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을 읽을 때 세상의 소음은 사라진다. 음악을 들으면서 책을 읽더라도 그렇다. 나는 책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간을 읽으며 인물의 표정을 상상하고 그의 내면에 닿고자 애쓴다. 설령 그것이 부질없는 일이라도 말이다. 그뿐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단어를 발견하면 이 단어를 사용한 작가의 의도가 궁금해진다. 아름다운 문구에는 어떻게 하면 이런 문장을 쓸 수 있을까 부러움에 고민한다. 배혜경의 『고마워, 영화』를 읽으면서 그것은 더욱 커졌다. 문장을 읽고 있었지만 나는 장면을 읽고 있었고 영화 속 풍경을 읽고 있었다. 다채로운 질료로 한 편의 영화를 들려주는 그녀의 목소리에 점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 영화는 일상이 아니다. 영화감독이나 배우에 대한 지식이 많지 않다. 그러니 예술영화나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영화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래서 영화를 읽어주는 이 책은 친밀한 접근이면서도 낯선 접근이다. 그녀가 이끄는 대로 51편의 영화를 읽는 건 아니다. 우선 끌리는 영화를 부분을 먼저 읽었다. 위안을 주는 소중한 것들, 삶이 예술이 된다면, 의 영화를 먼저 읽고 처음으로 돌아가 천천히 영화를 만났다.
그녀와 내가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서 함께 본 영화는 많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한 권의 책에 수많은 느낌과 리뷰가 있듯 한 편의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리뷰를 읽을 수 있는 건 행운이다. 여전히 다시 보고 싶은 영화, 아련한 첫사랑의 기억으로 남아 있는 한석규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런 아름다운 글은 나를 자꾸만 빠져들게 만들었다. 살짝 고백하자면 우산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런 글은 마약과도 같다.
“한 우산을 받고 빗속을 걷는 일은 사람의 거리를 최대한 좁혀 준다. 우산 안은 숨소리를 나누고 체온을 느낄 수 있는 열린 공간이자 반쯤 닫힌 공간이다. 정원에게는 끝사랑, 다림에게는 첫사랑의 설렘이 우산 안으로 들이치는 빗줄기처럼 두 사람을 적시고 파고든다. 길을 걸으며 점점 반쪽 어깨와 등짝이 젖고 머리카락과 빰이 빗물로 얼룩져도 두 사람은 개의치 않는다. 비 비린내 밴 일상의 거리를 그렇게 걷는다. 사랑이란 대개 한쪽 어깨는 기꺼이 차가운 빗속에 내어두는 일이 아닌가.” (8월의 크리스마스, 252쪽)
영화에서 정원과 다림은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한다. 서로에게 스며든 사랑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함께 공유할 수 없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니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다 알고 싶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아, 그냥 그렇다는 거다. <미술관 옆 동물원>과 함께 읽어주었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분명한 건, 단순히 영화를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그러니까 정성을 다해 길어올린 문장으로 영화를 향한 애정과 삶에 대한 깊이 있는 사유를 들려주는 책이다. 51편의 영화는 주연이자 도구인 것이다.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그녀는 삶을 이야기하고 나누고자 한다. 모든 걸 갖춘 듯 보이는 50대 여교사 나칼리의 일상을 통해 우리의 그것과 마주한다. 흔들리지 않고 평온하려 애쓰려 노력하지만 때때로 욕망을 숨기는 스스로에게 좌절하는 게 인생 아니던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들 중 의심할 여지가 없는 단 한 가지는 죽음이다. 가족의 죽음, 친구의 죽음, 나의 죽음. 나의 죽음은 인식의 대상이 못되고 그저 타인의 죽음만을 볼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자기중심적으로 보는 것일 뿐, 타인의 죽음에 이해와 동행은 불가하다. 그렇게 다가오는 것들에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행복은 행복을 가지기 전까지의 것이며 행복을 얻는 순간 기쁨은 달아난다는 말은 나탈리가 귀착하는 진리가 된다.” (다가오는 것들, 23쪽)
보지 못했던 홍상수의 영화들, 그녀의 말처럼 <밀양>과 겹쳐지는 <오늘>, 꼼꼼하게 보고 싶은 <파니 핑크>, 거절할 수 없는 제목의 <낮술>, 윤계상의 연기를 확인하고 싶은 <풍산개>. 좋았던 영화가 많지만 특히 이런 부분이 좋았다. 네 남녀의 사랑과 관계, 그리고 사진이라는 장치와 떠오르는 음악으로 잘 알려진 영화 <클로저>에 대한 해설이라고 할까. 우리가 마주하는 게 내부가 아닌 외부이며 내부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는 선택의 몫은 온전히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 기억하라는 조언 같았다.
“우리가 맺고 있는 수많은 관계들. 그 관계는 낯선 사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길을 가다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거나, 내게 길을 물어봤던 어떤 사람이었다거나, 우연히 내가 도움을 주었거나 내가 받았거나. 하지만 모든 우연한 만남이 관계의 친밀함으로 진전하지는 않는다. 관계가 친밀함으로 나아가기 위해 선택의 순간이 있어야 하고 선택을 했다 하더라도 그 친밀함이 왜곡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클로저, 102쪽)
특별한 영화와 아름다운 문장을 공통점으로 꼽자니 한귀은의 『이토록 영화같은 당신』을 거들고 싶다. 인문학을 일상에 스며들게 하는 그녀만의 시선으로 만나는 영화 이야기. 차례에 구애받지 않고 눈길 가는 영화부터 펼치게 된다. 거리를 걷던 남녀 주인공과 흘러나오던 음악. 화려하고 눈부신 계절보다는 조금 쓸쓸한 기운이 가득한 가을과 겨울에 더 어울리는 영화가 아닐까. 누군가는 음악이 전부라고 말했던 영화 <원스>에서는 그녀는 사랑과 음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과 음악이 함께 있다면 비등점에 오르기도 전에 사랑은 이미 끓어 넘쳐 있을 것이고, 따라서 시작하지 않은 사랑은 이미 지나간 것이 되어 있어 사랑의 서사 속에서만 과잉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음악의 여분으로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대한 조망권을 읽어버린 채로 과거 속에서 자신도 연인도 소외시키면서 단지 얼룩 같은 음악의 나르시시즘에 빠져서.” (원스, 141쪽)
나를 이끈 영화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과 비교하면서 보고 싶은 영화 <디 아워스>다.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도 읽지 못했고 영화도 보지 못했다. 그저 영화 음악인 Morning Passages를 즐겨 들을 뿐이다. 그러니 내게 아직 닿지 않은 영화이며 소설이다.
“소설을 쓴 작가가 소설 속 인물의 분신들과 함께 등장함으로써 어떤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녹이게 되는 것이다. 현실의 인물인 버지니아는 어떤 허구 속 인물보다 허구적이며, 허구적 인물인 클라리사는 어떤 현실적 인물보다도 현실적이다. 이러한 역적은 보르헤스가 말한 것처럼, 소설의 등장인물이 가상일 수도 있다면 우리도 또한 가상인물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에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처럼 때때로 지나치게 극적인 것이다.” (디 아워스, 231쪽)
따뜻하고 정확한 눈으로 영화를 읽어주는 그녀 덕분에 보고 싶은 영화가 점점 쌓여간다. 책만큼 영화가 나의 일상으로 가까이 다가옴을 느낀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고마워, 영화』를 마주 하길. 영화에 대한 사랑과 감성이 한층 더 풍부해질 것이다. 놓치면 후회할 영화와 글을 기대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