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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발견하니 기분이 무척 좋습니다.’(62쪽)
‘당신이 보낸 편지’란 글 속에 담긴 어떤 애정을 눈치챈 사람이라면 분명히 이 소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편지를 기다렸다는 말은 없지만 말이다. 편지란 그런 것이다.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는 그 시각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긴장으로 팽팽한 시간. 메리 앤 섀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를 읽는 내내 그 생생한 떨림을 감출 수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1월 런던에 살고 있는 작가 줄리엣은 채널제도 건지 섬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도시라는 남자에게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는 줄리엣이 소장했던 책을 갖고 있다며 작가의 다른 작품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알려달라는 정중한 부탁이 담겼다. 한 권의 책으로 우연하게 시작된 편지는 계속 이어진다. 줄리엣은 새로운 소설의 소재를 찾는 중이었고 도시가 가입한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에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줄리엣은 도시에게 독일군이 점령한 건지 섬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 그 내용을 글로 써도 좋은지 묻는다.
도시를 통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북클럽 회원 들은 하나 둘 줄리엣에게 편지를 보내고 저마다의 사연을 들려준다. 그 중심엔 간호사였던 엘리자베스가 있었다. 섬 주민의 생활과 식량을 통제하던 독일군을 피해 돼지구이 파티를 열었다. 모임이 끝나고 돌아가던 중 통금에 걸리자 엘리자베스가 독일군에게 문학회라고 둘러댔다. 그렇게 시작된 독서모임이 진짜가 된 것이다. 작은 섬 주민의 평범한 일상은 전쟁으로 붕괴되었지만 독서모임을 통해 서로를 위로한다. 책이 주는 재미와 즐거움으로 외부와 단절된 5년의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소설은 도시와 줄리엣이 주고받은 편지처럼 섬사람들과 줄리엣이 주고받은 편지를 통해 전쟁 당시의 상황과 그들이 읽은 책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제가 왜 브론테 자매를 높이 평가하는지 궁금하실 거예요. 전 열정적인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해요. 저 자신은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 없지만 이제 상상할 수는 있어요.《폭풍의 언덕》도 처음에는 별로였는데, 캐시의 유령이 뼈만 앙상한 손가락으로 창문 유리를 긁어대는 장면에서 멱살이 잡힌 것처럼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 소설을 다 읽은 후에는 히스클리프가 황무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서 맴돌더라고요.’ (84쪽)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이렇게 진실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존재한다는 건 정말 기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책에는 관심조차 없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책을 만났으니 이토록 즐거운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이를테면 이런 부분.
‘제가 고른 책은 《셰익스피어 선집》이었습니다. (중략) 제가 보기에는 그는 말을 아낄수록 더 많은 아름다움을 창조해내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장 찬탄하는 문장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 바로 이겁니다. 독일군이 상륙하던 날에도 이 문장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들을 실은 비행기가 연달아 오고 부두에도 배가 쏟아져 들어오는 걸 바라보던 그때 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빌어먹을 놈들, 빌어먹을 놈들 하고 속으로 되뇌는 것뿐이었습니다. ‘밝은 날이 다했으니 이제 어둠을 맞이하리라’라는 문장을 떠올릴 수 있었다면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고 밖으로 나가 상황에 맞설 준비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심장이 신발 아래로 가라앉듯 축 처져 있을 게 아니라요.’ (99~100쪽)
직접 만날 수 없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줄리엣과 사람들은 점점 가까워지고 결국 줄리엣은 건지 섬을 방문한다. 소설을 위한 자료 조사가 표면적 목적이었지만 줄리엣은 그들의 삶을 만나러 온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딸 킷, 어떤 주제라도 웃음을 안겨주는《폭풍의 언덕》의 열혈 독자 이솔라, 타인의 슬픔을 진심으로 안아주는 과묵한 남자 도시와 160통이 넘는 편지글이 아닌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알 수 없는 거대한 환희를 느낀다.
누군가는 소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잔혹함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섬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느끼는 전쟁의 공포는 짐작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내게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작가 줄리엣과 도시의 연애소설로 읽혔다. 둘을 이어준 한 권의 책과 함께 말이다. 주인공 줄리엣이 작가가 아니었더라도 편지로 시작된 우정은 사랑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내밀한 고백으로 편지만큼 좋은 방법은 없으니까. 나만을 위한 편지를 받은 것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소설이다.
‘런던에서 살기 싫어. 나는 건지 섬을 사랑해. 엘리자베스에 대한 책을 끝낸 후에도 여기 머무르고 싶어. 킷이 런던에서 산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어. 항상 신발을 신어야 하고, 뛰고 달리는 대신 걸어 다녀야 하고, 구경할 돼지도 없잖아. 에번과 엘리를 따라 고기잡이를 하러 갈 수도 없고, 아멜리아를 따라 여기저기 놀러 다닐 수도, 이솔라와 함께 물약을 만들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도시와 함께 산책하고 놀고 나들이할 수 없잖아.’ (399~4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