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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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이라는 말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절, 터미널 근처의 여관에서 엄마와 하룻밤을 보냈다. 낯선 도시의 지리를 몰랐던 엄마와 나는 여관 주인의 도움을 받아 아침을 배달시켰다. 정확하게 무얼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2인분이 아닌 1인분이었다는 사실만 생각났다.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자취방을 구하러 나선 길이었다. 엄마는 방을 구하지 못하면 시골의 고등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했다. 나도 그러마했다. 다행이지 불행인지 골목에서 나와 같이 방을 구하는 여자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를 만났고 우리는 즉흥적으로 동거인이 되었다. 주인집 거실에 난 계단을 지나야만 하는 옥탑방에 방을 구했다. 보증금은 따로 없었고 사글세였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기억이었다. 


징글징글한 애착은 아니더라도 엄마와 나 사이에 적당한 애착이 필요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비비언 고닉의 엄마처럼 사랑을 신봉하고 남편의 죽음에 식음을 전폐하는 모습은 엄마에게 찾을 수 없다. 그럴 수도 없는 게 엄마가 먼저 돌아가셨다. 엄마와 싸운 기억이 별로 없다. 고교 입시와 대학 때만 내가 원하는 대로 고집을 부렸을 뿐, 엄마도 나를 상대로 욕을 하거나 매를 들지도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게 너무 속상하다. 큰 소리를 내거나 화를 내지 않은 엄마는 조금씩 스스로를 갉아먹었을 게 분명하다. 할머니 때문에 그랬을까, 참고 살기만 한 엄마를 향한 마음은 그리움이지만 당시 애틋하고 애절함은 없었다. 그러나 십 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알았다. 언젠가는 엄마와 분리되었을 텐데, 그 시기를 늦추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걸 말이다. 


모든 모녀 사이에는 애증이 존재한다. 그런데 나는 그 타이밍을 놓쳤다.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 삼고 살았던 비비언 고닉의 모녀의 일상을 지켜보는 일은 부러움과 즐거움의 연속이었다. 그건 고닉이 그만큼 글을 잘 썼기 때문이다. 1987년 공동주택의 한자리에 나는 착석했다. 침대에 누워 울부짖는 엄마와 창틀 난간에 기대어 밖을 내다보는 고닉의 모습. 고닉의 집을 오가는 이웃들. 그들의 면면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고닉의 엄마는 그곳에서 모든 걸 다 아는 듯한 표정과 말로 사람들을 압도한다. 같은 아파트에 살면 동지의식이 생기는 것처럼 고닉의 엄마와 그네들도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고민을 토로하는 반면 험담도 오갔다. 당연하다. 사람 사는 건 다 그런 거니까.





노년의 어머니와 중년의 고닉이 뉴욕의 맨하튼, 브롱스로, 윌리엄스버그를 산책하면서 여전히 아웅다웅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나도 변한 게 없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현재에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이동하는 두 모녀의 대화는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시간을 생생하게 구연하는데 어떻게 그 모든 걸 기억할 수 있을까 놀라울 정도다. 길에서 만난 노숙자나 오랜만에 만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동네 친구까지. 그들과의 에피소드는 새로운 이야기이면서 다른 삶이다. 그것은 고닉이 성장하는 과정이자 삶의 가치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엄마와의 대립과 갈등은 당연하다. 고닉을 대학에 보내는 것에 대해 당당했던 엄마가 고닉이 대학을 나와 교사가 되지 않았을 때 보이는 반응은 익숙하다. 뼈가 빠지게 뒷바라지해서 대학을 보냈더니 번듯한 곳에 취직도 못하는 자식을 어처구니없게 대하던 우리 부모 세대와 다르지 않다. 


그러니 그들과는 전혀 다른 외국인 화가와 결혼을 선언한 딸에게 과연 좋은 소리가 나오겠는가. 고닉에게 그 결혼은 일종의 반항이자 독립선언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엄마의 반대는 가히 옳았다. 엄마가 말하는 사랑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뻔한 이야기지만 결혼은 현실이고 스물넷의 젊은 부부의 열정은 조금씩 균열이 생기지만 모른 척 시간을 끈다. 죽은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끝없는 사랑이 고닉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왜 자신이 음식을 해야만 하는지, 남편은 일요일에도 그림을 그리는지, 자신과의 산책이 왜 어려운지, 고닉은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들의 헤어짐은 예상된 결과였다. 


고닉의 엄마는 고닉을 키우고 만든 게 자신이라고 여겼지만 고닉을 변화하고 만든 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고닉이 공부하고 문학을 읽고 경험하고 고민하고 당도한 것이다. 물론 가장 기본적인 큰 틀은 엄마라 할 수 있다. 유대인 이민자로 미국에서 정착하며 살기란 얼마나 버거웠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배운 딸이, 작가가 된 딸이 자랑스럽지만 딸에게 주어진 환경이라면 자신은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마음, 그게 엄마의 솔직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고닉과 산책하다 만난 고닉의 친구가 호모섹슈얼이라는 말에 “사람들은 각자 자기 삶을 살 권리가 있지.”(95쪽)이라고 말하면서도 딸이 권한 전기를 읽으면서 “나는 삶으로 다 살았어. 나는 다 안단 말이다.(113쪽)라며 화를 내는 모습을 돌아가신 내 엄마로 이입하려는데 쉽지 않다. 나는 그만큼 나의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사소하거나 중대한 문제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길게 나눠본 적이 없다. 어떤 문제는 시대적 흐름에 이미 답이 정해져 있었고 사소한 것들은 사소해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만약 엄마가 살아 계시다면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게 될까. 어디가 아프다는 말이나, 동네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의 남의 집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니까. 아니, 모른다. 우리는 좀 더 은밀하게 동네 아줌마나 어린 시절 친구에 대한 소문을 전할지도 모르고 어젯밤에 본 드라마 줄거리나 정치에 대해 언급할지도 모른다.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시간이기에 나는 그 시간을 상상하는 일이 서럽고 아프다.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300쪽)란 엄마의 말에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301쪽)라고 답하는 고닉.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301쪽)라고 말하는 엄마. 모녀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는 시간도 온 것이다. 함께 인생을 말할 수 있는 사이, 가장 가깝고 먼 관계. 그들은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내게 없는 관계라는 게 서글프게 다가온다. 사나운 애착은 끈끈하고 숭고한 연대가 되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301쪽)


내 앞에 고닉이 앉아 묻는다. 잘 읽었어, 어땠어?라며 답을 기다린다. 치열하게 살아온 고닉의 생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지만 순간 엄숙해진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 사랑과 일 앞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을 눈부신 모습에 숙연해진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자신 안의 공간을 확인하고 확장시킨 고닉. 그 공간이 만들어낸 매혹적인 이야기를 갈망한다고 나는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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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3-11 10: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끄아아앙 정말 다들 비비언 고닉 읽고 글써주는 거 너무 좋다!!! 🥹 자목련님은 엄마와 빨리 분리 되셨군요? 저는 아직도 분리 중…. 😩😩😩😩😩😩

자목련 2023-03-11 15:10   좋아요 1 | URL
이렇게 읽어주고 댓글 달아주는 쟝쟝 님이 있어 진짜 좋다!!
아무것도 모르고 분리되었고, 그리고 얼마 후 영원히 분리되었어요. 쟝 님의 분리 속도는 적당한 것 같아요^^

공쟝쟝 2023-03-17 07:28   좋아요 0 | URL
... 영원한 분리라니요... ㅜㅜ 목련님 이렇게 훅 들어오시면 ㅜㅜㅜㅜㅜㅜㅜㅜㅜㅜ 시러요 ㅠㅠㅠㅠㅠㅠㅠ 저 분리안될래요ㅠㅠㅠㅠ

자목련 2023-03-17 09:34   좋아요 1 | URL
식상하고 뻔한 말이지만 엄마랑 많은 시간 보내세요.
맛나는 것도 먹고 좋은 곳도 보고 잠도 많이 자고요. 돌아가시면 모든 게 후회이고 그리움이에요. ㅠ,ㅠ

솔뫼 2023-03-2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번역자인 줄. 참 잘 쓰셨는데 그림도 자화상인가요?

자목련 2023-03-22 09:00   좋아요 0 | URL
솔뫼 님,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자화상은 아니고 제가 좋아하는 그림입니다.
향기로운 하루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