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의 장면들 - 마음이 뒤척일 때마다 가만히 쥐어보는 다정한 낱말 조각
민바람 지음, 신혜림 사진 / 서사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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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힘들고 지칠 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은 대단하다. 달래는 정도가 아니라 괜찮은 상태로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가 아니니까. 어떤 이는 지나간 과거에 오래 매달려있고 어떤 이는 사람들과의 부침에 힘겨워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괴롭다. 『낱말의 장면들』 의 저자도 다르지 않았다. 마음이 힘들고 관계에 지치고 아픈 몸과 함께 살아가는 게 고달팠다. 그럴 때마다 저자는 사전을 찾았다. 잘 알려지지 않고 많이 쓰지 않는 순우리말을 외우고 마음을 기댔다. 그렇게 자신만의 단어를 만들었다. 그런 단어들이 주는 힘을 일상과 함께 녹여낸 글이 모인 책이 『낱말의 장면들』이다.


이런 발상을 하다니, 색다르고 특이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금세 그런 마음은 사라졌다. 차분하고 가만하게 들려주는 일상과 그에 맞는 낱말의 어울림에 스며들었다. 지친 마음을 쓰다듬고 나아갈 길을 열어주고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낱말은 저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어서 그랬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감정들, 치료하지 못하고 내버려 둔 상처들, 서로가 다른 게 당연한데도 부딪히는 마음들에 대한 조용한 고백이라고 할까.


어떤 사람은 순간 감정을 바로 다른 감정으로 바꿀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다. 혼자 삭히느라 끙끙대는 동안 감정은 더 크게 곪아간다. 자기 마음의 문지기란 저자의 표현에 공감하며 나는 문을 얼마나 열고 닫았는가 돌아보게 된다. 한 번 닫히면 끝까지 열리지 않는 마음의 문을 지닌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사람은 자기 마음의 문지기다. 스스로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감정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머문다. 제대로 느끼고, 표현하고, 일찍 보내줘야 병이 되지 않는다. 부정적 감정을 쉽게 통과시키지 않는 마음은 긍정적 감정 앞에서도 문을 활짝 열지 못했다. (31쪽)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를 하고 대학교에서도 교수를 돕는 업무를 본 사람을 떠올리면 소심보다는 당당한 이미지가 따라온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이 정한 일상을 지키느라 힘들었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선을 넘어도, 기준이 무너져도 큰일이 생기지도 일상이 무너지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번쯤 그런 경험이 있어야 별일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더 좋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것도 아니라는걸.


마음에도 흐트러진 공간을 두려 한다. 불만족을 하나하나 붙잡아 바꾸려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땅으로 나를 들여놓는 연습을 한다. 더 좋은 것, 더 나은 것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이 멀어지기를 바란다. (63쪽)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기쁨과 감동을 느끼는 순간도 아주 작고 사소한 순간이다. 저자가 지난번에 놓친 과일 트럭 아저씨를 만나 맛있는 제철 과일을 사서 먹는 것처럼 단순하다. 성장은커녕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여겨질 때 뒷걸음질 치지 않고 제자리걸음이 앞으로 나갈 준비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견디는 시간만큼 곰비임비 쌓이는 게 있으니까. 그건 어떤 업무나 계획에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어떤 생각과 결정을 내릴 때도 마찬가지다. 실수나 실패란 경험이 있어야 같은 경험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깨단한 것들로 배우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싶다.


반복된 어리석음만큼 깨단한 것들이 쌓이면, 어느 순간부터는 삶의 무게중심이 되어줄 것이다. 무게가 묵직한 아픔이 되기도 하지만, 남은 삶에서 균형을 잃지 않게 도와주기도 한다. 주변에 아픔 대신 살아에 가까운 감정들을 옮길 수 있게. (128쪽)


책에서 마음 깊숙이 다가오는 부분은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후각장애를 갖고 계신 아버지와의 만남에서 저자가 느끼는 마음, 본가에 갈 때마다 엄마와 다투고 돌아오는 속상함. 가장 가깝다고 여기고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한 사이, 바로 가족이다. 적당한 거리의 맞은바라기에서 서로를 보고 있다면 더 잘 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가까이 있어서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일 것이다. 더 선명하고 더 환하게.


저자의 마음을 따라 읽으면서 그가 들려주는 곱고 다정한 낱말에 사로잡힌다. 얼마나 성실히 정성껏 고르고 골랐을 낱말일까 상상한다. 이전에 몰랐던 낱말이 반갑게 건넨 인사가 반갑다. 나만 아는 나의 낱말 목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상에 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는 이에게 가만한 위로를 건네준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단순하고 편안하게 이끄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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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11-14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아주 오래 전에 낱말의 뜻을
모를 적에 아버지 책장에 있던
두터운 국어사전 찾던 기억이 나네요.

자신만의 단어로 치유를 하다니 발상
이 참신하네요.

자기 나름의 패턴을 지키는 일도 사실
일상에서 쉽지 않나 싶네요.
게다가 더 좋은 것이 행복으로 귀결되
지 않는다는 것도 새로운 깨달음이구요.

이건 뭐 거의 덤으로 책을 한 권 읽은
그런 느낌이네요. 마음은 항상 복잡하고
어지러운 그런 어딘가에...

자목련 2023-11-16 14:41   좋아요 1 | URL
제게도 국어사전을 뒤적이며 낱말의 뜻을 찾고 기억하려 애쓰던 시절이 있어요.
자신을 위로하고 달래는 방법을 안다는 것만으로 차분한 마음의 길에 접어들 수 있겠다 싶어요.

비가 오는 목요일, 매냐 님의 마음이 평온하게 머물기를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