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걸려온 전화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잘못 걸려온 전화를 받는 일은 피곤한 일이다. 발신자는 계속 같은 질문을 하면서 확인을 하고 수신자는 한 번의 답으로 통화를 끝내고 싶기에 둘은 서로 완벽한 불통을 이룬다. 그럼에도 다시 또 전화가 오면 받을 수밖에 없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기에 바로 전에 전화를 건 사람일지라도 말이다.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는 스마트폰을 한 몸처럼 사용하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20여 년 전에 발표한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짧은 소설 25개가 수록된 『잘못 걸려온 전화』 속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아주 짧은 이야기는 인물의 성격이나 시대적 배경 같은 설명은 찾을 수 없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예고 없이 도착한 우편물 받는 기분이다. 하지만 절대 이상하지도 않고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같아 놀라울 뿐이다.


어떤 내용일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제목의 「도끼」를 시작으로 표제작인 「잘못 걸려온 전화」, 마지막 「나의 아버지」는 하나같이 불친절하면서도 익숙하다. 화자의 정확한 나이나 성별도 짐작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있지만, 그들은 모두 누군가를 닮았고 심지어 어떤 글은 나를 닮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니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하나 언급하는 것도 불필요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때로 고독하고, 외롭고, 분노하고 증오한다.


「도끼」속 남편이 침대에서 떨어져 머리에 도끼가 박힌 채로 죽음을 맞이한다. 아내는 전화를 걸어 의사를 부른다.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건 아내다. 하지만 아내의 주장대로 그냥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은가. 마치 죽은 자의 영혼이 안식처를 찾아 떠도는 것 같은 「나의 집에서」나 소모품처럼 공장에서 일을 하다 결국 암에 걸린 「어느 노동자의 죽음」은 고단하고 지친 삶의 끝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내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몹시 지친 상태일 것이다. 어떤 침대든 간에 아무튼 침대 위에서 잠이 들 것이다. 구름이 떠나가듯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는 방에서. 그런 식으로 세월은 흘러갈 것이다. ( 「나의 집에서」, 23쪽)






삶이란 예측할 수 없어서 선뜻 계획을 세울 수 없고 어떤 문제는 자신의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어 원하지 않는 협상을 해야만 한다. 도시의 작은 광장에서의 소음과 교통 체증을 뒤로하고 이사를 온 시골은 천국이었지만 곧 고속도로가 생기고 이전이 도시에는 화단과 쉴 수 있는 벤치와 어린이 놀이터까지 만들어진 「집」처럼 말이다. 도시를 떠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는 삶. 아, 내 뜻대로 살 수 있는 삶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이렇게 따지는 나에게 이런 문장으로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답한다. 인생이 원래 그런 거라고.


너를 두렵게 하고 너를 해칠 수 있는 유일한 건 인생이라는 것,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 「영원히 돌아가는 회전열차」, 112쪽)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모든 게 시시해질 때가 있다. 아무런 의욕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고. 애면글면 살 필요가 무언가 싶은 마음. 가족과 같이 지내도 그들의 생각을 모르고 가족을 모른 채 살면서 그들의 소식을 기다렸지만 정작 소식을 받자 멀리 떠나려는 이상하고도 알 수 없는 마음. 그래서 어떤 문장은 더 깊게 와닿고 어떤 문장은 절로 감탄하게 된다. 어쩌면 25개의 짧은 이야기는 세상은 그런 거라고. 산다는 거 별거 아니라고 살아보니 그렇다고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고백 같기도 하다. 세상은 부조리한 것투성이고 삶은 한순간이라고.


없어진 것은 단지 당신 일생 중 하루뿐임을. (「도둑」, 115쪽)


밖에는 인생이 있지만, 내 인생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를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 「나는 생각한다」, 140~141쪽)


손에 잡은 동시에 끝까지 술술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후련한 산뜻함으로 마무리할 수 없다. 잘못 걸려온 전화처럼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불편하거나 기분 나쁜 개운치 않음이 아니라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한 그런 마음이다. 잘못 건 전화라는 걸 알면서도 계속 전화를 걸 수밖에 없는 누군가, 그것을 단호하게 거부하고 거절하지 못하는 누군가, 그들이 우리의 모습인 것 같아서다. 그들 중 하나는 나일 것만 같아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4-03-06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모르는 번호는 안받는데 ㅋㅋ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작품은 재미있는거 같아요. 특히 예측할수 없는 이야기 ~!
전 아직 이 책을 안가지고 있는데 단편집인가 보군요 ~ 얼른 구매해야겠습니다 ~!!

자목련 2024-03-06 14:41   좋아요 2 | URL
저도 대부분은 안 받는데, 몇 차례 이어지는 번호는 이상하게 받고 나서 후회합니다. ㅎㅎ
새파랑 님 즐겁게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