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꽃 소년 - 내 어린 날의 이야기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다. 어떤 이는 지금보다 더 젊은 시절로, 어떤 이는 그리운 이가 존재하던 시절로, 어떤 이는 현재를 뛰어넘어 미래로 가고 싶을 지도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은 돌아갈 수 없기에, 닿을 수 없기에 그립고 애틋하다. 어쩌면 시인 박노해에게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살아계시던 어린 시절인지도 모르겠다. 『눈물꽃 소년』은 시인 박노해가 아닌 어린 소년 박기평의 이야기로 순하고 맑고 시린 글이라서 울컥해질 수밖에 없다. 시인의 어린 날의 이야기를 읽노 라면 어느새 내 어린 날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진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을 키워준 이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박노해 시인이 직접 그린 연필그림과 함께 짤막한 33편의 글은 우리를 모두 그 시절의 소년, 소녀로 이끈다.


“잘 몰라도 괜찮다. 사람이 길인께. 말 잘하는 사람보다 잘 듣는 사람이 빛나고, 안다 하는 사람보다 잘 묻는 사람이 귀인이니께.” (12쪽)


할머니의 심부름을 받은 어린 소년은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그 길을 간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디 가냐고 묻고 이것저것 말을 건넨다. 처음 가는 길이라 겁먹고 두려운 길을 물어물어 간다. 물어보면 된다고, 답하는 이의 말을 잘 들으면 된다고. 진한 사투리 가득한 그 시절을 나는 잠시 상상한다. 시골에서 자랐기에 소년 기평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내 할머니는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무서웠고 엄격했다. 기평의 할머니처럼 다정하고 손주를 위하는 분이 아니었다.


귀여운 기평의 일상을 쫓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그 시대의 아픔이, 곳곳에 묻어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자랐는가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알아서다. 그런 의미에서 소년 기평의 주변에는 사랑이 많은 어른이 많은 듯하다. 할머니, 부모님, 동네 어른들, 공소 신부님, 학교 선생님, 친구들까지. 꼬마 기평이 소년 기평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한 편의 동화처럼 예쁘지만 마냥 아름다울 수 없다. 우리 삶이 그렇듯이.


아버지와 단 한 번의 기차여행이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할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이들을 남겨두고 공장에 다녀야 했던 어머니.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흰 고무신이 소년을 기다렸다. 그 마음이 어떠했을지, 그 슬픔을 묵묵히 쌓아두었을 소년. 수업 시간엔 선생님께, 훈장 선생님께, 성당에서는 신부님께, 알 때까지 질문을 하던 소년. 선생님의 질타와 매에 부당함을 말하는 소년, 그 소년이 노동운동가, 저항 시인이 된 건 당연한 일이다. 형이 가져다준 시집을 읽고 시를 쓰는 모습을 상상하면 절로 흐뭇해지고 소년이 쓴 시를 읽으면 감동이 밀려온다.


폼을 잡고 시를 쓰다가, 홀로 웃고 울다가 책상에 엎드려 잠들던 그때. 그렇게 시가 내게로 왔고 그렇게 내가 시에게로 갔다. (159쪽)


고운 꽃이 피었다

높은 벼랑 끝자리에

나는 너무 작아서

까치발로 서 봐도

닿을 수가 없어

꽃들아 꽃들아

내 키가 자라기 전에

떨어지지 말아라 (191~192쪽)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 들과 산이 놀이의 전부였던 굴곡진 현대사를 체험한 시인이 들려주는 이야기. 첫사랑 소녀와의 이별은 아프고 외갓집에서 본 자전거를 타고 싶어서 저금통에서 몰래 동전을 꺼내 자전거를 빌려타던 모습은 깜찍하다. 그 시대에 자전거 대여라니, 생각도 못 했던 부분이다. 그런가 하면 졸업식날 할머니와 단둘이 사느라 농사일을 하며 매번 꼴찌를 하는 친구에게 외상으로 국밥을 사주는 호기로운 소년. 중학교에 올라가 신문배달로 외상을 갚았다니 기특하고 대견하다. 그곳에 내가 있었다면 칭찬을 하고 꼭 안아주고 싶다.


“사람의 이름은 말이다. 저마다 깨끗한 비원이 담긴 것이고 이름을 부르면서 그 뜻을 알려주는 것이제. 네 이름대로 네 길을 걸어가면 이미 유명한 사람 아니냐. 다른 사람 이름 가리지 말고, 제 이름 더럽히지 말고, 자기 이름대로 살면 그게 유명한 사람 아니냐. 알겄느냐. 평아, 이 유명한 놈아!” (220쪽)


꿈에 대해 어떤 사람이 될까 고민하는 기평에게 훈장 선생님의 말씀은 지금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내 이름으로 반듯하게 성실하게 살라는 당부. 박노해가 들려주는 어린 소년 기평의 이야기는 결국 소년, 소녀의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된 모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빠르게 변하고 쉽게 잊고 쉬운 것, 새로운 것만 쫓는 우리에게 말이다.


어린 나를 품어 기른 이들은 나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시대를 견뎌냈다. 그들이 내 안에 살아있다. 그들이 내 안에서 말을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걸 품은 위대한 역사적 존재다. 아무리 오늘이 힘들어도, 다시 고난이 닥쳐와도, 그래도 우리는 살아왔고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다. (「작가의 말」, 247~248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서괭 2024-02-26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 이름대로 살면 유명한 거라는 말씀!! 좋네요. 기억해 둬야겠어요^^

자목련 2024-02-28 15:04   좋아요 0 | URL
그죠? 그런 의미로 독서괭 님의 이름을 불러드립니다.
독서괭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