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슬프다, 아프다, 그립다, 이런 말로 정리하기 어려운 감정 말이다. 저마다 고유한 감정은 결과 폭이 다르다.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같은 질량으로 판단하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사느라 바빠서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생각나지 않아서, 이유는 많다. 그런 복잡하고 엉킨 감정을 하나씩 풀어 이름을 붙인 이가 있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의 저자 존 케닉이다. 감정이라는 거대한 가지에 붙은 잔 줄기에 이름을 붙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것을 정리한 내용이 바로 이 책이다. 쉽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신조어 사전이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란 제목처럼 슬픔에 국한된 내용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숱한 감정들, 고독한 순간들, 내밀한 심연과 마주하는 순간을 새로운 단어로 설명한다고 할까. 여섯 장에 걸려 외부 세계, 내적 자아, 당신이 아는 사람, 당신이 모르는 사람, 시가의 흐름, 의미의 추구까지 주제별로 모은 300여 개의 단어를 만날 수 있다. 신조어 사전답게 그가 만든 단어는 어원에 대한 설명이 더해진다. 가령 이런 것이다. 슬립 패스트(slipfast)는 형용사로 어원은 slip + fast다. 뜻은 세상에 참여하지 않고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전혀 발자국을 남지 않고도 사람들의 대화 속을 자유로이 헤맬 수 있게.


존 케닉의 설명을 읽고 나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떤 일에 개입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되는 그런 순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나의 생각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처럼 어떤 단어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만 똑같지 않을 수 있다. 어느 연인은 “사랑해”란 말 대신 둘만의 신호로 특정 숫자를 언급하기도 하고 “고요해”란 말로 대신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이 책은 자유로이 해석될 수 있다.







영어로 만든 단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다. 맞다. 그러나 가만히 이 책의 신조어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깊은 밤 누구에게 들킬까 혼자만 돌아보았던 순간의 감정이나 막연하게 이해받고 싶었던 감정이 스쳐지나는 걸 느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의 순간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알아온 누군가에게도 개인적이고 신비한 내적 삶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란 그노시엔느(Gnossienne)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그랬다. 짐작했듯이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 제목에서 차용한 단어다.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해서 다 알 수 없다. 전부를 알고 싶지만 전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 사이에는 늘 어떤 거리감이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견유학파의 말이 맞는지도, 사랑은 그저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성스러운 종류의 환상일지도, 아이들을 인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파랗게 빛나는 신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렇다고 믿기만 한다면, 그것은 힘을 지닌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 (137쪽)


그럼에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이런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고 조금 더 상대의 슬픔이나 아픔을 이해하고 싶은 간절함에 말이다. 그런 마음 조각들이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모여 이런 사전이 되었다. 사실 이 책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라는 점에도 그렇지만 직접 읽었을 때 와닿는 기분이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기에. 문득 떠오른 건 전시 같은 형태로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책엔 단어를 표현한 콜라주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끌렸던 단어 Gnossienne엔 이런 작품으로 만날 수 있다.






날씨 따라 마구 달라지는 감정, 계절마다 뒤바뀌는 감정, 그때의 감정을 획일적인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는 건 삭막한 일이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말이 다르고 같은 말인데 세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그뿐인가, 어떤 말은 사멸한다. 그런 점에서 존 케닉의 이런 프로젝트는 의미 있다.

아마도 특정 단어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 단어에 반하게 되거나 반가움을 표할지도 모른다. 한국어로 번역해 사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감정을 정리하여 이름을 붙이고 싶은 욕구를 느낄지도 모른다. 하나의 감정에 대해 고유하고도 차별적으로 펼쳐놓는다고 할까. 결코 같을 수 없는 무게의 슬픔 혹은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떨까. 존 케닉의 이 책처럼 나만의 시를 쓰고 사전을 만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남다르고 각별하게 기억될 책이다.


단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고 변화하면서 시대에 뒤처지거나 새로운 의미를 띠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단어는 겉으로는 제자리에 고정된 듯한 모습을 보이며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달래주는 존재로, 우리가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로 남는다. (292~293쪽)


독특하고 특별한 『슬픔에 이름 붙이기』을 읽다 보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있다. 바로 이 책을 추천한 김소연의 『마음사전』이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은 제목 그대로 마음사전이다.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 알고 싶지만 단단한 문으로 가로막힌 당신의 마음을 향한 두드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바람결에 달라지기도 하는 감정의 상태, 숨어버린 마음, 속이 상해 울컥한 기분을 달래주는 글의 집합체! 전부를 다 소개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단어로 충분하다.


은은한 것들은 향기가 있고, 은근한 것들은 힘이 있다. 은은함에는 아련함이 있고, 은근함에는 아둔함이 있다. 은은한 것들이 지닌 아련함은 그 과정을 음미하게 하며, 은근한 것들이 지닌 아둔함은 그 결론을 신뢰하게 한다. 은은한 사람은 과정을 아름답게 엮어가며, 은근한 사람은 아름답게 맺는다. (「은은하다: 은근하다」, 전문)


「은은하다: 은근하다」를 읽는다. 마음과 감정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것들은 진정 선명한 형태를 지닌다. 명확하게 내게로 온다고 할까. 은은하고 은근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향기를 지닌 사람,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서는 빛이 난다. 그 빛은 멀리서 알아볼 수 있도록 환하고 아름답다. 어렵겠지만 은은하고 은근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성찰하는 고독의 시간을 통해 단련하는 사람.


다른 책으로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이다. 모두에게 같은 감정을 강요할 수 없고 타인의 감정을 섣불리 예단해서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감정 비평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인의 감정 상태에 이름 붙이기가 심해지면 어찌 될까. 당신의 하루. 본인의 감정을 굳이 해석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자신을 잠시 내버려두고 싶은 날. 그러나 누군가는 당신의 심적 상태마저도 어떤 감정이라며 이름 붙이려 한다. 감정에 관해 스스로 무無의 상황에 놓이고 싶은 싶은 시공간을 확보하기란 점점 어렵다. 감정에 관한 무의 상황도 특정한 감정임을 확인하려 드는 시도 때문에. (『다소 곤란한 감정』, 212쪽)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언론이나 전문가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감정에 휩쓸리곤 한다. 그들과 다른 감정을 표출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다른 감정을 소유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개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나의 슬픔에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타인의 슬픔과 감정에도 내가 모르는 이름이 있을 수 있다. 서로의 이름을 알려주고 불러주는 일, 위로와 회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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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딴 얘긴데 마음사전을 쓴 김소연 작가가 시인겸 건축가인 함성호 씨와
부부지간이더군요. ㅎ

자목련 2024-06-16 17:11   좋아요 1 | URL
네, 함성호 씨의 산문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시인과 소설가 부부, 소설가 부부도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