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7
알랭 로브그리예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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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이건 뭐지? 하는 소설을 만난다. 놀람과 감탄의 연속이라고 할까. 알랭 로브그리예의 소설 『진』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도대체 나는 소설을 제대로 읽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드는 거다. 읽다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하나,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그게 소설의 흥미를 떨어뜨린다는 건 아니다. 다만,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정도라고 할까. 아무튼 『진』은 매우 독특한 소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소설은 알랭 로브그리예가 미국 대학생들을 위한 교재로, 그러니까 프랑스어 문법을 위한 교재로 쓴 텍스트로 시작한다. 아, 물론 프랑스어를 공부하지도 않고, 원서로 읽을 일이 없는 나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 이야기에만 집중해도 상관없다. 그런데 그 이야기라는 것이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는 거다. 소설 중간에 시점도 알라지고 시제도 달라져서(아, 교재라서 그랬던 걸까?)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뭔가 비밀스러운 장면이 계속 이어져 독자를 그 비밀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제 소설을 이야기해 보자면 젊은 남자 '시몽'이 구인 광고를 보고 면접을 보러 어느 장소에 도착했다. 면접을 보기 위한 공간이라고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곳에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을 '진'이란 이름의 여자로 자신의 지시에 따르라고 한다. 그 지시도 모호하다. 파리 북부역으로 가라는 것뿐. 역으로 향하던 시몽은 어느 건물에서 나온 소년이 쓰러진 장면을 목격한다. 소년이 죽은 줄 알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몽 앞에 ‘마리’란 이름의 소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소년이 죽지 않았다고 알려준다. 소녀의 말대로 깨어난 소년의 아름은 ‘장’이다. 마리와 장은 시몽을 인도하는데, 이상한 건 시몽이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독자인 나도 뭔가에 홀린듯하다.


정신을 추스르려고 무진 애를 쓴다. 내가 아직 처박혀 있는 어둠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더욱 힘겹게 할 뿐 아니라, 잠에서 깼다는 사실 자체를 불확실하게 만든다. 내가 잠에서 깨는 꿈을 꾸는 동안은 그 잠이 연장되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시간에 대한 최소한의 관념조차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다. (60쪽)


계속해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장이 이끄는 대로 눈을 가리고 택시 비슷한 걸 타고 낯선 장소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기억을 잃는다. 그리고 같은 장소에서 깨어나고 그곳에서 마리를 만나는데, 그녀는 이미 죽었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아니, 이건 도대체 뭐지? 1981년에 쓴 소설이 SF 소설이었나? 과거의 기억 한 장면, 같은 장소 다른 인물, 환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다.


점진적으로 기억이 희미해지고……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기억은 내게서 점점 더 멀어져…… 마지막 불빛, 조금만 더…… 그러나 아무거도 없다. 결국 짧은 환생에 불과할 터. 많은 이들처럼 내게도 빈번한, 덧없이 생생한 그 느낌을 나는 잘 안다. 이른바 미래의 기억이라 부르는 현상. (91쪽)


시몽은 그대로인데, 마리와 장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존재로 등장한다. 어쩌면 나는 소설을 잘못 읽고 있거나 잘 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소설을 계속 읽고 멈추지 않는 이유는 시몽이 맡은 임무가 무엇이며 진이 누구인지, 진의 실체가 궁금해서다. 면접 장소에서 진과 함께 등장한 마네킹, 눈을 가리고 도착한 곳에서 자신과 같은 모습(선글라스를 끼고 지팡이를 든)을 한 수많은 남자, 그들에게 조직에 대해 설명하는 목소리.


그나마 안도하는 건 8장(그렇다. 이 소설은 모두 8장으로 구성되었다.)에 등장하는 ‘나’다. 나의 이름은 '진'으로 '시몽'이 면접을 보러 온 장소에서 시몽과 만난다. 맞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 장소, 소설의 처음이다. 프롤로그부터 7장까지 실재가 아닌 환상 같았다면 8장은 그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이라 할 수 있는 진짜 소설이라고 할까. 하지만 의심을 거둘 수 없다. 마지막에 등장한 진은 진짜 진일까. 그녀는 소설 초반에 등장한 마네킹일지도 모르고 어린 마리의 다른 버전일지 누가 알겠는가. 중절모를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표지의 인물이 분명 진이라고 생각하다가 진짜 그럴까 의심한다.


실험적인 소설이다. 내게는 그렇다. 짧은 분량에 물음표(?)와 느낌표(?)가 가득하다. 미스터리, 타임슬립, 추리소설,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소설이니까. 같은 듯 다른 이미지로 변모하는 인물, 하나의 공간을 다채롭게 활용하는 능력으로 미로 같은 소설 속에 독자를 꼼짝 못 하게 만든다. 이상한 건 그게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더 복잡한 미로를 경험하고 싶은 매력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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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4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가 모호하군요 ㅋ 자목련님 리뷰 읽어보니 어라? 읽어볼만 할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ㅋ

자목련 2023-12-15 12:11   좋아요 1 | URL
모호하지만 지루한 모호함은 아닌.
새파랑 님, 즐겁게 만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