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 탓에 한낮의 이 시각이 저녁의 어스름 같다. 비는 그쳤지만 비는 우리 곁에 머문다. 봄이라고 말하면서도 나는 아직 패딩 조끼를 벗지 못하고 겨울 이불을 빨면서도 잠 잘 때마다 수면 양말을 챙긴다. 내일 오후에 집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게 맞나? 이곳에 올 때는 돌아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곳이 중심이다. 이곳에 있을 때도 나의 모든 것은 그곳을 향하고 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에게 집중하기 위한 리스트를 작성하지만 이번에는 꽝이다. 챙겨온 책은 정직한 자세로 소파를 지키고 컴퓨터를 켜고도 메일 확인만 할 뿐이다. 생각 가운데 잡념을 걸러내는 시간, 설명할 수 없는 다짐을 다지는 시간이라고 해두자.

 

 그렇다고 내일 이후의 시간이 무언가로 촘촘히 채워지는 건 아니다. 다시 어떤 흐름을 찾는 것,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 다시 산책으로 계획하는 것, 그뿐이다. 이곳으로 오기 전 신발장에서 꺼 내놓은 신발을 신고 아파트를 한 바퀴 도는 것. 그 사이 달라진 주변처럼 나도 달라졌기를 바란다.

 

 비가 그쳤고 조금 서늘하다. 그러니 달고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택배 상자 속 이런 책을 기대한다. 신간 구매를 자제하는데 표지 분위기만 보고도 그 작가라는 걸 알아버려서 이곳으로 주문했어야 했다고 자책한 책과 모르는 분야에 대한 무모한 호기심으로 궁금한 책, 두 권이다. 신간 광고메일을 과감히 삭제하고 책장에 있는 책만 생각하기로 한다. 다른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해, 현 상태를 지속해야 해, 중얼거리는 오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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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3-1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는 그쳤지만 비는 우리 곁에 머문다. 이 문장, 여운이 있네요.

자목련 2018-03-21 11:14   좋아요 0 | URL
지금 살포시 내리는 봄눈도 그러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