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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시대의 종말
비비언 고닉 지음, 홍한별 옮김 / 엘리 / 2026년 7월
평점 :
소설을 읽는다. 내가 모르는 삶이 거기 있어서, 안다고 착각하는 삶이 거기 있어서. 재밌다고, 슬프다고, 아프다고, 눈부신 은유에 놀라고 감탄하다. 그런 읽기가 전부였다. 뭐, 그런 읽기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소설을 좋아하는 일개의 독자이니까. 내가 알지 못하는 소설이 너무 많다. 먼저 읽은 누군가의 글에 매료되어 그 방대한 세계의 입구에서 기웃거린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작은 틈새로 쏟아지는 빛에 눈이 멀 것 같다. 비비언 고닉이 30년 전에 쓴 비평 에세이 『연애 시대의 종말』가 그랬다. 20세기의 문학 작품 가운데 사랑을 읽고 탐구한 기록이다.
책을 읽기 전 우선 목록을 살폈다. 내가 아는 작가가 있는지. 거의 없었다. 그렇다. 나는 한국문학을 좋아하고 그에 비해 세계문학은 읽은 게 많지 않다. 아니 거의 없다는 게 맞을지도. 그래도 반가운 이름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윌라 캐더’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 책을 읽은 건 윌라 캐더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루시 게이하트』가 너무 좋아서, 고닉은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했다. 책을 읽을 때 작가의 배경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작가의 생애와 환경을 참고하면 더 풍부한 읽기를 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실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먼저 윌라 캐더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면 고닉에 의하면 그녀는 실제로 여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소설에서 결혼 생활에 대한 현실적이고 자세한 묘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물과 상황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월라 캐더의 소설에서 주목하는 것은 결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 『루시 게이하트』 속 루시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에게 자신을 맡기는 대신 피아노에 집중했더라면 어땠을까. 고닉의 글을 읽으면서 정말 루시가 자기 자신을 몰랐구나 싶었다. 재미있는 건 고닉이 소설 속 루시가 사랑에 빠졌던 남자가 죽은 방식 그대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걸 꼬집은 것이었다. 『루시 게이하트』를 읽을 때는 우연인가 조차 생각하지 않았는데 월라 캐더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거다.

미국의 역사가이자 소설가인 헨리 애덤스와 아내 클로버 에덤스에 대한 부분도 인상적이다. 나처럼 헨리 애덤스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도 빠져들고 말았다. 헨리 애덤스가 쓴 소설에 대한 이야기는 그 시대의 셀럽 부부의 허상이자 지적이고 관찰력이 뛰어나고 대화 능력도 놀라운 아내 클로버에 대한 헨리의 우울과 질투라는 게 느껴졌다. 한편으로 모두에게 주목받는 건 남편 헨리라는 점에서 클로버는 불안하고 무기력하고 절망했을 것이다. 고닉의 글처럼 말이다.
클로버처럼 ‘덜 중요한 삶’은 기록으로 남지 않는다. 이들과 가까운 중요한 인물은 풍부한 기록을 남긴 역사가들이 그럴듯한 추론을 할 수 있지만, 덜 중요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저 ‘누이는 신경쇠약이었고, 신부는 도망쳤고, 아내는 자살했다’는 이야기 정도만 남는다. 충격적이고 극적인 결말만이 주어진다. 그러니 우리는 추측할 뿐이다. (51쪽)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의 시작은 어디일까. 눈치가 빠른 이라면 부모와 자식이락 답할 것이다. 남편이 아닌 자식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집착하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저버리지 못하고 그 사랑에 삶을 저당잡힌 이야기. 『아들과 연인』을 시작으로 『고독의 우물』, 『메리 올리비에』, 『등대로』로 이어지는 무자비한 친밀함은 현재에도 여전히 지독한 연애다.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세상으로부터 뒷걸음질 친다. 우리는 세상을 욕망하고, 세상을 두려워한다. 삶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일으키는 병적 흥분에 발목 잡힌 연애 사건이다. (86쪽)
30여 년 전 고닉의 글을 읽고 내가 읽지 않고 지나친 작가, 읽으려고 했지만 아직까지 읽지 못한 작가의 목록을 읊는다. 케이트 쇼팽, 진 리스, 버지니아 울프, 레이먼드 카버, 그들이 그려낸 연애와 사랑은 아름다운 결말이나 행복한 순간으로 남지 않는다. 어떤 소설은 막장 드라마 같고 어떤 소설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드는 현재의 기괴하고 소름돋는 잔인한 사건과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사랑을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오늘날 소설의 중심에 낭만적 사랑을 놓고 인물들이 사랑을 추구하다 무언가 거대한 것에 도달한다고 하면, 독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 우리가 사는 시대는 왜 이러한지, 그런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한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사랑을 은유로 사용하는 것은 발견의 행위가 아니라 향수에서 비롯된 행위일 것이다. (2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