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우 엔젤
가와이 간지 지음, 신유희 옮김 / 작가정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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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슬픔을 느끼지 않고 오직 행복한 황홀감만 경험할 수 있는 순간을 선택하라면 어떨까? 주저없이 선택할지도 모른다. 어떤 댓가를 치르든 상관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세상의 걱정 근심을 다 잊고 취할 수 있는 무엇. 그것이 중독으로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아니, 이미 중독이라는 걸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다.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언론을 통해 접한 마약, 약물 중독으로 인해 삶이 망가지며 회복할 수 없은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을. 그러니 근절을 위한 노력을 한다. 가와이 간지의 『스노우 엔젤』 도 마약을 소재로 다룬다. 


이야기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살인사건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부부를 찾아온 한 남자, 그는 레시피를 요구한다. 무엇을 만들기 위한 레시피인가. 그들이 말하는 ‘천사’는 과연 무엇일까. 궁금증은 또 다른 살인사건으로 이어진다. 한 남자가 도쿄에서 사람들을 흉기로 살해한 후 백화점 옥상에서 투신한다. 그는 허공을 향해 ‘천사님’이라 외치고 투신했다고 한다. 얼핏 천사라 불리는 사람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약을 다룬 영화 <독전>에서 이선생을 찾는 듯 말이다. 


그럼 이제 마약범을 잡을 경찰이 등장해야 할 때다. 마약 단속반 미즈키 쇼코는 협력자를 찾는다. 9년 전 경찰이었던 진자이 아키라를 선택한다. 진자이 아키라는 동료 히와라 쇼코와 함께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사망한 변호사 부부의 사건을 수사하고 있었다. 단순 사고가 아니라 살인사건이라 판단한 그는 수사 중 히와라 쇼코가 사망하자 다섯 명의 남자를 전부 죽였다.


서류상으로는 경찰을 퇴직한 후 실종 후 사망처리된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아키라는 9년 전 사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신분을 위장하고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미즈키 쇼코는 현재 일본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과 마약의 연관정을 설명한다. ‘스노우 엔젤’이라는 마약을 유통하는 마약 판매상을 소탕하겠다는 작전에 아키라가 마약 판매상으로 위장 잠입하여 증거를 확보하라고 말한다. 


미즈키 쇼코의 제안을 수락한 아키라는 판매상과 접촉하며 친분을 쌓아 마약을 구매하데 성공한다. 그리고 판매상과함께 현장에서 판매를 하기 시작한다. 판매상과 함께 일을 하면서 그는 마약 구매자가 평범한 주부라는 사실에 놀란다. 그만큼 마약이 우리 일상 가까운 곳에 스며들고 있었다. 소설 속 ‘스노우 엔젤’는 유통되는 약물의 중독성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한번 의존하면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약물이었다. 아키라는 자신이 직접 ‘스노우 엔젤’흡입한다. 그 과정은 정말 놀랍고도 무섭다. 처음에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면서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약기운이 떨어지면서 ‘스노우 엔젤’을 원하는 강도가 백화점 옥상에서 투신한 사람처럼 천사가 부르는 것처럼 환각에 빠진다.


미스키 쇼코는 더 대담한 작전을 제시하고 아키라는 마약상의 실체인 ‘하큐류 노보류’와 만남을 성사한다. 이제 모든 게 완벽하게 끝나고 작전은 성공할 거라 예상하는순간 가와이 간지는 반전을 선사한다. 전혀 예측하지 않았던  결말이다. 


“스노우 엔젤은 특정 식품이나 음료, 기호품에 은밀히 첨가될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섭취한 사람은 모두가 그 상품에 대한 의존 상태에 빠지게 되겠지요. 머잖아 전 세계로부터 믿기지 않을 정도의 부가 스노우 엔젤을 제조하는 자에게 흘러 들어가기 시작할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 누구도 그 인물을 거역할 수 없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 (226쪽)


마약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따라오던 환각이라는 상태와 중독이 얼마나 무서운지 설명하는 미스키 요코의 말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모르는 세게 어딘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상상하지 못했던 힘과 권력이 마약을 통해 세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울 뿐이다. 현실에서도 여전히 마약과의 전쟁은 선포되었고 그 끝을 알 수 없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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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기를 말하기 -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위하여
김하나 지음 / 콜라주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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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말을 잘 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상대를 집중시키고 전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사람, 그리고 계속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언뜻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말을 잘 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말하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매일 말을 하며 사는데 그랬다.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말을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김하나의 『말하기를 말하기』는 그런 점에서 남다르다. 수많은 말과 말 사이를 오가는 어떤 공기, 말들에 둘러싸인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직업이 말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말을 잘 할까 싶다가도 정작 그가 말하는 걸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다는 걸 알았다. 예스24의 팟캐스터 책읽아웃을 진행하고 있다는 건 알지만 팟캐스터를 청취하지 않기에 그랬다. 그런 점이 이 책을 읽는데 장점으로 작용했다. 나는 아무런 기대와 편견 없이 그의 글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말하기에 대한 책이지만 화법이나 화술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 건 아니다. 말하기는 우리 일상에서 누구나 행하는 것이므로. 저자는 수줍고 부끄러움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내성적인 아이여서 새 학년이 될 때마다 친구를 사귈 걱정을 할 정도였다니. 모두가 놀랄 것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누구나 집과 밖에서 똑같은 사람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해야 한다. 사회생활이란 그런 것이니까. 저자는 학교에서 반장이 되면서 자신이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걸 알았으며 담임 선생님께서 너는 말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하셨단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기분은 어땠을까.


저자는 자신의 일상을 솔직하게 들려주는데 마치 친한 사람과 수다를 떠는 것처럼 다가온다. 아마도 수없이 많은 글을 쓰고 말을 한 경험에서 나온 게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기억, 학창 시절의 추억, 현재 동거인과 살아가는 이야기. 그 안에 담긴 말과 글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면 말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회사를 그만두고 성우 공부를 하면서 느낀 점에 대해 말하면서 ‘잠깐 멈춤’에 대해 인상적이었다고 하는데 나 역시 그랬다. 어디서 말을 끊고 다시 이어가야 하는지 배우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장황하지 않고 간단하면서도 말에 힘을 싣는 것. 나도 연습해보고 싶다. 강연과 방송에 대한 에피소드도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저자가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라디오 방송에도 참여하는 줄은 몰랐다. 또한 주변에서 말하기 선생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한 점도 인상적이다. 그만큼 말에 대한 관심이 있기에 주변의 모든 상황에서 말을 하는 이들을 관찰한 결과일 것이다. 막연하게 말을 잘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연습도 필요하다.


말하기에는 발성, 속도, 억양, 크기, 높낮이, 호흡, 포즈, 어휘, 어법, 습관, 태도, 제스처 등등 수많은 요소가 복합적으로 쓰인다. 거울을 보면서 더 나은 표정을 지어보거나 매일 스킨로션을 바르고 뾰루지가 나면 연고를 바르듯이, 말하기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이고 아름다워질지 고민해보거나 안 좋은 습관을 고치려고 신경을 쓰면 좋지 않을까? (41~42쪽)


연습을 하면 달라진다. 내 경우 중요한 전화 통화를 해야 할 때 미리 연습한다. 목소리를 차분하게 하고 가상의 상대에게 질문을 하고 내 의견을 말하는 연습 말이다. 이상하고 우습게 보일지라도 연습 후 진짜 통화를 하면 훨씬 가볍고 후회 없는 대화를 할 수 있다.


대화를 잘 하라면 우선 잘 들어야 한다. 다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막상 내 이야기에 집중해서 놓치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무조건 자신의 이야기만 쏟아놓고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면 얼마나 기분이 나쁠까. 저자는 그걸 ‘그 순간’에 있기가 표현한다. 깊게 공감하는 부분이다. 저자의 경우 인터뷰의 상황을 설명하지만 일상에서는 아이들과 대화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대화가 줄어드는 건 스마트폰 때문은 아니니까. 아이가 말하는 그 순간에 있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한다.


대화에서는 듣기가 80이고 말하기가 20이다. 잘 들어야만 잘 말할 수 있다. 잘 들어야만 미묘하게 상승하는 대화의 호흡과 리듬을 감지할 수 있고, 그것을 더 끌어올리거나 식힐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들어야만 ‘그 순간’에 있을 수 있다. (115쪽)


말이 흐르고 말이 오가는 삶, 말하기는 중요하다. 하지만 침묵이 필요할 때도 있다. 침묵으로 대화하는 시간,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지녔는지 그런 부분을 언급해 줘서 고마웠다. 살면서 우리는 말을 할 수 없는 순간과 마주한다. 그 순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어떤 말로도 채울 수 없는 순간 말이다.


말을 잇지 못하는 순간은 말로 담아낼 수 없기에 찾아온다. 의미와 경계, 한 줌 언어의 납작한 정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침묵이 촘촘히 들어찬다. 저 낮은 곳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른 침묵은 마침내 흐르기 시작한다. 가끔 마주치는 눈빛, 작은 한숨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지 않고 흐르는 침묵은 대화의 완벽하고 더 차원 높은 연장이다. 침묵은 상상하게 하고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168쪽)


좋은 사람과는 오래 시간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 상대가 말을 잘 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믿음과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술 취한 저자가 같은 이야기를 계속해도 그러면 어떠냐고 말해주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나를 잘 알고 받아주는 이가 있다면 그들 사이에 흐르는 말은 더욱 빛날 것이다. 말하기를 말하기란 책은 결국 우리네 일상에서 필요한 말에 대한 책이 아닐까 싶다. 잘한다는 칭찬의 말, 굳이 해야 아냐며 말하지 않았던 말을 꺼내는 말, 자신의 가치를 말하는 말,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말. 나도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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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19 소설 보다
우다영.이민진.정영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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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가는 지금도 소설을 쓸 것이다. 직접 집필을 하는 건 아니더라도 소설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것 같다. 독자가 책을 읽지 않으면서도 책을 생각하고 읽어야 하는데 걱정하는 것처럼 말이다. 폭우로 산사태가 났고 누군가의 삶이 사라진 이 순간도 소설로는 다른 이야기가 될 수 있으니까. 알지 못하는 소설은 얼마나 많을까. 내가 읽는 소설은 겨우 몇 편, 기억하는 작가는 소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독자의 본분을 생각하면 분발해야 하나, 혼자 생각하다 웃고 만다.

문학과지성사가 계절마다 선정한 소설을 읽는 일은 반갑고도 즐겁다. 『소설 보다 : 여름 2019』엔 우다영, 이민진, 정영수의 소설이 있다. 세 편 다 인상적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라 인상적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우다영의 「앨리스 앨리스 하고 부르면」은 여유롭고 멋진 휴가지를 상상하게 만든다. 노년의 여성의 시선을 따라 그녀의 휴가를 따라간다. 그곳에서 과거 연인이 될 뻔한 요리사를 만나기도 한다. 과거로의 회상일까 싶으면 이야기는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꾼다. 어쩌면 우다영의 소설은 이미 제목에 모든 게 담겨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렸다면 삶이라는 게 소설처럼 한순간의 꿈이라는 걸 인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를 자유분방하게 이끌면서 어떤 의심이 아닌 궁금증을 불러오는 힘, 그게 소설이구나 확인한다. 자유롭게 떠날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소설은 때로 여행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다영의 소설 어린 시절 꿈꿨던 상상의 세계, 혹은 현실이 아닌 판타지로 이끄는 문이 될 수도 있다.

이민진의 「RE:」는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준 소설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소설이면서도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가 알고 지냈다고 믿은 어떤 이들에 대해 과연 알고 지냈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소설 속 글쓰기를 통해 알게 된 ‘유완’, ‘해니’, ‘영우’, 세 사람은 과연 어떤 사이였을까 생각한다. 친구, 그냥 아는 사이, 한때 친했지만 지금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사이일까. 소설은 영우가 해니의 죽음을 알리는 메일로 시작한다. 해니의 메일 계정을 통해 유완에게 보낸다. 만약 그런 메일을 받는다면 나는 어떤 기분일까. 함께 글을 배우고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지만 긴밀한 사이는 될 수 없었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지 못하고 멀어진 사이, 그러나 그때 그 시절을 알고 해니를 아는 이는 유완뿐 이기에 영우는 해니의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소식이 끊긴 이들, 메일 계정에만 존재하는 이들에게 메일을 보내고 싶은 묘한 충동. 이민진의 단편을 읽은 이들 가운데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이가 분명 있을 것 같다. 연락처는 삭제했지만 온라인의 메일은 내 주소록에 저장된 이들과 나는 무슨 사이라 말할 수 있을까.


정영수의 「내일의 연인들」은 그의 다른 단편 「우리들」와 비슷한 느낌이다. 사랑하는 연인의 불안한 미래가 그렇다고 할까. 지금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다고 믿으면서도 어떤 불안을 외면할 수 없는 삶의 쓸쓸함 말이다. 화자인 ‘나’는 어린 시절 한 형제처럼 지낸 엄마 친구 딸 ‘선애’ 누나가 이혼을 하면서 비워둔 집에서 잠시 살게 된다. 그 공간에서 연인과 함께 보내는 순간은 달콤했다. 둘만의 공간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다 과거 ‘선애’ 누나도 그랬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자신의 미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이야기. 그래서 누군가가 누군가를 떠나게 된 이야기. 흔한 이야기였다.’ 란 구절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특별하다고 여겼던 사랑이 어느 순간 보통의 흔한 사랑으로 변할 수 있는 일, 그런 게 삶이겠지만 쓸쓸함은 어쩔 수가 없다.

지루하고 긴 장마의 나날이 끝나니 폭염에 태풍까지 몰려온다. 지루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들려오는 소식은 너무도 처참하다. 한순간에 사라진 삶의 현장. 복구하고 회복할 수 있을까. 절망의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안착할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할까. 잠시 외면하고 싶었던 현실이 다가온다. 소설에서 빠져나와 현실로 복귀하는 순간 진짜 삶이 펼쳐진다. 이 모든 게 소설이면 좋겠다는 부질없는 바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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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날들을 돌아보니 엉망과 흐트러짐이다. 반듯한 생활을 지향하는 건 아니지만 8월은 진짜 엉망진창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상이기도 하다. 평온에 가까웠던 지역에 확진자가 나오면서 나는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잠깐의 날들이 연장되어 멈춤이 아닌 머무름이 되었다.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서 큰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무기력의 강도가 걷잡을 수없이 커진다. 거기다 열대야로 잠들지 못하는 밤이 길어지니 올빼미처럼 밤새 영화와 드라마를 보는 날이 많아졌다. 멍하니 창밖의 먼 산을 바라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간도 길어졌다. 낮의 일상은 균형을 잃었고 흔들린다. 잘 마른 수건처럼 명랑한 일상은 어디에 있는가.





앞 동에 이사를 오는 모양이다. 몇 시간째 요란하게 짐을 옮긴다. 길고 긴 사다리차 위로 짐을 실은 박스가 올라간다. 누군가의 삶이 담긴 보라색 상자가 유독 강하게 박힌다. 이사를 오는 집은 며칠 전부터 밤새 불이 켜졌고 텅 빈 집 안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부족하고 불편한 것들을 제거하기 위한 시간이었겠지. 층수가 비슷하니 더 잘 보였다. 어떤 사람들일까.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식구는 몇 명일까. 아이들이 있을까.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있을까. 나와는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코로나로 인해 온라인 장 보기의 횟수가 늘어난다. 후회를 하면서도 창을 연다. 단점은 충동구매를 한다는 점이다. 계획된 소비를 하려고 해도 품절되었던 상품이 재입고되었다는 알림을 받으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다시는 그 물건을 구매할 수 없을 것 같은 불안. 지금 당장 주문해야 할 것 같다.


8월엔 겨우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나마도 리뷰를 쓰지 못한 책도 있다. 기록의 즐거움을 놓아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마음을 다잡다가 이럴 수도 있지 하는 마음으로 기운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그래도 9월엔 이런 마음이 조금씩 사라져야 한다. 정리와 정제의 9월을 위한 책으로 루시아 벌린의 자전 에세이 『웰컴 홈』과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여름 비』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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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봄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12
최은미 지음 / 현대문학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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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꺼내는 일은 어렵다. 상처를 직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일은 고통을 동반한다. 단순하게 지난 일이니까 이제는 괜찮지 않냐고 묻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슬픔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처럼 상처도 그렇다. 최은미의 『어제는 봄』은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만든다. 소설 속 수진이 쓰고 싶지만 쓸 수 없는 양주 이야기, 그 실체를 전부 보여주지 않은 소설에 대해 답답해할 수 없는 이유가 그렇다. 나는 소설 속 수진이 될 수 없고, 설령 수진과 닮은 상처를 지녔다 해도 나의 상처와 수진의 그것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것들. 상처의 안과 밖에 존재하는 두 가지의 삶을 살아간다. 소설은 수진의 현재와 과거를 교차로 들여준다.


10년 전 신춘문예로 소설가가 된 정수진은 결혼을 했고 딸아이를 키우며 소설을 쓴다. 그녀를 소설가로 인정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원고 청탁도 없고 강연 의뢰도 없다. 남편도 조금씩 그런 수진이 지겹다. 딸 소은이 학교에 가고 나면 그는 의식처럼 카페에 가서 소설을 쓴다. 자신의 의지대로 소설가로의 삶을 유지하려는 안감힘이라고 할까. 써야 할 이야기가 있기에 그렇다. 바로 양주 이야기다.


나는 양주 이야기를 10년째 쓰고 있었다. 한 이야기를 10년 동안 붙들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지겹고 힘든 일이었다. 스스로의 능력이 의심스러워지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선우 경사의 답변 속에서 어떤 단어들을 볼 때, 나는 그 단어 하나만 갖고도 양주 이야기를 바로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소설도 얼마든지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7~18쪽)


그렇다면 독자는 이제 궁금하다. 양주 이야기라니, 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수진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것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게 전부다. 아버지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부모님 사이의 일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털어놓지 않는다. 그 죽음에 관련된 범죄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경찰관 이선우를 만날 뿐이다. 이선우만이 수진을 작가라 부르고 존중한다. 둘의 만남은 점차 개인적인 만남이 되고 서로의 삶에 개입한다. 상대의 시간을 상상하고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려는 욕망이 자란 것이다.


그래도 아직은. 나는 거울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내가 혼자서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래도’와 ‘아직도’이었다. 그래도 아직은 가리면 가려지는 것들이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살아 있는 선들이 있지 않은가. 그래도 아직은 푸른 핏줄이 보이지 않는가. 그래도 아직은 붉고, 그래도 아직은 물기가 남아 있지 않은가. (42~43쪽)


좋은 엄마와 아내의 역할로도 괜찮아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지난 시간은 돌아보지 않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아이의 안전을 위해 선생님을 돕고 학교 행사에 참여하고 보통의 엄마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진은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없다. 상처 밖의 자신은 그런 모습이지만 상처 안에서 살아가는 수진은 결핍된 무언가로 힘들다. 자신의 내면을 채운 불신과 불안, 깊은 상처를 달랠 수 없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소설로 써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롯이 글을 쓰는 것으로만 수진은 자신을 확인하고 삶을 지탱할 수 있다. 수진이 소설을 완성하고 상처 밖으로 나올 수 있을지, 건조하고 무감한 삶이 아닌 다른 삶을 선택할지 여전히 불투명하다. 다만 독자인 나는 작가의 이런 목소리를 응원할 뿐이다.


나를 극복하고 너에게 가는 길은 이렇게 멀어서,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1층으로, 엘리베이터 밖으로, 유리문 너머로, 니가 나를 기다리던 곳으로, 힘을 다해 달려 나간다.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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