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기완을 만났다
조해진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타인에 대한 연민은 어디에서 시작하는가. 그들에게서 나의 일부를 보았다고 느끼기 때문은 아닐까. 나를 돌아보기에도 벅찬 생이다. 타인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없는 바쁜 시간들 속에 우리의 심장을 파고드는 누군가의 삶이 있다. 때때로 그들은 상처로 첨철된 지독한 불운의 늪에서 빠져 나오려 애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느끼는 연민은 어떤 안도로 부터 시작된 가식인지도 모른다. 조해진의 장편 『로기완을 만났다』는 전작 『천사의 도시』나 『한없이 멋진 꿈에』를 통해 만났던 부서질 듯 위태로운 삶을 지속하는 사람들, 그 이야기의 연장선처럼 느껴졌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란 문장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순간,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려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속 인물과 이니셜 L이 느꼈을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생각한다. 간절하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소설은 방송작가인 ‘나’가 벨기에에서 떠도는 탈북인에 대한 기사를 보고 그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브뤼셀에 도착해 마주하게 되는 삶과 존재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무엇이 나를 벨기에의 브뤼셀로 이끌었을까.  어쩌면 작가는 그 무언가를 이야기 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형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소개하고 시청자의 후원을 이끌어 내는 원고를 쓰는 ‘나’는 L을 도와준 한인 박의 도움으로 그의 흔적을 따라 나선다. 소재의 특별함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과하지 않게 보고 들은 것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때문에 우리는 소설 속 L과 ‘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담담하게 기록한 일기를 통해 ‘나’가 L이 되었듯 말이다.  

 일기에 적힌 거리를 걷고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고 머물렀던 숙소에 누워 그가 된다. 단지 이방인으로 느꼈을 두려움이 아니라, 매 순간 자신을 짓누르는 두려움을 이겨냈어야 할 그를 떠올리며 ‘나’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불치병과 가난으로 힘겨워 하는 사람들을 취재하며 느꼈던 감정들, 그들을 대하는 마음은 어디까지 진심이었는지,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들의 실체는 무엇일까 생각한다.  

 로가 한참을 기대어 울다간 그 담벼락의 구체적인 위치를 사실 나는 알지 못한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오래오래 걸었지만 로의 환영은 손끝에 닿지 앟는다. 어느 순간 힘이 빠지면서 나는 스스로 주저앉는다. 이쯤에서 나도 그만 울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가족이나 동료들이 동참할 수 없는 이 낯선 곳에서 이방인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그 누구의 따뜻한 위로도 받지 못한 모습으로 오랫동안, 내 마음의 밑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싶다.’ p.93

 소설은 북한을 탈출한 스무 살 청년이 낯선 땅 벨기에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말한다. 작고 마른 체격의 탈북 청년이 한 마다의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불안과 공포 속에서 하루 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건 희미하고 불확실한 기대였을 것이다.  자유를 향한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어떤 위험을 감수하며 살아가는지 자세하게 알려준다. 그들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얼마나 냉담한지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존재를 숨겨야 했던 삶이었다. 그러나 존재를 확인 받아야 할 대사관에서는 그의 존재를 믿어주지 않았다.  이니셜 L에서 로기완으로 불려질 때까지 지난한 시간들을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존재 자체가 불법인 사람인 사람에게 미래는 선택할 수 없는 패가 아니다.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선택되어버린 길을 가야 한다는 단순한 의무만이 있을 뿐이다.  순간 순간 불안해하면서, 사소한 기쁨은 포기하기도 하면서, 절대적으로 안전하지 않으나 절대적으로 위험한 길보다는 무언가 하나라도 더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을 가고, 걷고, 결국엔 살아남아야 한다는 빈약하지만 회피할 수 없는 의무. p.166 

 로기완을 만나기 위한 여정은 나의 정체성과 마주하는 시간은 아니었을까. 짙게 깔린 슬픔이 사라지고 잔잔한 미소가 나타나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그 시간이 길고 고통스러웠기에 더 환한 빛을 내는 것이리라. 타인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이는 누구일까.  물론 섣부른 연민을 가져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 역시 누군가에겐 타인이라는 걸 알기에 그들의 삶을 그냥 지나쳐 버려도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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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3-02-17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넷플릭스로 제작된다 해서 관심 가지고 있어 검색해 봤는데 자목련님은 역시 안목이 있으셨네요. 읽어봐야겠습니다.

자목련 2023-02-17 11:54   좋아요 0 | URL
이 소설 발표되고 바로 송중기 주연으로 영화가 만들어진다고 들었는데 12년이 지나서촬영을 시작하네요.
개인적으로 조해진의 초기 소설의 분위기나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선을 좋아해요. 물론 요즘 소설도 좋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