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연보를 읽는 것으로 『디 에센셜 김수영』를 시작했다. 한 사람의 삶을 시간순으로 순차적으로 정리한 글 안에서 김수영은 태어났고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랐다. 총명하고 아픈 아이로 시작한 연보는 가장 들끓던 지식인, 쓰기를 멈추지 않던 젊은 시인에게 찾아온 죽음으로 끝났다.


나와는 한 줄의 시간도 겹치지 않은 시간을 살다간 시인의 시를 언제 만나고 알게 되었던가. 만났다는 말은 우습다. 김수영의 시는 솟대같이 우뚝 서 있었고 어디서든 우리는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풀」은 뭐랄까. 어떤 상징으로 이해했고 잘 모르면서도 중얼거렸다. 아마도 학창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저 암기의 수순으로 기억한 시구절. 『디 에센셜 김수영』에서 천천히 다시 읽은 그의 시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웠고 사실적이면서도 풍부한 은유로 가득했다.


우리의 음악은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음악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 시를 배우던 시절로 돌아가 하나하나 그것을 파헤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음악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자’나 ‘나의 음악이여 지금 다시 저기로 흘러라’ 같은 구절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건 무엇일까. 시로 말하고 외치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음악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자

저무는 해와 같이

나의 앞에는 회색이 뭉치고

응결되고

또 주먹을 쥐어도 모자라는

이날에 또 어느 날에

나는 춤을 추고 있었나 보다

불이 생기어도

어젯날의 환희에는 이기지 못할 것

누구에게 할 말이 꼭 있어야 하여도

움직이는 마음에

형벌은 없어져라

음악은 아주 험하게

흐르는구나

가슴과 가슴이 부딪치어도

소리는 나지 않을 것이다

단단한 가슴에 음악이 흐른다

다리도 없이

집도 없이

가느다란 곳에는 가시가 있고

살찐 곳에는 물이 고이는 것이다

나의 음악이여

지금 다시 저기로 흘러라

몸은 언제나 하나이었다

물은 나의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누구의 음악이 처참스러운지 모르지만

나의 설움만이 입체를 갖고

떨어져 나간다

음악이여 ( 「음악」, 전문)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자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 「봄밤」, 일부)


오랜 시간 손에 잡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속도가 나지 않는 책이었다. 어쩌면 집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산문에서 김수영이 느꼈을 시에 대한 고민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학인의 역할로 고뇌하는 그 심경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어찌 알겠냐만 그래도 솔직하게 건네는 산문으로 그가 글 쓰는 일을 어떻게 여겼는지 미세한 떨림의 깊이 정도는 가늠하고 싶었다. 그의 내면을 흔들고 부서졌다가 채우기를 반복하는 그 마음의 조각, 혁명의 시대에 폭발하듯 써 내려간 시와 그 안에 담고자 했던 자유를 말이다. 읽기의 한계는 언제나 빨리 도착한다. 산문에서 한 번씩 멈추고 말았다. 포로수용소의 기록, 닭을 키우던 일, 박인환의 마리서사, 번역에 대한 생각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나는 알 수 없는 그 시대와 현재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김수영이란 시인이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


수동적으로 불안을 받아들이느니 보다는 불안 속에 뛰어 들어가 불안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괴로움이 적은 일이요 떳떳한 일같이 생각이 들었다. (산문 「내가 겪은 포로 생활」중에서)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 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산문 「이 거룩한 속물들」중에서)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산문 「독자의 불신임」중에서)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기란 더욱 어렵겠지만 이런 따뜻하고 좋은 시 앞에서는 멈추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그 파밭의 푸른색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다. 붉고 푸른 이미지가 전하는 게 반복되는 사랑과 상실이라고, 우리네 삶이라고 믿고 싶다.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다는 것이다


새벽에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파밭 가에서」, 전문)


김수영을 읽는 일은 그의 생애를 알고 그의 문학세계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서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 산문, 일기, 미완성의 소설을 읽는 읽은 우리가 보지 못한 지난 시대를 읽는 일이고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같은 듯 다른 시대가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같다. 그것이 정치든 문학이든 말이다. 반복되는 시행착오, 고뇌하는 이들, 영혼을 탐구하고 균형과 조화가 아름다운 시대를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은 한결같아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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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4-2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계란 먹고 싶.. 따끈한 거 호호 불어서 ㅋㅋ 이제는 넷플릭스에서보는 지구 반대편 이야기가 김수영의 시절보다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네요. 디 에센셜 좋은 기획같아요! 😀

자목련 2023-04-21 12:24   좋아요 0 | URL
바글바글 냄비에 계란 삶아 공쟝쟝 님께 보내고 싶네요. 어렵지만 디 에센셜, 저도 좋은 기획 같아요. 맞아요, 화면에서 처음 보는 사람도 반갑게 느껴지는데 정작 현실의 사람들은 왜 이리 멀까 싶고요. 코로나 19로 멀어진 마음과 관계가 회복되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맛난 점심 드시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