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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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운에 익숙해지면 행운을 꿈꾸지 않는다. 어쩌다 찾아오는 행운에 반갑기보다는 의아할 뿐이다. 일부러 행복이 아닌 불행을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다만 운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규칙과 방법으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작은 평안을 느낀다. 어떤 경계에 닿기 전까지 말이다. 그것은 타인의 침입이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막강한 변수인 죽음 같은 것이다. 은희경은 『중국식 룰렛』에서 대체로 불운한 삶을 다루지만 인물들은 불운에 거부하거나 대항하지 않는다. 불운이 행운이 되는 건 한순간의 일이며 생각하기 나름이니까.

 

 여섯 편의 이야기는 지루할 만큼 단조롭고 반복된 일상을 보여준다. 뭔가 대단한 일을 바라는 삶이 아닌 그저 균열이 생기지 않고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의 집합이랄까. 그러기 위해서 소설 속 인물은 누군가에게 화를 내지도 어떤 일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도 않는다. 혼자 생각한 후 결정하고 단정 짓는다. 그러니까 그들은 모두 혼자이거나 최근에 혼자가 된 사람들로 외로움과 친구처럼 지낸다.

 

 표제작 「중국식 룰렛」​은 주인의 독특한 방식으로 술값을 정하는 술집에 모인 네 남자의 이야기로 그들은 저마다 불행한 사연을 꺼내 놓는다. 주인 K의 부름으로 술집을 찾은 나는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고 중년 남자가 들려주는 에피소드 속 그녀가 자신의 아내가 아닐까 짐작한다. K가 일부러 그 자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네 남자의 진실게임을 흥미롭게 진행되는데 살아오면서 가장 큰 실수나 후회할 만한 것들을 묻는 질문을 통해 삶을 반추하게 만든다. 소설 속 인물이 아닌 독자에게 말이다.

 

 후회와 실수로 점철된 생애를 버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가능한 일이니 남은 생에 희망을 걸어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희망이 쉽게 싹트는 게 아니다. 여자와 남자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주는 「장미의 왕자」속 여자와 남자에게도 그랬다. 찻집에서 일하는 여자는 유실물인 수첩을 보관한다. 남자가 연인에게 선물한 수첩이다. 남자와 연인이 왜 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수첩에 남겨진 글귀를 통해 짐작할 뿐이다. 여자는 남자를 몰래 훔쳐보며 좋아했지만 남자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한다. 엇갈린 사랑도 해프닝도 아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원하는 게 없었던 여자에게 남자가 기억하는 수첩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소설은 쓸쓸한 삶의 한 장면으로 압축된다.

 

 ‘사람들은 모두 뭔가를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 걸맞은 무엇을 더 갖추려고 하고 욕망은 바로 거기에서 생겨나는 게 아닐까. 나는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원하는 것도 없는지 모른다. 필요한 것은 많지만 원한다는 건 그것과는 다른 뜻이다. 그것은 욕망과도 다른 뜻일 것 같다.’ (「장미의 왕자」, 70~71쪽)

 

 가장 애틋하게 다가오는 소설은 공항에서 바뀐 가방으로 이어진 인연을 들려주는「불연속선」이다. 사진작가인 남자는 공항에서 바뀐 가방의 전화번호로 계속 연락을 취하지만 상대 여자는 연락 두절이다. 업무를 제외한 타인의 삶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한 남자에게 트렁크는 새로운 리듬을 요구한다. 가방에 담긴 물건으로 여자의 삶을 함부로 판단하기에 이른다. 가방은 불편 너머 조금씩 남자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는 스스로를 자신이 아는 범주 안에서 작은 규모로 삶을 꾸려나가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참을성과 조심성이 많고 자신이 속한 조건에 대체로 불만을 품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잘 맞추고 또 인생의 나쁜 점을 피하는 법을 아는 온화한 성격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단지 겁이 많을 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연속선」​, 126쪽)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가고 그 방식이 옳다고 믿는다. 익숙함에 길들여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 사진작가도 그러했다. 어디서든 변화의 기운을 감지했더라도 애써 무시했던 것이다. 구년째 박사논문을 쓰는 「별의 동굴」​속 시간강사나 아버지의 거짓과 부당한 욕망으로 정밀 지능검사를 받으러 가는 「대용품」속 소년과 비슷하다. 사진작가의 내부의 변화가 가방에서 비롯되었다면 시간강사는 부정맥 증상 때문이다. 수술을 결정하니 인생의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다. 집을 가득 채운 책을 정리하기에 이르고 자신의 삶에서 과연 좋았던 시절이 언제였나 돌아본다. 어쩌면 대부분의 삶이 그들과 겹치지 않을까.

 

 하나의 물건이나 행동으로 타인의 삶을 짐작하고 관계를 정리하기도 한다. 더 깊숙한 내면으로 다가가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두려움인지도 모른다. 두려움 때문에 인생의 룰렛 앞에서 꽝이 나올까 봐 주저한다. 바로 옆의 당첨은 보지 못한다. 설사 꽝이 나온대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으니 던져야지. 무언가를 기대하며 살아가는 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나으니까. 여전히 경쾌하고 세련된 문장의 은희경은 삶이란 그런 게 아니겠냐고 말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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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0-25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운에 익숙해진다는 말이 슬프게 들리네요.. 코끼리 다리에 사슬을 감아 어릴때부터 조련시킨다는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자목련 2016-10-26 17:14   좋아요 1 | URL
같은 이유로 행운에 집착하고 그것만 바라는 삶도 슬프지요. 불운과 행운 사이에서 나를 지키는 건 어려운 것 같아요. 환하게 웃는 따님의 모습이 슬픔을 잊게 만들겠지요. 포근한 저녁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