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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날 ㅣ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4
카롤린 라마르슈 지음, 용경식 옮김 / 열림원 / 2022년 7월
평점 :
특정한 장면이 오래 기억에 남을 때가 있다. 드라마나 영화 속 장면, 책 속에서 만난 글귀가 그러하다. 황홀하게 아름다워서 기억에 담아 한 번씩 꺼내 보고 싶은 마음과 그 장면과 글귀에 포섭되어 헤어 나오지 못해서다. 드라마나 영화의 인물이 나 같아서, 내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글이라서 말이다. 그것은 기쁨이나 환희보다는 슬픔이나 아픔에 가까울 경우가 많다. 안쓰럽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그 마음이 애처롭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상상하지 못한 『개의 날』 이란 제목의 카롤린 라마르슈 소설에서 그런 연민과 삶의 상실을 마주했다. 그것은 지독하게 쓸쓸하고 아픈 것이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개 한 마리를 목격한 순간,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어쩌자고 개가 고속도로까지 왔을까, 길을 잃었을까, 주인이 애타게 찾고 있을까. 그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거기서 멈춰 개는 잊고 달리던 대로 달리고 목적지를 향해 가지 않을까.
그러나 『개의 날』 속 여섯 화자는 달랐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면을 목격하면서 그들의 느끼고 발견한 것들은 내면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누군가는 그 개가 자신과 닮았다고 여겼고 누군가는 죽음을 성찰하고 누군가는 삶이라는 고독에 대해 마주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죽음이 예측되는 개의 모습은 여섯 명 모두의 삶에 귀속되었다.
작가는 여섯 명의 화자 중 어느 한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그들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트럭 운전사가 화자인 「트럭 운전사 이야기」에서는 거짓으로 지어낸 가족 이야기를 여러 잡지에 보내는 한 남자가 고속도로에서 발견한 개를 보며 느끼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대해 말한다. 육체적 욕망을 근절하며 살아야 하는 사제가 미사에 오지 않는 여신도를 찾는 과정을 다룬 「천사와의 싸움」에서 사제는 개의 죽음에서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와 소피라는 여성을 향한 감출 수 없는 마음과 마주한다.
그 개는 죽어서 분해되었을 것이고, 지금은 도로변에 일부가 남아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다가갈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고독과 엄청난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출구는 죽음인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 중 누구도 그것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와의 싸움」, 49쪽)
죽은 뒤 영혼이 다른 육체에 깃드는 것은 사실이다. 영적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그렇다. 우리의 인생은 그런 부활의 연속일 뿐이다. (「천사와의 싸움」, 68쪽)
어쩌면 개는 죽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사제가 갈망하는 것 역시 그런 죽음을 통한 부활이 아닐까. 어렵게 다가온 부분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삶에서 한 번쯤 떠올리는 출구가 죽음이라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을까. 고속도로를 질주하던 개는 출구를 찾아 달리고 있던 건 아닐까.
그런가 하면 연인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 장소로 향하던 「생크림 속에 꽂혀 있는 작은 파라솔」의 빨간색 레인코트를 입은 여자는 개를 보며 연인과 자신을 떠올린다. 그들의 지나온 사랑에 대해서, 아니 그 이전 존재부터 버림의 대상이었던 유년 시절과 만난다. 우울증을 앓던 어머니 대신 자신을 돌봐준 유모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을 돌보지 못함에 대해 그녀는 버림받았다고 기억한다. 돌봄이 아닌 버림을 받았다는 건 모든 사랑에 대해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그러니 고속도로에서 개를 구하고만 싶었다. 심연 가득히 쌓인 버림받았다는 절망 때문에 그 개가 마치 자신과 같아서 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 개이며, 너는 그 개의 주인이다. 나는 그 개를 위해 울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동정심일까 아니면 절망의 이면일까. 학살을 은폐하기 위한 교훈적 감정이다. 언제나 누군가 나를 버렸다. 사랑. 사랑은 항상 당신들을 버린다. 아무리 짧은 순간의 사랑이라 하더라도. 아니다, 사랑은 처음부터, 환희의 순간에도 당신들을 버린다. 그때 이미, 태양은 우물 속에 가라앉고, 검은 물 아래 버려진 개가 있는 것이다. (「생크림 속에 꽂혀 있는 작은 파라솔」, 87쪽)
달리는 개를 보면서 그처럼 달려가 스스로 생을 끝내고 싶은 「자전거를 타고」의 화자는 일하던 과일가게에서 해고된 게이다. 사장은 그가 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옷차림이나 그가 게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장을 잃었지만 친구의 생일파티에서 주변 사람에게 자신의 내면을 꺼내놓는다. 그러니까 해고 사실과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사실을 말이다. 그러니 진정한 위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가 달리기 시작한 건 자신을 둘러싼 생각으로부터 단순해지기 위해서였지만 결국 고속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는 행위는 죽음을 원해서였다.
달리는 것은 하나의 일이며, 나의 내면에 무언가를 철저하게 건설하는 행위다. 나는 아직 그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그것은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 앞에 서 있는 방파제의 도도함과 부서지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다.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도 아니고, 즉각적인 위험도 없이 습관처럼 단조롭게, 고속도로의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이 모든 차량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달리고 있는가? (「자전거를 타고」, 114쪽)
개를 보며 죽음을 원한 이도 있었지만 암으로 사망한 남편의 죽음을 남편에게 버림받았다고 여기는 「별수 없음」의 과부는 개를 구할 수 없음이 별수 없음으로 다가오고 그에 반해 「영원한 휴식」에서 과부의 딸인 ‘안’은 그런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안은 개와 같은 죽음으로 제목처럼 영원한 휴식을 취하고 싶다. 남편을 잃은 아내와 아버지를 잃은 딸이 서로를 바라보는 극명한 태도는 그들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준다.
한 마리 개의 죽음은 개가 살아온 시간을 상상하게 만드는 동시 우리의 지난 삶을 불러온다. 철학적 사유를 애틋하고 뭉클하게 풀어낸 소설이다. 한동안 멍해진다. 무언가 빠져나간 것 같은 기분은 무엇일까.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향해 나가는가 묻는다. 마침내 도달할 것이 죽음이라는 명확한 사실과 마주하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건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붙잡고 싶은 게 무엇인지 내면의 진실한 고백을 불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