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의 내가 있기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종종 어제의 나를 부정한다. 아니, 어제의 다른 나가 존재했기를 바란다. 열심히 하지 않았던 나를, 실수를 해 창피한 나를, 실패한 나를, 게으름으로 가득했던 나는 사라지기를 바라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말이다.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새로 태어날 수 있다면 전혀 다른 나로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럴 수 없기에 우리는 현재에 충실하고 현재를 사랑해야 한다. 그게 안 돼서 삶이 힘들다.

이희영의 소설 『이벤트』의 주인공 ‘슬목’과 그가 만나는 사람도 다르지 않다. 사실, 모두가 그러하다. 복잡한 도시와 직장 생활의 어려움을 겪은 슬목은 퇴사하고 호텔 공고를 보고 지원한다. 합격할까 싶었는데 합격 소식을 받고 도착한 곳은 깊은 산속에 위치한 한옥 호텔 ‘담야(談夜)’다. 말이 호텔이지 일곱 개의 객실과 열 명도 안 되는 직원이 전부다. 거기다 대표는 호텔 경영에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 직원들의 건의사항은 모두 수용한다. 누가 봐도 이상한 호텔이다. 누가 보면 편하게 일할 수 있는 직장 같지만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걱정이 있다. 손님이 없어도 너무 없으니까. 그래서 오픈 일 주년을 기념으로 홍보 이벤트를 기획하기로 한다. 여러 의견이 나왔는데 진해하기로 한 이벤트는 슬목의 아이디어였다. 개개인의 맞춤형 이벤트를 원하는 고객을 초대하고 그 내용을 홍보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호텔 담야에 과연 이벤트를 신청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신청자가 있었다. 기쁜 마음에 호텔 직원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향하는데 일어나 보니 낯선 곳이다. 옷차림도 수상하고 눈앞에는 경찰이 서 있다. 분명 집에 들어가서 씻고 잠들었는데 집에 가 보니 잃어버린 건 없고 탁자에는 쪽지가 놓여있다. 짧은 내용과 함께 연락처를 남겼다. 과연 누가 슬목의 집에 다녀간 것일까. CCTV를 설치하고 확인하며 놀라고 만다. 그리고 오래전 기억을 떠올린다. 이른둥이로 태어나 부모님의 극진한 돌봄을 받는 시절, 심각한 아토피로 고생하며 놀림을 받던 순간, 원하는 대학에 떨어지고 절망하던 순간에 벌어진 사건까지. 화면에 등장한 이는 바로 자신이었고 메모를 남기는 것도 같은 사람이었다. 슬목은 몽유병 환자일까.

이상한 일은 뒤로하고 출근을 했고 첫 이벤트에 집중한다. 남자친구에게 여자친구가 프러포즈를 하는 내용이었다. 첫 이벤트로 제격이다. 남자가 프러포즈를 해야 한 하는 건 아니니까. 고객이 원하는 대로 준비를 하고 도착한 손님을 맞이하는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소꿉친구로 시작해 연인이 된 두 사람. 형편이 어려운 남자 친구는 더 이상 여자친구의 배려와 사랑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자친구의 사랑과 믿음은 확실했다. 담야의 첫 이벤트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고객의 사랑은 실패라 할 수 없다. 훗날 두 사람에게 담야의 이벤트는 가장 멋진 과거가 될지도 모르니까. 그야말로 가장 멋진 이벤트.


소설 『이벤트』는 호텔 담야를 배경으로 고객의 사연과 슬목의 과거를 들려주는 이야기가 함께한다. 몽유병이 아니라면 밤 열시 이후 존재하는 다른 슬목은 누구인가. 십이 년 전 스무 살의 슬목은 긴 잠에 빠져 있었는데 그 시간 동안 서른둘의 자신을 만난 것이다. 스무 살의 자신은 서른두 살 미래의 자신에게 쪽지를 남기고 서른두 살의 슬목은 스무 살의 자신을 위해 냉장고를 채우고 주의 사항을 건넨다.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는 일이지만 스무 살의 자산의 생각과 일상이 나쁘지 않다. 이것은 슬목만 아는 이벤트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이벤트’는 누군가에게는 멋진 일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사건처럼 다가올 수 있다. 담야에 사연을 보내는 고객들도 마찬가지다. 조카의 취직을 축하하는 이모의 사연, 아들의 생일을 축하하는 엄마의 사연도 그러하다. 이모를 떠올리면 조카보다 나이도 많고 아들의 생일이라면 당사자가 함께 호텔을 찾을 거라 여기는 건 하나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는 다른 존재이고 다른 삶을 살아가니까. 평범하고도 특별한 이야기.

우리가 바라는 '이벤트'는 무엇일까. 스무 살의 슬목에게는 입시의 실패가 커다란 사고였을 것이다. 좌절에 절망하면 주변을 돌아보고 살필 여력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서른두 살의 슬목이 돌아본 그 시간은 실패가 전부가 아니었다. 그 시간을 견디고 이겨내고 성장했으니까. 그때의 자신이 존재했기에 스물하나의 삶도 존재했고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고 그 곁에는 여전한 부모님의 사랑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저마다의 경험은 삶을 살아가는 풍부한 자양분이 된다는걸.

인간의 선택은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의 경험에서 나온 나름의 결괏값인지도 모르겠다. 그사이 덧없이 지나가 버린 삶의 중요한 순간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영원히 함께하자던 우정과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온 세상이 환희로 넘쳤던 첫사랑까지. 그 아름다웠던 시간은 지금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하지만 낙엽처럼 시간이 분해되어 삶의 밑거름이 되고 그 힘으로 모두 고된 하루하루를 버텨 내는지도 모른다. 힘듦에도 불구하고 아침이면 눈물을 닦고, 슬픔에도 불구하고 얼굴에 웃음을 그린 채, 아픔에도 불구하고 활기차게 인사를 하며, 이렇듯 아무렇지 않은 척 굳건히 살아갈 수는 있는지도. (267~268쪽)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어떤 날은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들지 않고 어떤 날은 조금 괜찮고 어떤 날은 아주 기분 좋은 날이 될 것이다. 삶이란 모조리 실패로 채워지지 않고 성공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물론 저절로 알게 되지 않는다. 소설 속 인물이 겪는 다양한 이벤트처럼 자신만의 이벤트가 있기 마련이다. 지나간 이벤트는 수정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다. 앞으로 다가올 이벤트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모든 것이 나를 채우고 존재하게 만든다는 사실만이 중요하다. 그렇게 조금씩 성장하고 살아가며 나만의 이야기로 나의 이벤트를 만들어 가는 일 말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6-09-18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근데 책 표지가 너무........
창비 요즘 표지가 너무......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