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꽂혀있는 시집을 다 읽는다면 나는 달라질 것이다. 분명 그러할 것이다.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를 사지 말고 우선은 읽어야 한다. 그리하여 맑다 못해 터질 것 같은 투명한 봄날에 꺼내든 시집은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이다. 최근에 새 시집이 나왔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아직은 이 시집에 더 정겹고 가깝다. 유독 지인에게 선물을 많이 한 시집이다. 가장 큰 이유는 제목이 좋다는 거였다. 어떤 바람이나 요구 따위 필요 없이 그저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건 얼마나 지극한 정성이란 말인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행위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안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생을 향한 눈빛 같은 것 말이다.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의 처음과 끝 사

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

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며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

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엔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

게 되리라 생각한다.

 -「풍경의 깊이」전문, 10~11쪽

 

 

 소중하지 않은 생이 없다는 걸 아는 순간은 언제 오는 것일까. 김사인의 시는 우리 삶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에 근원이 있는 듯하다. 함께 삶을 나누는 이들의 고통과 슬픔을 아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곳엔 꾸미고 치장한 것이 아닌 날 것 그대로의 것들이 있다. 쓸쓸하고 고즈넉한 풍경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의 시는 무척 아름답다.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어른의 손길이랄까.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일」전문, 38쪽

 

 

 사람들 가슴에

 

 텅텅 빈 바다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길게 사무치는 노래 하나씩 있다

 늙은 돌배나무 뒤틀어진 그림자 있다

 

 사람들 가슴에

 겁에 질린 얼굴 있다

 충혈된 눈들 있다

 

 사람들 가슴에

 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 있다

 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사람들 가슴에

 후두둑 가을비 뿌리는 대숲 하나씩 있다

 -「깊이 묻다」전문, 81쪽

 

 

 들풀 하나, 낙엽 하나, 개 한 마리, 인절미 하나에 담긴 담긴 이야기를 아는 시인. 어쩌면 그것은 시인의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이(이 시집을 선물로 받은 이도 포함) 김사인의 시가 왜 좋은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만 몰랐던 것이다. 시 속에 우리가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과거가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현재가 있다. 하여 하나의 시에 추억이란 이름으로 물들고 아픔이란 이름으로 감춰두었던 눈물을 흘린다.

 

 

 나 이제 눕네

 봄풀들은 꽃도 없이 스러지고

 우리는 너무 멀리 떠나왔나 봐

 저물어가는데

 

 채독 걸린 무서운 아이들만

 장다리밭에 뒹굴고

 아아 꽃밭은 결딴났으니

 

 봄날의 좋은 볕과

 환호하던 잎들과

 묵묵히 둘러앉던 저녁 밥상의 순한 이마들은

 어느 처마 밑에서 울고 있는가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

 늙은 까마귀같이

 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자, 한 잔

 눈물겨운 것이 어디 술뿐일까만

 그래도 한 잔

 -「빈 방」전문, 72쪽

 

 

 봄빛이 사그라 지기 전에 좋은 사람과 술 한잔 마시고 싶은 밤이다. 멀리 떨어져 나왔다고 믿었던 삶의 중심으로 한발을 내딛어도 좋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품어본다. 잊고 있던 시집을 펼치게 만든 당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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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5-05-05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만큼이나 자목련님 글도 좋아요.
어린당나귀곁에서. 담아갑니다^^
느긋한 봄밤 되세요

자목련 2015-05-06 18:21   좋아요 0 | URL
좋은 시가 참 많았어요. 좋은 보다 더 좋은 말로 말하고 싶은데...
입하(立夏)란 말은 좋은데 여름이 조금 천천히 오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