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사계절로 비유하는 일은 진부하지만 그것만큼 인생의 시기를 잘 표현하는 말도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모두에게 획일적인 계절을 대입하는 건 좋지 않다. 나만의 시간이 있고 나만의 계절이 있으니까. 지금 어떤 계절을 살아가고 있는지 아는 이는 오직 한 사람, 자신뿐이다. 살다 보니 별일을 다 겪고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상을 살아가는 일, 그게 인생이라는 걸 느낀다. 그러나 여전히 인생을 아는 일은 어렵고 꿋꿋하게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어린 시절에는 그냥 늙는다고 여겼다. 나이를 먹으면 저절로 어른이 되고 뭐든 막힘없이 다 해결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이라는 걸 조금씩 배우고 깨닫는다. 최근 친구들과 통화를 하면서 사는 게 참 어려운데 그 시간을 견디고 살아낸 할머니들이 대단한다는 말을 자주 한다. 70대 중반에 그림을 그리리 시작한 모지스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를 통해서 나는 알지 못하는 인생의 비밀과 감사를 만난다.


역사의 기록에서나 만날 시대, 1860년에 태어나 결혼해서 10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다섯 명만 키우고 70세 이후에 그림을 그리면서 유명해진 그녀는 93세에 <타임> 표지 장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100세에는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지정까지 받았다. 그런 할머니의 말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기사, 인터뷰, 구술, 편지를 통해 모은 할머니의 말들을 한 권의 책으로 만났을 때 솔직하고 평범해서 놀라고 긍정적인 태도에 위로를 받는다. 인생의 질문에 해답 책처럼 아무 곳이나 펼쳐도 명쾌하게 답을 제시한다고 할까. 아마도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간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도전과 시도는 대단한 결심 이후에 시작되어야 할 과정 같지만 “일단 해보면 되겠지요”란 할머니 말엔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는다. 해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핑계와 변명을 내세우는 내 모습이 부끄럽다. 까짓것, 해보고 안 되면 말지, 하는 마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바탕 시원하게 웃고 나면 그 힘으로 또다시 살아갑니다”란 말은 왠지 호통과도 같이 들린다. 한바탕 시원하게 웃었던 때가 언제였나 싶은 거다.


모든 삶이 그렇듯 언제나 좋은 시절, 좋은 기억으로 생을 채울 수는 없다. 알면서도 우리는 때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시절에 머물곤 하다. 그냥 지나간 대로 두지 못해서 안달을 내기도 한다. 그러다 이런 할머니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다.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을 두 번이나 겪고 아이를 잃은 상실과 함께 101세까지 살아온 할머니도 있는데 고작 나의 슬픔에 매몰되어 상처에 전착하다니.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렇게.

살다 보니, 실망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불평하지 말고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그렇게 흘러나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27쪽)


어떻게든 삶은 계속되고 우리는 살아간다. 3년 전의 봄은 마스크 한 장에 울고 자가격리와 코로나 확진에 대한 공포로 무너진 일상이었지만 지금 우리는 마스크를 벗고 봄을 맞는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튀르키예 지진으로 많은 이들이 생명을 잃었다. 고공행진하는 물가와 어려운 살림살이로 하루하루 사는 게 버겁지만 할머니의 말처럼 감사할 것들은 차고 넘친다.


하지만 감사할 일은 너무도 많습니다.

추수감사절에는 웃음꽃이 피어나는 집이 있는가 하면 슬픔에 잠기는 집도 있습니다. 하지만 감사할 일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과 풍요로움에 감사해야겠지요. (210쪽)


이렇게 귀한 말을 읽고 그것을 기록하고 나눌 수 있는 것도. 101살이라는 나이, 나는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알 수 없는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삶은 아름답다는 걸 이제 나는 안다. 잘 사는 게 뭔지 모르지만 잘 살아야지 싶다.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의 봄에는 할 일이 참 많습니다』를 읽다 보니 생각나는 할머니가 있다. 모지스 할머니처럼 101세까지 산 실존 인물이 아닌 일흔넷의 소설 속 할머니. 젊은 할머니라고 해야 할까. 와카타케 치사코의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속 일흔넷 모모코 할머니. 남편은 죽고 자식은 분가했다. 말 그대로 홀가분하게 산다. 자식과 즐겁게 소통하지 않는다. 조금은 쓸쓸하게 혼잣말을 하고 스스로와 대화한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고 자신과 닮은 이들의 모습을 관찰한다.


모지스 할머니의 활기 넘치는 모습과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할머니의 모습은 곧 우리가 마주하는 미래의 모습이 될 수 있다. 누군나 늦은 나이에도 뭔가 시작하고 하루하루 신 나게 살겠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으니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낸 할머니들, 그 나이가 거저 오는 게 아니라는 걸 주변의 어르신을 통해 느낀다.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속 모모코 할머니처럼 혼자서 남은 생을 살아야 하는 이들도 많다. 어떤 삶이 더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수 없다. 삶이란 각자의 못이니까. 정반대의 모습이라 할지라도 누구 하나의 삶을 응원하는 쪽 아니라 모든 삶을 응원한다. 나 역시 그 삶 가운데 하나로 살아갈 테니까.


수많은 모모코 씨가 있다. 수많은 모모코 씨가 간다. 모모코 씨가 모모코 씨의 어깨를 끌어안고, 손을 끌어당기며, 등을 밀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그 길이 얼마나 따듯하던지. (『나는 나대로 혼자서 간다』, 138쪽)


주어진 하루가 버겁고 다가올 내일을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루를 맞았고 주어진 하루에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내가 살아가는 인생이 도달할 계절을 그려본다.아직은 봄이라고 우겨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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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먼지 2023-04-14 10: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글 읽으면서 노년의 삶을 기록한 또 다른 여성작가가 누가 있을까 떠올려봤는데 소노 아야코도 있네요!! 이 할머니는 조금 까칠하신 편!! 인용해주신 부분을 그냥 읽었으면 제가 좀 삐뚤게 받아들였을 것 같은데 미리 모지스 할머니의 인생을 설명해주셔서 모난 마음을 가라앉히고 곱씹어보게 됩니다!! 인생의 계절이 봄부터 시작하진 않는 것 같아요!! 제겐 겨울부터 온 것 같은데 그래서 지금이 봄입니다❤️

자목련 2023-04-17 09:54   좋아요 1 | URL
소노 아야코 검색해 보고 알았어요. <약간의 거리를 둔다>로 만난 작가였는데 1931년생인 줄 몰랐어요. 책먼지 님의 봄을 응원합니다. 활기차고 환할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