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워서 슬픈 생
-
-
금수
미야모토 테루 지음, 송태욱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우연, 인연, 필연의 만남이 있다. 우연으로 시작된 만남은 인연으로 자라기도 하고 누군가는 우연을 필연이라 믿기고 한다. 피천득은 수필 인연에서 아사코와의 만남 중 세 번째 만남은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헤어진 이들의 만남은 우연, 인연, 필연 중 어디에 해당되는 것일까. 그것도 연인이 아닌 이혼으로 남이 된 이들의 만남이라면. 살다 보면 한 번쯤 마주칠 수 있다고 해도 전 남편에게 편지를 보내는 근황을 묻고 지난날의 헝클어진 삶을 풀고자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은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시간이다. 이혼 후 재혼을 한 아키는 장애아들을 낳고 키우며 살고 있다. 우연히 전 남편 아리마를 만난다.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남자가 불륜 상대와 동반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에 헤어졌고 단 한 번도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이끌림에 편지를 쓰고 만다. 아키의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아키는 여전히 아리마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증오와 복수심에 따지고 싶었던 것일까?
늦었지만 서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남겨진 사랑을 확인하고 재결합을 하는 건 아닐까, 섣부른 판단을 했던 내게 두 사람의 편지는 뻐근한 통증을 안겨준다. 돌이킬 수 없어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 인생의 한 부분을 돌아볼 수 있는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그랬다. 편지를 보낸 용기, 지난 삶과 현재의 삶을 고스란히 들려줄 수 있는 용기.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혹은 나를 감추기 위해 포장된 삶이 아닌 진짜 삶.
‘숲이 있는 곳을 지나서 산길을 오른쪽으로 돌아가 완전히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고 나서도 저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이 사라져 간 구부러진 길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고 있는 그 길의 금빛 햇빛이 예전에 제 인생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쓸쓸하고 황량한 빛의 칼날이 되어 저의 지저분하게 때가 낀 마음을 찔렀습니다.’ (아리마의 편지 133~134쪽)
‘모든 인간이 죽음을 맞이할 때 각자가 한 행위를 보고 각자의 삶에 의한 고뇌나 안온을 이어받고, 그것만은 소실되지 않는 목숨이 되어 우주라는 끝없는 공간, 시작도 끝도 없는 시공 속으로 녹아드는 것이 아닐까?’ (아리마의 편지 231쪽)
어쩌면 편지라서 아키와 아리마는 서로에게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소회가 아니라 한 번도 내뱉지 않았던 심연의 목소리를 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의 인생에서 떼어낼 수 있다고 믿었던 시절이지만 떼어낸 흔적이 선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할까. 그것을 누군가는 고백이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이라 할 것이고, 누군가는 용서라고 할 것이다.
‘‘지금’ 당신의 생활 방식이 미래의 당신을 다시 크게 바꾸게 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과거 같은 건 이제 어쩔 도리가 없는,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엄연히 과거는 살아 있어 오늘의 자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미래 사이에 ‘지금’이 끼여 있다는 것을 저도, 당신도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아키의 편지, 245쪽)
『환상의 빛』에서 죽음을 통해 아름답고 쓸쓸한 생을 보여줬던 미야모토 테루는 여전히 지독한 허무와 아픈 상처를 담아낸다. 나는 왜 지금을 살고 있는지 무엇이 나를 이토록 아프게 하는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인생의 고독과 슬픔을 말이다. 그것들에 대한 의문을 잊은 채 그저 주어진 대로 살아가야 하는 게 우리의 생인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