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약과 공터 문학과지성 시인선 624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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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불안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원인을 알 수 없었던 불안이 아니었다. 하지만 원인을 안다고 해서 불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더욱 불안은 깊어졌고 잠잠하지 않고 요동쳤다. 5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에 이르려야 조금 괜찮아졌다고 여긴다. 정말로 괜찮아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스스로 그런 의식이 필요하고 다짐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차렸다고 할까. 그리고 겨우 시집을 읽는다. 실은 작약의 계절에 이 시집을 읽고 싶었고 생생했던 작약의 꽃잎이 시들고 떨어지는 날들에 이 시집이 그리웠다.


빗나가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고, 빗나간 것들을 증언하고 싶었다. 시는 그랬다. 모든 시는 불온해야 하고 모든 시는 자유로워야 한다. 불온한 시를 만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친해지는 일이다. 내 모든 시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바친다. (시인의 말)


그래서 얼마나 불온한 시냐고? 그건 모르겠다. 다만 시를 만나는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과 친해지는 일이라는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허연의 시는 뭐랄까, 외롭고 쓸쓸한 한 인간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러니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고독한 남자가 맞을지도 모른다. 홀로 있는 그가 건넨 시가 가만히 내게로 건너와 내 곁을 지킨다. 다시 시집을 펼치면서 여전히 같은 시에 시선이 길게 머문다. 그건 좋은 일일까, 나쁜 일일까. 그리고 내심 모른척했던 이런 시를 처음 만난 것처럼 읽는다.


사람들이 땅을 발견함으로써

자두나무를 발견하고

모든 결과는 자두가 되었다

염탐된 사상들이 담긴

서책에 대해서 생각한다

장서관 맨 위 칸 귀퉁이가 찢어진

그 서책은 놀라운 것이었다

엄마에 반발한 아이들이

줄지어

죽어갔던 날들의 기록이었다

익숙한 햇살이 땅을 비출 때마다

그림자는 이름을 가졌다

결국, 세상은 그림자였음을 안다

바라보면 눈멀게 되는 것들이 있다

성당 한쪽 담벼락에

섬망이 지나갔다

죽어갔지만

어떤 것들은 이름을 가졌다

(「어떤 것들은 이름을 가졌다』 - 전문)




사라진 기억, 사라졌다고 믿었던 날들, 이제는 부재한 누군가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안에 나의 이름을 덧붙인다. 나의 생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어느 날에는 소멸을 꿈꾸었지만 정작 그런 순간이 온다면 나는 멀리 달아나고 싶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가장 큰 불안이기도 하니까. 나는 나를 모르고 내가 안다고 믿어도 그건 아는 게 아닐 터.

그러나 유한한 생은 오늘을 데려왔고 오늘을 살게 한다. 어떤 이는 치열하게 어떤 이는 무기력하게 어떤 이는 제법 아름답고 균형 있게 살아갈 것이다. 내게 주어진 5월의 하루하루는 우울감으로 가득했고 무기력으로 짓눌렸다. 심하게 구져졌고 위축했던 나의 마음이 도무지 펴질 것 같지 않았다. 나에게만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직 마침표를 찍은 게 아닌데 말이다. 그저 오늘이 전부라는 걸 잊었다. 오늘이 인생이라는 걸 말이다. 그러니 이런 시는 완벽하다.

단명할 것이 분명한 화분에

여전히 물을 준다

마무리 짓지 못하는 일들

그런 게 뭐라고

속이 탄다

화분의 죽음은

화분의 시간은

직관만으로는 말할 수 없다

시소에 앉아

인조 잔디와 하늘을 번갈아 보면서

어떤 게 쓸 만한 선택인지 생각한다

시소에 앉아 느끼는

생의 무질서도(度)는 그나마 견딜 만한다

주기니까

딱 거기까지니까

노인에서 소년으로

시소는 움직인다

양쪽에서 하는 일과 양은 같은데

한쪽은 등신이고

한쪽은 전사다

딱 거기까지가 생이다

화분에 물을 준다

(「슬픈 주기 1』 - 전문)

나의 5월은 오늘이 마지막이다. 내일은 6월이다. 5월이 될 수 없다. 나의 오월은 지나갈 것이다. 나의 5월은 기억이 될 것이다. 하루가 지나면 6월이 되지만 나의 6월은 알 수 없다. 어쩌면 나는 6월에도 5월을 살지도 모른다. 6월에도 5월의 감정에 허덕이며 허우적댈지도 모른다. 그래도 5월을 살아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의 작약이 그러했듯이. 『작약과 공터』가 그러하듯이.




작약은

울먹거림

알아듣기 힘들지만 정확한 말

살아서 작약을 보고 있다

작약에는 잔인 속의 고요가 있고

고요를 알아채는 게 나의 재능이라서 (「작약과 공터』, 일부)



공터에선

당신의 아름다운 나라와

내 끔찍한 나라가

불온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에는 이상한 공터가 있어서

마음을 멍하게 하는 공터가 있어서

작약이 있어서 (「작약과 공터 2』,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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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5-31 19: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가 갈수록 생의 유한함, 이런 저런 상황들이 맞물려 불안이 증폭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이유 없이 갑자기 막 심장이 두근대기도 하고요. 아무쪼록 우리 모두의 마음에 평화와 평온이 깃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