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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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간의 대화는 원활하지 않다. 대화 자체가 사라졌다.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손에 꼽을 정도다. 각자의 생활 방식에 따라 움직인다. 꼭 해야 할 말은 말이 아닌 문자로 전달된다. 먹고 사느라 바쁘니까, 가족 사이에 무슨 대화가 필요하냐는 농담은 진심이 된다. 개정판으로 다시 만난 조경란의 『움직임』 속 가족도 다르지 않다.


나에게 새 가족이 생겼다.(13쪽)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화자 ‘나’(신이경)는 스무 살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외할아버지, 이모, 삼촌이 사는 목욕탕 집 1층 셋 방에 살게 된다. 아무도 이경을 환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삼촌은 무허가로 벽돌을 찍어내 팔고 있다. 농협에 다니는 이모는 퇴근 후에는 영어 공부를 한다.‘나’는 시키지 않았지만 가족의 식사를 챙기고 빨래를 하고 매일 할아버지와 삼촌에게 점심 도시락을 챙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단을 가꾼다. 목욕탕집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화단.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널려있던 화단에 꽃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다.


아무도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 누구의 뱃속도 빌리지 않고 세상에 혼자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다. (38쪽)


목욕탕을 오가는 사람들, 1층에 세는 다른 이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오직 한 사람, 김치나 반찬을 들고 삼촌을 찾아오는 여자만 ‘나’에게 말을 건다. 이경이 궁금한 사람은 앞방 남자다. 높은 건물의 유리창을 닦는 남자, 남자의 열쇠 하나를 훔쳐 몰래 남자의 방에 들어가 남자가 누웠던 자리에 눕기도 한다. 심지어 이모의 지갑에 꺼낸 돈을 모아 남자의 밀린 방세를 내주기도 한다.


‘나’의 바깥 움직임은 할아버지와 삼촌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게 전부다. 다리 위에서 샛강을 바라보는 일, 괜히 기차역을 서성이다 셋방을 돌아온다. 그런 ‘나’에게 이모가 밖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사주며 ‘이경’이라 불러준다. 한 번도 다정하게 불러준 적 없기에 이상할 정도다. 그리고 이모는 집을 나갔다. 앞집 남자와 함께. 이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만 할아버지와 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모가 없었던 것처럼. 삼촌은 다락방에서 생활하고 술에 취해 집에 오던 할아버지의 외박이 늘어날 뿐이다. 그러니 삼촌이 다락방을 내려오다 부러진 사다리에 다쳐 입원을 한 사실을 나중에 안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에게만 집중했던 시선이 이번에는 이상하게 할아버지, 삼촌, 이모를 향했다. 조카에게 검정고시 교재를 사 준 이모, 엄마를 잃은 손녀에게 한 마디 위로를 건네지 않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도와 벽돌을 찍는 삼촌. 그들에게 가족은 보듬어야 할 존재가 아닌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일상적인 대화는 찾을 수 없다. 반복된 동선, 움직임은 그게 전부다. 동선을 벗어난 움직임은 사고가 된다. 이모의 가출, 삼촌의 입원,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


넷이었던 새 가족은 둘이 되었다. 아니다, 삼촌의 여자와 여자의 뱃속 아이가 있으니 다시 넷이다. 아무리 쌓아 올려도 무너지는 모래성 같았던 가족 대신 새로운 가족을 기대하게 만든다. 조경란은 절망이나 불행으로 채워진 회복 불가능한 가족을 그리는 듯했으나 궁극적으로 서로를 이어주는 가족을 말한다. 작지만 따뜻하고 환한 변화를 심어준다. 조심스럽지만 다양한 동선이 생기고 움직임은 확장될 거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아무려나 삼촌은 곧 아버지가 되고 나는 사촌을 얻게 된다. 꽃씨를 뿌를 때쯤 아기는 태어난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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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4-05-1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경란 작가 작품이군요! 조경란 작가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없어요. 그래도 아직까지 꾸준히 작품을 내고 있나봅니다. 근데, 전 조경란 작가나 서하진 작가는 재미가 없더라구요. 아무래도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리뷰 잘 읽었어요^^

자목련 2024-05-15 14:52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는 조경란 작가의 소설을 꽤 읽었는데 신간은 읽지 못했어요. 이 소설도 개정판이고요.
야무 님의 말씀처럼 동성이 아니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