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에 친구와 나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작가 한강에 대해서였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은 친구는 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도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좋아했던가. 모르겠다. 현재의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을 사들이고 책을 쌓아둔다. 친구는 내게 한강의 책 가운데 『소년이 온다』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다. 대표적인 한강의 소설로 가장 많이 언급되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솔직하게 그 소설은 읽기 힘들 거라고 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라고. 내가 좋아하는 단편집을 추천했지만 친구는 장편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알라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려고 하자 친구는 극구 말렸다. 친구에게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이었고 내게는 사는 것이었다. 마침 곁에 둔 『디 에센셜 한강』을 건넸다. 이 책이 정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책을 구매했고 천천히 읽었다. 아니, 게으르게.
나는 한강 작가를 좋아한다. 한강 작가가 무얼 말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차분한 슬픔이, 애써 고르고 고른 순수한 언어가 좋았다. 어렵게 다가왔지만 자꾸 그렸다. 어쩌면 그의 소설을 읽을 당시 내 감정과 상태가 그러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여전히 그의 초기 소설을 아낀다. 『디 에센셜 한강』에 수록된 작품은 그런 이유로 읽으면서 조금 울컥했고 많이 아팠다. 어떤 면에서 한강의 소설은 상실과 애도로 가득한 생을 버티고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 같다. 아니,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강에게 그것은 문학이자 언어였을 것이다. 유일하고 고유한 목소리.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는 남자와의 이야기인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으며 나는 조마조마했다.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던 소설이 아니었다. 처음 읽는 기분이었다. 처음 읽는 기분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순간 그 삶이 깨질 것 같아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그들이 겪는 상실과 고통을 나는 알 수 없으니 느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바라는 간절함이 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서. 절망의 순간을 지나왔다고 여겼지만 여전히 절망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말을 잃은 그녀가 시력을 잃은 희랍어 강사의 집으로 돌아와 그를 위해 안경점에 가려는 마음에 안도했다. 그것은 당연한 마음이 아니었기에. 이상한 일이었다. 과거에 옮겨 적었던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두 사람의 실루엣만 내게 들어왔다. 그들의 움직임, 사소한 떨림, 귀 기울이고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몸짓.
그런 기분은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과 「파란 돌」을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그게 맞았다. 「회복하는 인간」을 읽으면서 이런 내용이었던가. 나는 「회복하는 인간」을 「노랑무늬영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마음. 그렇다면 한강이 주목하는 고통은 무엇일까. 내면을 가득 채운 고통은 무엇일까.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반가운 점도 있었다. 「파란 돌」을 읽으며 한강의 소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파란 돌」에서 등장한 삼촌의 그림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 등장하는 먹그림을 불러왔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강의 「어깨뼈」를 떠올렸다. 한강의 소설 곳곳에서 느껴지는 봄의 기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기다리는 이미지가 한강의 그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했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 「파란 돌」, 263쪽)

그래, 나는 이런 문장에 반하고 반했었다. 감히 만질 수 없는 감각과 숨죽여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 그 모든 것은 슬픔에 기반된 것이었다. 그러나 슬픔에 싸였거나 갇힌 게 아니었다. 슬픔과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눈이 되어 사라지고 말을 잃고 시력을 잃어도 멈출 수 없는 삶은 이어지고 계속된다는 당연하고 당연한 삶의 의무에 대한 위로이자 토닥임이었다. 거대한 역사의 슬픔을 통해서 한강이 전하고 싶은 게 이런 것이었지 오래전 나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부재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나와 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그것이었다. 사라졌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어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 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다.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힌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 소리를 낸 순간. (『내 여자의 열매』 속 「어깨뼈」)
『디 에센셜 한강』에서 만난 산문은 정말 처음이었다. 처음이라서 새로웠고 더 깊게 집중할 수 있었다. 작가 한강이 아닌 소녀 한강, 딸 한강, 인간 한강을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할까. 피아노를 열망하던 어린 한강을 상상하며 읽은 「종이 피아노」는 비슷한 경험이 있어 더 애틋했다. 딸이 원하는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형편이 나아졌을 때 피아노 학원에 엄마 아빠를 위해 일 년만 다녀주라는 그 마음. 그리하여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다니게 된 피아노 학원의 이야기 「저녁 여섯 시, 검고 긴 바늘」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언제 기회가 되면 피아노에 대해 말할 수 있기를.
그런가 하면 「여름의 소년들에게」는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이나 읽은 후에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 책을 읽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친구가 궁금해했던 『소년이 온다』를 읽게 될까. 아니면 읽지 못하게 될까. 친구는 한강의 다른 책을 더 읽게 될까. 아니면 멈추게 될까. 다음에 친구를 만나면 우리는 한강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예상하지 않았던 대화지만 예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그 무언가에 대해서.
‘언어’라는 나이 불충분하고 때로 불가능한 도구가, 결국은 그것을 읽을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는 통로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침내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내는 백 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쓴 것을 읽을 사람들이 거기 아직 살아남아 있으리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백 년 동안의 기도」, 340쪽)
저마다 독립적이었다고 여겼던 한강의 소설이 동그라미가 되었다. 동그랗게 커지고 있었다. 내가 만난 소설이 그 동그라미의 일부였고 전체였다는 게 기쁘다. 잘 모르고 끝내 알 수 없더라도 읽을 수 있고 읽는 일이 작가와 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사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