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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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저마다의 삶을 산다. 나는 나의 삶을 살고 당신은 당신의 삶을 산다. 두 개의 삶이 겹쳐질 때도 있다. 삶과 삶 사이에 사랑이 존재할 때, 지향점이 같을 때다. 그렇지만 두 삶이 온전히 포개어지는 건 아니다. 아니, 우리네 삶이란 결코 그럴 수 없다. 서로 같아지려고 노력해도 결국엔 어느 하나의 그늘 속에 다른 하나가 머물게 된다. 때로는 아주 작은 부분만 남겨두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살기도 한다. 내 삶은 나를 위해 존재하고 당신의 삶은 당신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단순하고도 명료한 진리를 우리는 생의 전체를 걸고 찾으려 애쓴다.

 

 니나와 슈타인의 생도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그래서 하나가 될 수 없었다. 아니 하나가 되기를 포기했다. 니나와 슈타인은 극명하게 달랐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도 달랐다. 그러니 지독한 사랑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주제로 보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현재의 사랑을 똑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 니나 앞에 도착한 슈타인의 일기는 애절하고 비통하다. 차마 그 사랑을 읽을 수 없어 니나는 자신을 보러 온 소설 속 화자인 ‘나’를 통해 그것을 읽게 만든다.

 

 슈타인과 니나가 다르듯 니나와 ‘나’도 다르다. 지루할 정도로 평탄한 삶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나’가 폭죽처럼 터져버리는 삶을 살아가는 니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의 그것을 대신한다. 슈타인과 ‘나’가 니나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서다. 중심에 서야 하는 삶, 절망을 이겨내야 하는 삶, 누군가가 아닌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삶 말이다. 그런 니나를 슈타인은 지지했고 사랑했고 잠시나마 결혼이라는 제도를 빌려 그녀를 소유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니나는 스프링 같았고 예측할 수없는 곳에서 튀어 올랐다. 아니다. 슈타인은 그녀의 삶을 예측할 수 있었다. 스무 살 어린 니나의 열정을 슈타인은 읽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1930~1940대 독일에서 니나가 삶을 산다는 건 해야 할 일과 사유해야 할 것들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이다. 슈타인을 사랑했지만 니나는 스스로 사랑은 아주 미세한 것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절박한 상황에서 심지어 자살을 기도했을 때에도 니나가 의지하고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슈타인뿐이었다. 나치즘과 싸우는 니나의 정치적인 행보는 아주 위험했지만 그녀에게는 유일한 선택이었고 옳았다. 그 선택을 위해 얼마나 많은 내적 갈등(우리가 삶을 극복하면 좀더 높은 삶을 얻는다는 것이 사실일까?, 71쪽)의 시간을 보냈을지 누구도 짐작할 수 없지만 말이다.

 

 니나는 왜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고자 했을까.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 고독, 절망, 고통을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 답은 오직 자신의 삶 가운데 있다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언니였던 ‘나’도 니나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느라 버거웠다. 산다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그래서 니나의 연락을 받고 동생과 짧은 시간에 대화를 나누며 슈타인의 일기를 읽는 동안 지난 삶에 대해 돌아볼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삶은 과연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니나의 삶을 통해 생을 생각한다.

 

 ‘온갖 아름다움이란 것이 일시적이고 다만 얼마 동안 빌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리고 우리가 인간들 틈이나 나무와 극장과 신문 사이에 있으면서도 마치 차가운 달 표면에 앉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고독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하지.’ (65쪽)

 

 ‘인생은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있는 힘을 다 짜내야 하는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일 뿐이야.’ (69~70쪽)

 

 니나가 읊조리듯 던지는 단호한 말들이 내게로 스며들어 박히고 만다. 슈타인의 일기를 모두 읽고  ‘나’가 흘린 눈물을 흘린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그녀가 보고 싶다. 더 알고 싶다. 그녀는 분명 아름다운 사람일 것이다. 빛나는 눈동자를 지녔을 것이고 내가 묻는 어떤 질문에도 흔쾌히 답을 내줄 것만 같다. 혁명가, 소설가, 인권운동가, 전사처럼 자신의 생을 소모했던 니나, 그런 니나를 18년 동안 목숨처럼 사랑했던 슈타인. 둘 가운데 누가 더 사랑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둘 가운데 누가 상대를 놓아주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사랑했다는 게 중요하다.

 

 니나는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 있다. 때때로 죽음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며 앞으로 나간다. 삶에 굴복당하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삶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소설 속 니나가 아닌 세상의 모든 니나가 그럴 것이다. 저마다 삶의 한가운데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라며.

 

‘우리는 생의 의미를 알려고 했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죠. 만약 의미를 묻게 되면 그 의미는 결코 체험할 수 없게 돼요. 의미에 대해 묻지 않는 자만이 그 의미가 뭔지 알아요.’ (319~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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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6-07-05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책입니다. 다시 읽고싶어지네요. 자목련님 리뷰 읽으니까. 처음 읽었을 때가 사춘기였는데_ 중년이 되어 읽는 맛은 또 어떨까 궁금해요.

자목련 2016-07-06 15:49   좋아요 0 | URL
사춘기에 이렇게 좋은 책을 만나셨다니, 멋진 야나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