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비가 내렸다. 빗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그저 비가 오는구나, 생각하며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부산에 폭우로 많은 피해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밤이 지나는 사이, 다른 하루가 시작되는 사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벌어진 것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집을 떠나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나고 있다. 먼지를 제거하고 주인을 잃은 이불을 빨고 시들어가는 나무에 물을 주었다. 그리고 좋아하는 동생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보내온 사진에는 너무도 마른 그녀가 있었다. 왜 이렇게 말랐냐며 나는 많이 먹고 많이 자라고 했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니까, 살이 쪄야 한다고. 동생은 어떻게 지내냐고 물었다.  8월의 어영부영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하루하루가 감사하면서도 하루하루가 어렵고 힘들다고 답했다.
 
 가을이 시작되었고, 등에 조급함이 매달리기 시작한다. 하고 싶은 일이 할 수 있는 일과 같은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진다. 오후가 되니 아이들 목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온다. 소리를 듣노라면 달리고 싶어진다. 즐거움에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최선을 다해 노는 아이들. 건강한 웃음소리. 아이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던가. 그동안 올 때마다 문을 닫고 살았던가.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자라는 선인장(화분의 나무들도 다르지 않다)을 보는 일은 어떤 시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고 아주 미세하게 자신을 단련시키는 어떤 것.

 

 

 

 

 

 

 황정은의 인터뷰가 궁금해서 『악스트』를, 조해진과 정용준의 단편이 궁금해서 『이해 없이 당분간』을 구매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호퍼의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들 『빛 혹은 그림자』도 관심이 간다. 그런데 지금 읽고 싶은 책은 그 책이 아니다. 어제 방송에서 타일러가 추천한 작가의 책을 검색했다. 『푸른 밤』이라는 제목이 자꾸 나를 유혹한다. 여름에 더 잘 어울릴 것 같은 이미지다. 가을밤에 여름밤을 불러올 것 같다. 왠지 그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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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지난 주에는 큰언니 추도예배를 드렸다. 올해로 두 번째다. 짧은 예배를 드리고 우리는 저녁을 먹었다. 보기와 다르게 딱딱한 복숭아를 먹었고 드라마를 함께 시청했다. 큰언니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취업을 한 조카, 휴학을 했다가 뒤늦게 대학생이 된 조카, 자동차 에어컨이 고장 났다는 이야기를 나눴다.

 

 예배를 드리기 전 나는 배롱나무를 찍고 싶었다. 해가 저무는 시간이라 조카가 찍어왔지만 내가 원하는 사진이 아니었다. 다음 날 다른 조카가 이런 사진을 보내왔다. 나무 전체는 아니지만 내 마음을 읽은 조카가 고마웠다. 그러니까 8월에는 배롱나무다.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배롱나무, 이름이 왜 이리 예쁜가. 누가 이름을 지었을까. 나무들의 이름을 알아갈 때마다 그 누군가가 궁금하다.

 

 

 

 

 

 여름의 끝에서 가을을 기다린다. 이 시기는 참으로 묘하다. 가을을 기다리면서도 여름이 조금 남아 있기를 바란다. 가을이 오면 겨울이 올 것이기에. 바람을 만나는 순간의 기분도 달라진다. 시원한 기분이 아닌 조금은 서늘한 기분. 해마다 돌아오는 시기를 해마다 만날 수 있음이 감사하다. 예전에는 당연했던 것들의 소중함을 생각한다.


 8월은 어영부영 지낸 달이 되었다. 막바지 더위에 지치기도 했다. 9월에는 활기를 되찾아야 할 터. 좋아하는 소설로, 기대하는 책으로 힘을 얻어야지. 강화길의 『다른 사람』, 박민정의 『아내들의 학교』, 황정은의 『웃는 남자』, 리베카 솔닛의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에게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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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 읽었을 때 더 좋은 소설이 있다. 기세를 몰아 그 소설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이 그랬다. 그러니까 이 글은 지극히 주관적인 애정으로 작성된 것이다. 물론 제16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선릉 산책』에는 좋은 소설이 많았다. 김애란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정미경의 「새벽까지 희미하게」가 특히 그렇다. 권여선, 김숨, 최은영, 최진영의 소설을 뒤로하고 정미경의 소설을 읽는 시간은 정말 행복했다.

 

 정용준의 「선릉 산책」은 제목 그대로 선릉 산책이다. 스무 살 자폐아 한두운과 함께 선릉을 산책하는 하루에 대한 이야기다. 머리에 헤드기어를 쓰고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나타난 한두운. 침을 뱉는 습관이 있고 식탐이 많은 어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아니고 무언가를 공유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그저 주어진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선릉이었다. 선릉역에 선릉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곳에 선릉이 있었고 한두운과 하루를 보낼 수 없을 듯했지만 그와 하루를 보냈다. (쓰고 나니 이상하고, 내가 쓰려고 했던 게 이게 아닌데 싶다.)

 

 ‘숲 속으로 낮이 사라지고 있다. 그늘이 넓어지고 대기가 희뿌옇게 변했다. 한여름 늦은 오후가 이렇게 어두워질 수도 있나. 구름도 바람도 없는데, 태양은 저리도 맹렬한데 왜 숲은 어둡나.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한두운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윤곽선도 없고 희미한 얼룩 같은 것도 없었다. 곰곰 생각하니 걷는 내내 그림자를 본 기억이 없다. 같은 길을 돌고 또 돌았다. 선릉에서 정릉으로 정릉에서 다시 선릉으로. 한두운은 중력 없이 저항 없이 허공에 한 뼘 떠서 쭉 미끄러지듯 걸었다.’  (「선릉 산책」, 32~33쪽) 

 

 한두운은 산책을 하면서 만나는 것들을 이름을 호명하고 나무 각각의 이름을 말한다. 나무의 이름을 모두 알다니, 그것이 나에게는 신기한 광경으로 보인다. 일당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에게 한두운은 중요하면서도 중요하지 않은 존재이다. 한두운은 혼잣말을 하거나 침을 뱉는 행동으로 인해 시비가 붙기도 한다. 나는 그저 정해진 시간이 빨리 흘러 돈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다. 그러다 그가 맨 가방을 메보고, 헤드기어를 벗은 그의 얼굴을 보고 그가 견디는 하루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실감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두운을 돌봐야 하는 시간이 늘어나자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나와는 다른 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건 무엇일까. 나 외의 다른 이들은 모두 나와 다르다. 그러니 한두운에게 특별한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해 선입견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짦은 하루 동안 내가 한두운을 이해할 수도 없고 나와 그와의 거리가 좁혀질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와의 산책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두 사람이 나란하게 선릉을 걷고 걷는 모습을 상상하는 네게도 말이다.

 

 정미경의 「희미하게 새벽까지」는 송이를 기억하는 유석의 이야기다. 유석의 사무실에 정수기를 팔러 왔다가 일을 하게 된 송이. 다른 직원들에 비해 내세울 게 없어 무시당하고 잔심부름 만 하던 송이. 사무실을 정리하고 있고 지내던 송이가  그림책 작가가 되었다는 걸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유석은 송이를 떠올린다. 사무실에서 일을 할 때 그녀가 했던 말들,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이야기들. 그리고 늦은 밤 사무실 근처 놀이터에서 모과나무를 안고 충전하는 중이라던 송이, 떨어진 모과를 주어오자 안고 자겠다며 달라고 했던 송이. 함께 살지 않는 어머니와 장애인 동생에 대해 송이는 말한다. 유석도 아픈 아버지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가족 이야기를 서로에게 쏟아놓았던 새벽. 그 밤을 이어준 건 무엇이었을까. 그 밤이 그들에게 무엇이 되었을까.

 

 ‘매정하게도 송이는 나무를 끌어안고는 맞장구 한번 쳐주는 법이 없었고 유석은 미끄럼틀 위에 쪼그리고 앉아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또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고 있었다. 그런 밤이 몇 번이었더라. 송이는 그 나무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직 그 나무였다. 나무를 껴안고 잠든 듯 가만히 있을 때도, 웃음 명상이라도 하듯 혼자서 하하 웃고 있을 때도 있었다. 자꾸 보니 그냥 그런가 보다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열시나 나갔더니 선글라스를 끼고는 나무를 안고 있었다. 꺼멓긴 한데 렌즈가 크진 않아 어찌 보면 맹인용 안경 같았다. 그런 심오하게 웃기는 광경이었는데 왜 그걸 쓰고 있는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359쪽)

 

 ‘그러니까 선글라스를 낀 채로 모과나무를 안고 있던 송이. 기억의 멀고 가까움이란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라 강렬함으로 정해지는 거라면 그건 아마도 가장 가까운 기억이겠다. 새벽까지 희미하게 달이 더 있던 놀이터는 줄이 한량없이 긴 괘종시계의 추처럼 예고 없이 스윽 나타나곤 했다. 날것의 밑바닥을 누군가에게 들켰다고 느끼는 순간, 무릎이 꺾일 만큼 힘든 순간, 어떤 석연치 않은 순간, 그리고 또……. 그 새벽에 송이는 우리가 한층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까? 자신은?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새벽에 유석이 가장 힘든 시간을 지나고 있었던 건 사실이다.’(「새벽까지 희미하게」, 378쪽)

 

 어떤 시간은 당시에는 소중함을 모른다. 나중에라도 그 소중함을 알면 다행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느 시절에 만났던 사람, 어느 시절에 잠시 잠깐 스쳐 지났던 사람이 얼마나 든든한 존재였는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닫는다. 미련하게도 우리는 그렇다. 정미경의 소설이 내게 그러한 소설이었음을 고백한다. 그의 문장에 반했고 문장을 흠모하고 흠모했던 시절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 일부가 되었고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걸. 정미경의 소설은 언제나 나를 다른 곳으로 초대했다. 그곳은 내게 소설에서만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특별했고 소중했다. 아프리카의 붉은 분홍 사막을 상상하게 만들고 발칸반도(『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찾게 만들었다. 나를 능동적으로 이끄는 힘이었다. 쓰고 싶게 만들었다. 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것이라는 걸 안다. 그것이 무엇이든. 쓸 수 있다는 것에 충만했다. 쓴다는 행위의 아름다움에 대해 알았다. 쓴다는 것의 숭고함에 대해 배운 것이다.


  정오의 사막은 붉은 분홍이다.

 이 시간엔 부러 그렇지 않아도 눈을 가늘게 뜨게 된다.

 천지는 고요하고도 소란하다.

 와랑와랑.

 햇빛은 빛나는 동시에 속삭이며 부서진다.

 모래가 잔뜩 삼킨 열기운을 붉게 토해내면 대기는 부옇게 산란하며 뒤챈다.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아프리카의 별』, 7쪽)

 

 오래 기억하고 싶은 소설을 만나는 건 쉽고도 어렵다. 정용준의 『가나』, 정미경의 『발칸의 장미를 내게 주었네』를 읽고 내 안에 스며든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힘들도 고통스러운 일상, 속물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모른 척 외면하고 싶은 시간의 연속. 그럼에도 우리는 살고 있다. 결핍을 채우며 저마다 닿고자 하는 그곳을 향해 나간다. 수동적인 삶이 아닌 능동적인 삶, 변화를 꿈꾸는 날들. 때로 그 위대한 것들이 소설에서 파생되기도 한다. 정미경의 유작 장편소설『가수는 입을 다무네』 에서 만날 그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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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복이다. 더위의 끝이 보이는 것일까? 삼계탕을 먹었냐는 안부를 들었다. 냉동실에 삼계탕이 있지만 치킨으로 대신하는 말복이다.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지고 더위가 다시 활기를 찾았다. 여름에는 싱싱한 과일을 많이 먹는다. 참외, 토마토, 복숭아, 자두. 나는 자두를 제일 좋아한다. 한 번에 제법 큰 바구니 속 자두를 전부 다 먹을 수 있을 정도다. 신맛은 신맛대로 단맛은 단맛대로 정말 자두가 좋다. 어린 시절 마당에 자두나무도 있었는데.

 

 그 자두나무 때문에 나는 이런 시집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자두나무 정류장』이라니. 자두나무 정류장에서 봄이면 자두꽃이 피는 걸 보고 여름엔 자두가 무럭무럭 커가는 것도 보고 빨갛게 익어가는 것도 보고, 얼마나 좋을까. 시도 참 예쁘다. 정이 있는 마을, 혼자가 아닌 함께 사는 마을, 그런 시골을 떠올린다. 달이 와서 내리는, 눈이 별이 와서 내리는 정류장이니 깊은 밤 혼자 길을 걸어도 무섭거나 외롭지 않겠다.

 

 

외딴 강마을

자두나무 정류장에

 

비가 와서 내린다

눈이 와서 내린다

달이 와서 내린다

별이 와서 내린다

 

나는 자주자주

자두나무 정류장에 간다

 

비가 와도 가고

눈이 와도 가고

달이 와도 가고

별이 와도 간다

 

덜커덩덜커덩 왔는데

두근두근 바짝 왔는데

암도 없으면 서운하니까

 

비가 오면 비마중

눈이 오면 눈마중

달이 오면 달마중

별이 오면 별마중 간다

 

온다는 기별도 없이

 

비가 와서 후다닥 내린다

눈이 와서 휘이잉 내린다

달이 와서 ​찰바당찰바당 내린다

뭇별이 우르르 몰려와서 와르르 내린다

 

북적북적한 자두나무 정류장에는

왕왕, 장에 갔던 할매도 허청허청 섞여 내린다 「자두나무 정류장」, 전문

 

 

 이런 시도 좋다. 농부의 딸이었지만 계철마다 절기마다 해야 하는 농사일이 있다는 걸 어렸을 때는 몰랐다.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공부 말고도 또 있었다. 그러니 연이은 가뭄으로 제때 심지 못한 모종, 모내기로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예전과 다르게 농사기술이 발전했지만 비 오는 일은 여전히 하늘의 몫이다. 여름의 끄트머리에 서 있는 날들이라서 입하, 란 말에 어린 생기가 그립게 다가온다. 입추도 지났지만 입하는 또 곧 도착할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점점 빠르고 시간만큼 정직한 이도 없는 듯하다.

 

 

새너디할매가 마늘밭 풀을 맨다

 

일자도 장소도 틀림없이

지난해와 똑같은 날, 똑같은 밭이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미숫가루 한 그릇 타드리고

쑥떡 한 덩어리 얻어먹는데,

해 지기 전에 비가 칠 것 같다는

한 소식 전해주신다

이런 날 모종이 잘된단다

그래요?

 

부랴부랴 읍내 종묘상 다녀와서

고추 모종을 한다

가지 모종을 한다

수박 모종을 한다

호박 모종을 한다

단호박 모종도 단단히 한다

어라, 진짜네?

 

해 지기 전에 비가 쳐서

강병에 매어놓은 염소 먼저 들어간다

 

굵은 비 아까워서

물외 모종 심는다

참외 모종 심는다

토마토 모종 심는다

빗방물도 방울방울

방울토마토와 같이 심는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저녁 무렵 입하 비가

마늘쫑 뽑는 소리처럼 온다 「입하(立夏)」​ , 전문

 

 

 농촌에서 산다는 건 계절의 소리를 피부로 듣는다는 것이다. 얼핏 농부의 삶, 시골의 모습이 가득한 시집처럼 여겨졌다. 평온이 지속되는 일상. 그러나 그런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지고 볶는 게 사는 일이라는 걸 우리는 잘 안다. 지지고 볶는 생에 이런 시도 함께 지지고 볶는다. 볶은 시는 내가 되고, 볶은 시는 사랑이 된다.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는 일, 좋은 시집을 읽는 일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다. 누군가의 바닥을 보는 일상, 그 바닥에 내 바닥을 포갤 수 있는 일상,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괜찮은 하루가 이어지겠지.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린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 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바닥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바닥」, 전문

 

 

 말복에 읽는 시라는 제목을 붙이니 더불어 이런 시집도 생각난다. 이현승의 『생활이라는 생각』, 이정록의 『의자』까지. 삼계탕 대신 시집을 먹는 색다른 말복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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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17-08-1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닥이라는 시가 참 마음에 드네요. 좋은 시 소개 감사합니다^^

자목련 2017-08-14 18:22   좋아요 1 | URL
네, 마음에 박히고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아닐까 싶어요. 좋은 시를 함께 읽은 공간, 참 좋습니다.
 

 

 뒤늦은 일기를 쓰는 기분이다. 몰아 쓴 일기라고 해야 맞겠다. 소설을 읽고, 소설을 좋아하고, 소설을 흠모하는 이에게 소설을 쓰는 작가는 대단한 존재다. 그러니 그런 소설을 심사한다는 건 얼마나 두렵고 어려운 일일까. 운이 좋아서, 그런 기회를 가졌다. 민음사가 주관하고 알라딘이 후원하는 <오늘의 작가상> 독자 심사위원이 되었고 지난 8월의 어느 날 심사과정에 참여했다.

 

 

 

 

 8편의 후보작들을 읽었다. 나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소설을 읽는 것과 심사를 위한 읽기는 뭔가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나마 후보작으로 발표되기 전 이미 읽은 소설이고 일부는 리뷰를 작성했다는 게 다행이었다. 꼼꼼하게 세세하게 읽으려 하니 신기하게도 다른 것들이 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처음엔 그냥 넘어갔던 문장이 새로운 의미로 나를 맹렬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 인물의 입장이라면 나는 어떨까, 하는 생각도 잠깐씩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와 문학의 접점은 무엇이며, 어떻게 나와 겹쳐질 수 있는지, 문학의 기능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나를 제외한 4명의 심사위원은 모두 전문가이기에 심사 일이 다가올수록 불안은 형태를 지녀 나를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다. 떨림과 긴장으로 시작(아마도 나만 그랬을 것이다) 된 심사가 진행되면서 나는 그 순간이 참 좋구나, 즐겁구나, 체감하고 있었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오늘의 작가상>이 갖는 의미를 기억하는 것. 정말 뜻깊은 시간이었다. 아무 무늬 없는 무더위로만 채워질 올여름, 선명한 무늬로 새겨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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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1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8-11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