힘의 말이 강하게 다가온다.

 

 ‘전생의 나는 과거의 존재가 아니었다. 지금의 나와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예수 시대의 살았던 전생의 나와, 그로부터 천년이 더 지난 후에 살고 있는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모순이었다. 아니, 불가능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신비로운 시간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었다. 그것은 일상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의 개념을 해체하고 무화해버리는 새로운 시간이었다.’ p. 99

 

 우리는 한 치 앞의 일도 모르면 산다. 먼 훗날 기억하지 못할 오늘을 산다. 주인공 케이처럼 혼혈아로, 두 어머니의 아들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죽음으로 둘러싸인 전쟁터를 마주하며 복잡하게 얽힌 삶을 살기도 한다. 그 안에서 이별을 하고 사랑을 하고 죽음을 경험한다. 어딘가를 향해 끝없는 유랑을 한다. 나로 존재하기 위해 나로 살아가기 위해 끝없는 유랑자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와 당신, 우리는 모두 유랑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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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목소리가 들려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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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창시절, 정확하게 말하면 고등학교 시절의 나는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면 단위에서 살았던 내 시간들과 시에서 사는 아이들의 시간은 같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모르는 팝송을 불렀고, 외국 배우의 포스터를 보물처럼 여기고 있었다. 거기다 소위 노는 아이들은 별천지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의 옷차림은 이상했고 그들의 과감한 행동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부러움이라 고백한다.  학교라는 제도 안에서 나는 수동적인 아이였고 그들은 능동적인 아이처럼 여겨졌다.  길 위의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은 김영하의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읽으면서 나는왜 내내 그 시절을 떠올리는 걸까. 

 

 “폭주는 우리가 화가 나있다는 걸 알리는 거야. 어떻게? 졸라 폭력적으로. 말로 하면 안되냐고? 안 돼. 왜? 우리는 말을 못하니까. 말은 어른들 거니까. 하면 자기들이 이기는 거니까 자꾸 우리보고 대화를 하자고 하는 거야.” p.163

 

 그 시절 내게도 말은 어른들 거였다. 그러니까 무서운 담임 선생님의 것이었고 자취 방 주인 아주머니의 것이었고 목사님의 것이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하고 싶었을까. 아마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어떤 거절이었고 어떤 분노였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아이들은 모두 평범을 벗어나 일탈을 일삼는다. 가출을 하고 스스럼없이 집단 폭행을 가하고 성매매를 주도하고 서로를 유린한다.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아이들은 고아였거나 스스로 고아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제이가 있다. 제이는 태어나자 세상으로부터 버려졌고 자신을 키워준 양 엄마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재개발로 무너진 집에 혼자 남았지만 제이가 갈 곳은 보육원뿐이다. 보육원을 나온 제이는 길 위에서 새로운 세상과 마주했고 그것이 들려주는 고통의 목소리를 듣게 된 것이다.

 

 제이와 어린 시절을 보낸 동규 역시 부모님이 이혼을 한 뒤 혼자이긴 마찬가지다. 한때 함구증으로 말을 잃었던 동규는 자신의 말이 되어주었던 제이를 잊지 않는다. 재혼한 아빠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온 동규는 제이를 찾아 나선다. 다시 만난 제이는 동규가 기억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동규가 모르는 어떤 강력함이 있었고 그로 인해 제이는 거리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그러나 동규는 알고 있었다. 제이가 가진 슬픔을 느낄 수 있었고 그와 자신은 빛과 그림자처럼 언제나 함께 한다는 것을 말이다.

 

 “죽음을 주고 그걸 피해갈 방법은 주지 않았지. 왜 태어났는지는 알려주지 않은 채 그냥 살아가게 만들었고.” p. 134

 

 제이의 말처럼 제이는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다. 제이와 함께 길 위에서 웃고 울었던 아이들은 모두 고아라는 타이틀을 벗어 던지고 돌아갔다. 지금도 길 위에는 수많은 제이나 동규가 존재할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어른들에게 그들의 화를 분출하면서 말이다.

 

 이 소설에서 김영하는 무척 냉소적이다. 잔혹하고 끔찍한 일들을 너무도 친절하게 자세히 묘사하면서도 무심함을 잃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소설을 통해 말하고 싶은 건 비행 청소년을 바라보는 우리 어른의 시선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태어남과 동시에 고통의 날개를 달고 살아야 하는 가혹한 생이라는 운명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걸까. 그렇다면, 이 소설은 누구를 위한 소설이며 누가 읽어야 할 소설일까. 말만 내세우며 아이들에게 대화를 하자고 달려드는 어른들인가, 아니면 혼란과 방황이 교차하는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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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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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사소한 우연의 만남은 운명적인 만남이 되기도 한다. 확대해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생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말이다. 해서 우리는 종종 만약에 라는 말을 사용하다. 만약에 그 순간 다른 사람을 만났더라면, 그 공간에 가지 않았더라면 삶은 분명 달라졌을 꺼라 말한다.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시각, 그 순간에 마주한 사람이라면 그건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그 모든 것은 만약에라는 삶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는 건 아닐까.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라고, 나와 닿은 이들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라고 말이다. 이상하게도 김연수의 소설을 읽고 나면 언제나 작은 위로를 받은 듯 충만해진다. 그러니까 이 말은 김연수의 소설은 누군가도 나처럼 슬프고 누군가도 나처럼 아팠고 그 시간을 지나왔으니 너도 괜찮아질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따뜻함이 있다는 거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고아가 된 열네 살 정훈이 들려주는 이야기 <원더보이>는 특히 더 그랬다. 트럭으로 과일 장사를 하는 아빠와 단 둘이 살던 정훈은 1984년 겨울 교통사고를 당한다. 단 한 번도 상상한 적 없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빠는 죽고 정훈만 살아남은 것이다. 공교롭게 그 사건은 남파 간첩이 연류 되어 있어 죽은 아빠는 마지막 순간에 애국자가 되고 정훈은 세상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다. 고아가 된 정훈은 나라의 보호를 받게 되고 그 뒤로 정훈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이의 마음을 읽게 된다. 정훈의 능력을 알게 된 국가는 이를 이용하려 한다.

 

 1980년대, 사회는 불안했고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는 젊은 청춘이 많았던 시절이다.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정훈은 그들의 마음을 읽어내야 했다. 아니, 국가가 원하는 대로 읽어야 했다는 게 맞다.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다는 건 신비로운 일이었지만 누군가의 두려운 마음을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는 일은 사춘기 소년 정훈에게는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다. 아빠를 잃은 슬픔을 견디기도 힘든 아이에게 국가라는 보호자는 참으로 가혹했다. 그러던 중 정훈은 돌아가신 엄마가 살아 있다는 기쁘고 놀라운 사실을 알았고 아빠의 유품인 망원경과 수첩을 통해 어딘가 존재할 엄마를 찾아 나선다.

 

 더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세상의 모든 게 다르게 보였을 정훈은 자신의 병실을 지키다 제대한 선재를 찾아가고 그를 통해 강토를 만난다. 슬픔은 슬픔을 알아본다고 했을까. 아니, 사실은 강토를 고문을 당하던 누군가의 마음에서 보았던 것이다. 약혼자를 잃은 강토는 정훈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자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 정훈은 죽은 아빠가 단지 보이지 않을 뿐 저 우주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 그러니 언젠가는 분명 아빠와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연수는 정훈이라는 아이의 슬픔을 통해 1980년대의 슬픔을 보여준다. 더불어 개인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에 대해 말한다. 그 누구도 위로하지 않는 정훈의 아픔을 안아주는 어른은 어디에도 없는 현실은, 그 시절을 지나온 이라면 모두 기억할 것이다. 그 시대의 어른은 어떠했나. 강압적이었고 비겁했다. 오직 당사자만이 그 모든 것을 안고 살아야 한다고 무책임하게 내뱉는 세상이, 끔찍하다. 물론 우리는 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김연수의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 가령 그것은 서울대공원에 놀러 간다거나, 밥을 짓는다거나, 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일이거나, 나무의 연두빛 잎들이 누렇게 변해 떨어지는 일이거나, 누군가를 짝사랑하는 일이거나, 누군가와 이별을 해야 할 때도 있고 삶을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셀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통해 우리 생이 간직한 무궁한 비밀들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건 어쩌면 막연한 일처럼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한결같이 그 일상들을 아름답고 경건하게 지켜보고 말한다.    

 

 ‘내가 자라는 만큼 이 세상 어딘가에는 허물어지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 바로 인생의 본뜻이었다. 아이가 자라나 어른이 되는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사이 아무리 단단한 것이라도,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모두 부서지거나 녹아내리거나 혹은 산산이 흩어진다.’ <단편, 뉴욕 백화점 중에서>

 

 ‘좋고 좋기만 한 시절들도 결국에는 다 지나가게 돼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나날들이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단편,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그러니까 정훈은 열네 살이었던 1984년을 지나가게 될 것이고 어른이 될 것이다. 아빠가 죽던 그 순간 보았던 빛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고, 희선 역시 약혼자의 죽음으로 인해 희선이 아닌 강토의 삶을 살았던 시절을 간직할 것이다. 나는 소설 속 정훈처럼 열네 살의 소년도 아니고 누군가의 마음을 읽기는 커녕 내 마음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정훈과 강토가 서로에게 바람이었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우주에서 부는 바람을 만날 것이라는 것을,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바람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앞으로 마주할 수많은 봉우리를 넘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바람 말이다.

 

 ‘모든 건 너의 선택이라는 걸 잊지 말아라. 원하는 쪽으로 부는 바람을 잡아타면 되는 거야. 절대로 네 혼자 힘으로 저 봉오리를 넘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혼자서는 어디도 갈 수 없다는 걸 기억해. 너를 움직이게 하는 건 바람이란다. 너는 어떤 바람을 잡아탈 것인지 선택할 수 있을 뿐이야.’ <원더보이 p. 300>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좋은 시절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너무도 잘 안다. 슬픔, 아픔, 고통, 절망이라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게 삶이라는 걸 말이다. 그 위험한 돌, 하나 하나 건너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훈의 삶이 그러했듯 우리는 분명 어떤 바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찰나의 순간에 우주의 빛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 순간 저절로 어떤 비밀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순간은 당신과 마주한 지금 일 수도 있고, 아직 닿지 않은 누군가를 만날 때일 수도 있다. 그렇게 눈부신 날들이 바로 생이다. 그러니 나의 우주와 당신의 우주가 품은 비밀이 만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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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2012-04-03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을 책이라서 앞의 두 문단만 읽었어요. 좋아요. 뭔가 우연과 운명에 대헤 새로 생각하게 되네요. 글구 "세계의 끝 여자친구" 인용구도 좋아요... 모든 날들이 가버리지만 아주 가버리지는 않는다,라니요.. 김연수답네요. 위로도 되구요...^^*

자목련 2012-04-05 09:40   좋아요 0 | URL
김연수답다, 정말 이 책과 잘 어울리는 말이네요. 즐겁게 읽으세요!!
 
열세 번째 아이 - 제12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수상작 ㅣ 보름달문고 48
이은용 지음, 이고은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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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상하는 대로 이뤄지는 세상이 올 꺼라 알고 있었지만 빠르게 발전하는 이 시대를 나는 감당하지 못한다. 얼굴을 보며 전화를 하거나 집 밖에서 집 안의 가전제품을 작동시키는 비교적 사소한 일상의 변화에도 말이다. 미래를 예측하는 프로그램을 종종 보곤 한다. 인간 수명은 무한대로 늘어나고 모든 게 집안에서 이뤄지는 세상은 끔찍함, 그 자체였다.  인간 본연에 대한 존엄은 사라지고 마치 하나의 기계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현실로 마주하게 될 날도 멀지 않다는 걸 안다. 과연 그런 세상에서 행복한 이는 얼마나 될까. 부모가 계획하고원하는 대로 유전자를 선택하여 태어난 아이들에 관한 동화 『열세 번째 아이』를 읽으면서 같은 질문을 받는다.

 

 부모는 자신이 잘 하지 못한 것들을 아이에게 바라는 기대 심리를 갖고 있다. 해서 아이의 의사는 상관없이 뭐든지 가르치고 싶어하고 뭐든지 다 해주고 싶어한다. 아이가 자신에게 속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닫지만 그 순간은 안타깝게도 너무 늦게 온다. 요즘 친구들과의 대화는 폭풍의 사춘기를 맞고 있는 아이들에 관한 걱정뿐이다. 나 역시 그 시절을 겪어왔음에도 롤러코스터처럼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그 감정을 마주하기란 정말 힘겹다. 누구에게나 오는 과정이기에 그저 별 탈 없이 지나가 주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 시간을 내 의지로 조절할 수 있다면 나 역시 건너뛰게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울고 떼쓰고 그런 건 딱 질색이에요. 맞춤형 아이라며 달라야 하지 않나요? 사춘기도 다른 아이들처럼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열세 번째 아이처럼 해 주세요. 감성지수와 이성지수를 동시에 높이는 게 아니라 이성지수를 더,아주 더 높게 만들어 주세요.” p.135~136

 

 원하는 아이에 대한 선택 앞에 주저하지 않을 부모가 얼마나 될까. 어쩌면 이 보다 더 구체적인 이유를 들지도 모른다. 선택한 유전자로 태어난 아이, 그러니까 일명 맞춤 아이는 부모나 사회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운명을 타고 태어난 것이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첫 번째 맞춤 아이가 태어나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아이들은 점점 더 나은 아이가 되고 가장 이상적인 모델이 바로 열세 번째 아이인 시우다. 

 

 누구나 맞춤 아이로 태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시우를 부러워한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아이지만 정작 시우는 계획된 삶을 사는 게 기쁘지 않다. 유전자를 제공해 준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만 엄마에게 물을 수 없다. 맞춤 아이가 존재하는 세상엔 친구나 동생도 로봇이 대신하다. 아이들의 모습은 인간을 닮은 로봇이나 다름 없다. 로봇은 친구가 되기도 하고 아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누가 더 많은 기능을 가진 로봇을 데리고 다니냐에 따라 주변의 시선과 대우가 달라진다. 그러니 먼 미래에도 자본의 힘은 강력하고 새로운 따돌림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 스스로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을 갖고 있고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느끼는 시우의 로봇 레오는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인 것이다. 정작 시우는 그런 레오가 맘에 들지 않는다. 시우가 모르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아는 체 하는 것도 싫고, 로봇 주제에 감정을 느끼며 아이들과 로봇 사이의 다툼에 나서는 것도 싫다.

 

 분명, 가까운 미래에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사회가 올 것이다. 마치 미래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듯, 동화는 무척 현실적이다. 그리하여 더 슬프고 안타깝다. 과연, 인간의 감정까지 대신할 수 있는 로봇은 존재할 수 있을까. 감정을 가진 로봇을 만든 이도 인간이고, 그 로봇을 노예처럼 부리고 그들의 감정을 조종하는 세상에 인간다운 삶을 기대할 수 있을까. 동화 속 감정을 느끼는 로봇은 부모의 계획하에 태어난 맞춤 아아와 다르지 않다. 해서 레오는 시우에게 더 간절하게 말한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 인생이잖아. 이제부터 선택은 네가 해. 내 몫까지, 우리가 하고 싶었던 것까지. 넌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어. 넌 인간이고, 인간이 가진 모든 것이 너한테 있으니까.” p.260~261

 

 로봇인 레오를 통해 시우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머리가 아닌 가슴이 느끼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걸 말이다. 열세 번째 아이가 아닌 아이 시우로 슬픔, 기쁨, 분노, 즐거움을 느끼고 표현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동화가 아닌 현실 속에서 열세 번째 아이처럼 살고 있는 아이들이 읽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자신의 진짜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 소리를 어른들에게 들려줄 수 있다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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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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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닌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은 쉽지 않다. 그 상대가 가족이라 해도 그렇다.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해도 여전히 어려운 일이 아닐까 한다. 때문에 누군가를 안다고 말하는 일에는 특별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문학 작품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역시 심각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한 사람의 생을 이해하려면 얼마나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도스또예프스끼’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한 책이 있다. 아니, 도스또예프스끼를 사랑한 저자의 연애 편지 같은 것이라 해도 좋겠다.

 

 책은 도스또예프스끼의 흔적을 따라 그의 삶과 수많은 작품들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누구나 한 번쯤 책 장을 펼쳐봤을, 그러나 끝까지 읽지 못했을 대표작 『죄와 벌』, 『백치』, 『노름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외에도 도스또예프스끼가 만든 잡지와 그의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의 만날 수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년 시절과 길고 힘겨웠던 감옥에서의 시간, 그가 사랑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그 모든 것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머물렀던 집이며 공간에 대한 설명도 빼놓지 않는다. 하여 독자로 하여금 좀 더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가까이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작가로서가 아닌 인간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해 알 수 있어,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소설을 함께 읽는다면 훨씬 더 좋을 것이다. 물론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영향을 미친 ‘고골’과 ‘뿌쉬낀’의 작품을 펼쳐도 좋겠다. 그가 살아온 19세기 러시아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사회를 향한 작가들의 외침, 세상을 바꾸고 싶고 구원하고 싶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삶이란 어디를 가나 있는 거니까. 삶은 우리들 자신 속에 있는 것이지 우리들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야.’ p. 101

 

 어쩌면 당장 죽음을 맞이하게 될 지 모르는 순간에 그가 형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가슴에 깊게 박힌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삶을 우리는 언제나 미련하게 바깥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힘겨운 이 시대를 사는 모두에게 거대한 울림을 주는 말이 아닐까.

 

 간질로 인해 몸과 영혼이 고통스러웠던힘 시간, 그가 좀 더 건강했다면 어땠을까. 도박에 빠져 진 빚을 갚기 위해 수정은 커녕 마감에 시달려 써내려 간 소설이 아니라, 오직 소설에만 매달려 있었다면 과연 어떤 소설을 썼을까. 러시아를 떠나 타국에서의 가난한 생활과 한 몸처럼 의지했던 형 미하일과 사랑하는 아이의 죽음까지, 끊임없이 계속되는 시련이 있었기에 그토록 위대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도스또예프스끼의 파란만장한 삶이야말로 소설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작가로서 시대를 외면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굳은 의지를 이런 글에서 마주한다.

 

 ‘예술은 항상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이며,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 본 적이 없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p. 148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했고, 더 많이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해서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라도 도스또예프스끼에게 어떤 연민을 느끼고 그의 고독을 이해하고 싶을 것이다.

 

 문득 도스또예프스끼가 말하고 싶었던 구원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과연 진정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읽지 못한 그의 소설 한 구절이 내내 나를 붙잡는다.

 

 “이것이 당신들에게 부과된 지상의 시련이오. 그러니 위안을 구하려 하지 마시오. 그저 눈물을 흘릴 때마다 당신 아들이 하느님의 천사가 되어 당신을 내려다보고 있고, 당신의 모습과 눈물을 보고 기쁘게 생각하며 그것을 하느님께 알리고 있다고 항상 생각 하시오. 당신은 어머니로서 앞으로도 이 큰 비애를 겪어야 하겠지만 나중에 그것이 고요한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이고, 당신의 괴로운 눈물은 사람을 죄악에서 구하는 연민과 정화의 눈물이 될 것이오. 자, 그럼 당신 아들의 안식을 위해 기도를 드리겠소. 아이의 이름이 뭐라고 했지요?” p. 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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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2012-03-31 0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마지막 구절은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조시마 장로가 한 말 같군요. 맞을까요?ㅎㅎ /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삶을 우리는 언제나 미련하게 바깥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 - 이 말 와닿습니다. 저에게도 필요한 말-.^^

자목련 2012-03-31 08: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는 그 소설을 읽지 못했어요..
내 안에 있는 삶,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