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잡아라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9
솔 벨로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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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동생은 매주 복권을 산다. 복권을 살 때 내가 옆에 있으면 그중 하나는 나를 준다. 내 돈 주고 복권을 사지도 않으면서 그 복권이 당첨되었는지 은근 기대를 한다. 혹시나, 혹시라도 하면서 QR코드를 확인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동생에게 한 번쯤은 그런 일이 생기면 좋겠다고 바란다. 물론 동생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과거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렇다. 그저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기분으로 복권을 산다.


노벨 문학상 수장 작가 솔 벨로의 『오늘을 잡아라』 을 읽으면서 복권을 사는 마음이 생각났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찌질하다고 해야 하나, 안타깝다고 해야 하나, 주인공 윌헬름 때문에 그랬을까 싶기도 하고 소설을 발표한 1956년이나 지금이나 사는 게 내 맘대로 안 되는 게 인생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우리의 주인공 윌헬름을 마냥 응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44세의 중년 남자 윌헬름의 우유부단한 성격이 답답하기도 하고 어쩌자고 정신을 못 차리나 싶기도 하다가 오죽하면 저럴까 싶은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그도 인생이 이리 흘러갈 줄 몰랐을 것이다. 대학 때 배우가 될 줄 알고 학교를 그만두었지만 그에게 배우란 타이틀은 주어지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고 결혼생활에 충실했더라면 과거 배우 활동은 멋진 에피소드가 되었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현재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이혼도 못하는 상태로 집을 나와 아내에게 두 아들의 양육비와 생활비를 지금 해야 하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애인도 있다. 아내와 언제 이혼할지 알 수 없는 윌헬름를 언제까지 믿고 기다려줄지 모르지만.


회사를 그만둔 이유만 해도 그렇다. 기대했던 승진을 사장 사위에게 빼앗기고 회사를 나와버린 것이다.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박차고 나오다니. 어쩌면 윌헬름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로 의사인 아버지였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현직에서 물러난 아버지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아들에게 유산을 남겨줄 수는 있겠지만 현재로는 한 푼도 줄 생각이 없다. 그런데 이 두 부자 같은 호텔에 머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하루를 잘 알고 누굴 만나는지도 다 안다. 윌헬름는 자신의 경제 상황을 아버지에게 알리고 도움을 받을 기회를 엿보는데 호락호락하지 않다. 두 부자 사이를 아는 늙은이들의 말을 듣기도 싫고 자신을 아이 대하듯 잔소리하는 아버지도 싫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아들이 어울리는 탬킨 박사라는 작자가 영 수상해서 멀리하라고 해도 윌헬름은 통 들어먹지 않는다. 사기꾼이 분명한데 아들은 그걸 모르고 있다. 그러나 윌헬름은 탬킨 박사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의 화려한 언변과 확인할 수 없는 과거 이력에 이미 빠져 돈을 맡기고 선물 투자를 시작했다. 그들이 투자한 종목은 하락세를 보여 윌헬름은 돈을 빼고 싶은데 탬킨은 걱정하지 말라고 여유를 부린다. 탬킨 박사의 말은 구구절절 옳은 것처럼 보인다. 이 얼마나 공감가는 말인가.


“우리한테 과거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미래는 근심 걱정만 가득하고. 진짜는 현재뿐이야. ‘지금 여기 ’뿐이라고. 오늘을 잡아야지” (97쪽)


그럼에도 소설을 읽으면서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탬킨이 진짜 사기꾼이면 어쩌냐 싶어서 그의 느긋함이 의뭉스럽기까지 하다. 진짜 잘 아는 게 맞나 싶어서 제발 윌헬름에게 아버지 말을 듣고 정신 차리라고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한데 설령 말이 전해진다 해도 윌헬름이 결단을 내려야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의 진심도 모르는 아들이지 않은가. 그렇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누가 나 대신 선택과 결정을 하겠는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예상이 맞아떨아졌다. 탬킨은 사라졌고 윌헬름은 그를 찾아 나선다. 작정하고 달아났다면 어떻게 그를 찾겠는가. 복잡한 뉴욕의 수많은 인파 속에서 탬킨 같은 남자를 따라가다 모르는 이의 장례식장 안으로 들어간다. 한 남자의 장례식장에서 그는 오열하고 만다. 윌헬름이 무엇을 느꼈을지 알 수 없다. 그가 그 순간 얻은 깨달음을 알 수 없다.


눈물이 앞을 가려 제대로 볼 수 없는 윌헬름의 눈앞에서 꽃다발과 불빛이 황홀하게 어우러졌다. 바다처럼 웅장한 음악소리가 귀까지 차올랐다. 그는 눈물이 가져다주는 위대하고 행복한 망각의 힘으로 군중 한복판에 숨어들었지만 음악은 거침없이 그의 내면으로 쏟아져들어왔다. 윌헬름은 그 소리를 들으며 슬픔보다 더 깊게 가라앉았고, 애끓는 울음을 뚫고 마침내 무엇보다 절실했던 마음의 안식을 찾아 더 깊이 내려갔다. (172쪽)


이 모든 게 단 하루의 일이다. 그렇다면 윌헬름은 오늘을 잡지 못한 것일까. 잡은 것일까. 그가 남은 인생은 진짜 오늘을 잡고 오늘을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건 현재의 오늘을 살아가는 윌헬름에게도 해당된다.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오늘의 그것과 닮았고 투자 시장도 다르지 않다. 중년 남자의 고민과 윌헬름이 뉴욕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비슷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오늘을 사는 일, 녹록지 않다는걸. 인생이 그렇다는 걸 거듭 확인한다. 남동생은 이번 주에도 어김없이 복권을 샀을 것이다. 주말까지 확인할 수 없는 기쁨을 기대하고 누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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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자 2024-03-12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리뷰가 마치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아요 ....

자목련 2024-03-13 12:53   좋아요 1 | URL
달자 님,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나 연극으로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만 모르고 이미 나왔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