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새소설 15
김이설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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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는 친구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 나의 상처와 영광, 과거와 현재를 아는 이들. 그럼에도 전부를 아는 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같은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고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울고 웃었던 이가 지금 곁에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다. 친구, 그래서 오랜 친구는 좋다. 허물없이 속내를 보여주고 때로 감추어도 일부러 캐지 않는 사이. 김이설의 장편소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속 난주, 미경, 정은처럼 말이다.


마흔아홉의 세 친구는 25년 만에 강릉으로 여행을 떠난다. 스물넷에 함께 왔던 강릉, 가물가물한 기억은 뒤로하고 어렵게 시간을 맞춘 여행이다. 강릉 여행이 뭐 그리 어려운 거냐고 묻겠지만 삶이란 그런 것이다. 전업주부로 두 아들을 둔 난주, 남편의 사업 실패로 일과 아르바이트로 정신없는 정은, 직장에 다니며 아픈 노모를 혼자 돌보는 미경. 저마다 사정은 끝이 없었다. 그러니 기어이 성사된 강릉 여행은 달라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은 삶의 무게가 가득했다. 성장한 아들과 밖으로 도는 남편은 난주의 우울을 이해하지 못했다. 무기력한 삶, 누군가 행복에 겨운 투정이라 할 것들. 정은이 보기에도 그랬다. 뭐 하나 부족한 것 없는 난주였다. 정은의 남편이 시작한 키즈 카페가 코로나로 대출과 빚만 남을 줄 몰랐다. 아이의 학원도 끊어야 할 판, 죽고 싶은 게 정은의 심정이었다. 미경도 다르지 않았다. 미경만 찾는 노모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원하게 힘들다고 친구들에게 신세한탄을 할 수도 없었다.


일상을 벗어난 강릉에서도 난주는 식구들의 안부가 궁금했고 자신을 찾지 않은 그들에게 서운했다. 대출이자 미납 알림 문자와 혹여 남편이 떠 일을 벌인 게 아닐까 정은은 불안했다. 없는 교육을 만들어 이모에게 엄마를 부탁한 미경도 불편했다. 술을 마시고 술에 취해 농담을 하고 웃고 떠들어도 공허했다. 한 마디 건네는 말들에 가시가 있기도 했고 술을 핑계로 슬그머니 속내를 보이고 싶기도 했다.


“사는 데 의미 찾고 하는 건 이십 대 때 다 끝냈어야지.”

“그럼 왜 사냐?”

“그냥 사는 거지. 사는 데 이유가 어딨냐.” (21쪽)


그냥 사는 거지. 종종 하는 말이다. 의미를 찾다 보면 지금껏 살아온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아서 그냥 지금을 산다. 난주, 미경, 정은을 따라 회를 먹고 술을 마시고 바닷가를 거닐고 소리를 지르며 나는 바닷가에 서 있는 기분이다. 소설을 읽는 다른 독자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삶에 매여 옴짝달싹 못하며 사는 날들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사는 게 뭐라고.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마흔아홉의 그들은 강릉에 함께 있지만 마음은 각자의 강릉을 추억했다. 뭐가 힘든지 설명할 수 없는 난주가 일탈의 장소로 택한 강릉, 사업 실패로 정은이 딸과 함께 죽음을 선택하려 했던 강릉, 미경에게 전부였던 성희 언니가 살다가 죽은 강릉. 그들의 강릉은 나만의 강릉을 불러온다. 나의 기억에 남은 강릉, 지난 한 시절의 조각, 그리고 그 안에 있던 사람.


희망이나 열망이라는 단어 대신 인생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 페이지에 안착하면 또 다음 페이지로 건너가야 한다는 숙제가 다시 주어진다 해도. 일단은 눈앞의 페이지부터 해결해야 했다. (64쪽)


“이십 대는 그냥 이십 대인 것만으로 힘든 거야.” (197쪽)


세 친구의 이십 때가 그랬던 것처럼 그 시절은 모든 게 막막했고 불안했다. 당장의 취업, 맘대로 안 되는 감정만으로 힘겹고 버거웠다. 그 시절의 오십 대는 안정된 삶이라 기대했다. 어리석게도 빨리 나이 들고 싶기도 했으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은 그런 것인데 이제는 막연한 기대조차 품지 못하는 현실이다. 삶이란 페이지는 끝이 보이지 않고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어느새 대든 다 힘들다는 걸 말이다.


그래도 그 시대를 함께 버티고 견딘 이들이 있기에 지금의 페이지를 버티며 살아갈 수 있는지 모른다. 강릉에서 보낸 3박 4일이 난주, 정은, 미경이 건너고 도달할 페이지를 살아갈 힘이 될 것이다. 고혈압, 우울증, 탈모가 말해주는 늙고 있는 몸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니까. 멈추고 싶다면 멈출 수 있고 버리고 싶다면 버릴 수 있다고 함부로 다짐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삶.


그저 그리운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혼자여서 꽉 차는 곳 언제든 갈 수 있는 고이자, 결국 거기밖에 없는 곳. (188쪽)


누군가의 강릉은 친구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강릉은 나를 기다리는 집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강릉은 아직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세 사람의 강릉 여행은 지나온 시절을 추억하고 지워진 기억은 지워진 대로 새롭게 만든 추억을 기억하면 된다고 말한다. 오늘이라는 기억과 추억. 앞으로 살아갈 삶을 생각하면 갑자기 겁나고 무섭지만 나의 친구들도 그렇다는 생각에 안도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보고 싶다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니 든든하다. 나를 아는 사람, 그를 아는 나이고 싶다. 차갑기만 했던 마음이 점점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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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오 2024-05-24 0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 너무 좋네요. 전부를 알 순 없지만, 그럼에도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서로 많은 걸 공유하고 있는 친구는 참 소중합니다!!

자목련 2024-05-24 11:13   좋아요 0 | URL
아, 은오 님이다!!!
시험 끝났나요? 친구는 소중하지요. 알라딘 서재에서 은오 님은 소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