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당신에게
이주혜 지음 / 에트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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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컥하면서도 자꾸만 다짐을 하는 순간이 많았다. 무엇을 다짐하는지, 명확하게 설명하긴 힘든데 이 책을 읽는 이라면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흐르는 대로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한다. 이주혜가 번역한 책을 먼저 읽었지만 어려웠다. 좋아하는 작가 황정은의 추천이 없었다면 나는 이주혜의 소설과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번역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장편소설 『자두』에서 그가 번역한 책의 인물이 등장했고 살짝 소름이 돋았다. 


엘리자베스 비숍의 인생을 말해주는 시로 시작하는 글에서 나는 가만히 어린 비숍을 마주한다. 생후 8개월에 아버지를 병으로 잃고 정신질환으로 어머니마저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다섯 살 소녀는 외가에서 지낸다. 하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강제로 친가로 보내진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이별과 만남, 손녀를 보내야 하는 외할머니의 담담한 슬픔. 훗날 그날의 풍경과 감정은 고스란히 비숍의 시가 된다. 


그렇게 될 일이었어, 마블 난로가 말한다.

나는 내가 아는 걸 알아, 책력이 말한다.

아이는 크레용으로 견고한 집을 그린다.

구불구불한 오솔길도, 이윽고 아이는

눈물 같은 단추를 단 남자를 그려 넣고

자랑스레 할머니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할머니가 난로를 살피느라 

분주할 동안, 아무도 모르게, 

작은 달들이 눈물처럼 떨어진다.

책력의 책장 사이에서 

아이가 집 앞에 꼼꼼하게 

그려놓은 꽃밭 위로.


눈물을 심을 시간이란다, 책력이 말한다.

할머니는 신묘한 난로에 맞춰 노래하고

아이는 수수께끼 같은 집을 하나 더 그린다. (비숍의 시 「세스티나」 중에서)





내가 주목한 건 아이가 집 앞에 그려놓은 꽃밭에 작은 달들이 눈물처럼 떨어지는 장면이다. 나와 함께 이 장면을 목격한 책력은 말한다. 눈물을 심을 시간이라고. 눈물은 떨어지지만 동시에 심어진다. 당신, 눈물을 심은 자리에서 무엇이 싹틀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23쪽)


내가 심은 눈물은 무엇이 되었을까. 셀 수 없이 떨어진 눈물들, 몇 개의 눈물이 싹을 틔웠을까. 그 눈물이 나를 키우고 내가 될 거라는 걸 나는 알았을까. 누군가 지겹다고 생각했을 눈물, 눈물을 닦고 아무렇지 않게 표정을 짓는 연습을 했을 시간이 우리에겐 있다. 말하지 않아도, 나의 눈물이 당신의 것과 같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연대는 시작된다. 이주혜의 글을 읽는 이들이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처럼.


눈물을 심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깨진 거울을 겁내는 우리에게 나는 오늘 화환처럼 무지개를 걸어주고 싶다. 산다는 게 다 그렇다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고 그런 날을 살아내느라 오늘도 모진 애를 쓰고 있으므로. (45쪽)


그렇고 그런 날이라고 해서 대충사는 이는 없다. 어떻게든 스스로를 껴안고 인정하며 나가길 바란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이는 대로만 말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여성에게 그런 시선은 집중된다. 시어머니가 소개할 때 이주혜는 집에서 노는 며느리였고 아이들에겐 일하는 엄마였다. 번듯한 직장에 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는 정체성이 사라진 존재로. 나란 존재를 증명하는 이는 누구인가. 가족, 친구, 사회,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어느새 움츠려든다. 그럴 때마다 이주혜가 쓰고 기록한 것처럼, 나도 읽고 나만의 글을 쓴다. 그림을 그리던 비숍이 글을 읽고 여행하며 성장한 것처럼,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발견하고 성장하기를 원한다. 


정전은 다시 쓰여야 한다. 내겐 당장 어머니와 딸이라는 책이 필요하다.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조력자와 서당 개 역할만 주어진 채 그들만의 서당을 얼쩡거렸던 우리만의 서사가 필요하다. 죄책감을 먹고 자란 서당개의 날카로운 송곳니로 고루한 책들을 실컷 물어뜯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그리고 새롭게 한 글자 써 내려가고 싶다. (90쪽)


태어나는 순간 여자라는 이유로 삶에서 제외당했던 어머니, 마치 그게 당연한 것인 양 알고 받아들였던 우리의 과거. 세상에 당연한 건 없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세뇌당했을까. 이름조차 없었던 삶, 아들이 아닌 딸을 낳고 불행한 어머니는 책 속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를 낳은 엄마도 그랬다. 장손을 낳았음에도 남동생이 태어나기까지 내리 세 명의 딸을 낳은 엄마의 시간을 감히 짐작할 수 없다. 모든 것이 아버지와 남자 형제 위주였기에 어린 나는 남동생을 챙겨야 하는 게 정말 싫었다. 어른이 되어야 제법 많은 나이 차가 났던 큰 언니는 바쁜 엄마를 대신해 동생을 업고 키웠다는 걸 알았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 덕분에 미안함과 지지하고 응원하지 못해 안타까움으로 우리를 대했던 엄마. 가장 큰 원인은 아빠에게 있었지만 모든 걸 감당하는 건 엄마 몫이었다. 그러니 엄마는 새벽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몸을 움직였다.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무얼 좋아하고, 무얼 싫어했는지 나는 알지 못하고 영원히 이별했다.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어요. 당신을 배우고 싶어요. 우리 제발 이 지긋지긋한 악몽의 계보를 벗어던져요. (104쪽)


여성의 삶에 대해 우리는 더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책 후반에 이주혜가 읽은 책 리뷰는 남다르게 다가온다. 여느 작가의 산문이나 에세이에서 볼 수 있는 목록이지만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게 강점이다. 약자이자 소수인 사람들의 대신해 목소리를 내는, 부당한 사회를 고발하고 연대를 외치며 여성(엄마) 작가로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을 만난다. 그가 읽은 책 목록을 구체적으로 나열하는 건 의미가 없다. 직접 만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엄마 됨의 경험이 세계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고립일 수밖에 없을 때 여성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삭제당한다. 글을 쓰는 여자는 모두 생존자라고 했던가. 이 문장을 조금 고쳐 말하고 싶다. 엄마가 된 여자는 모두 생존자다. (149쪽)


언어가 없는 곳에서 언어를, 빛이 없는 곳에 빛을 들고 찾아가는 자. 이것이 수많은 작가들이 스스로 밝힌 작가의 정의다.(162쪽)


엄마가 되지 않더라도 엄마로 살아가는 이들이 어떻게 고립되는지 너무도 잘 안다. 어디 엄마뿐일까. 난민, 장애인, 약자, 노인, 그 대상은 많다. 나와는 상관없는 삶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고립시킨다. 나의 눈물이 그들의 눈물과 다르지 않다는 것. 눈물을 심어본 적 있는 이라면 알 것이다. 우리는 닮은 존재이고 같은 존재라는걸. 그걸 깨닫고 한층 더 깊게 느낄 수 있는 책이라 말하고 싶다. 충분하고도 충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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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먼지 2023-03-09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표지랑 자목련님 프로필 사진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이주혜 작가님에게서 집에서 일하는 여성의 애환이 느껴집니다..(또륵) 왜 재택하면 다들 노는 줄 알까요??? ㅠㅠ

자목련 2023-03-10 08:30   좋아요 0 | URL
아, 그러네요? 저는 몰랐어요. 그러니까요! 집에 있다고 하면 왜 다 노는 줄 알까요? 재택 근무가 아니더라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가전제품은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지켜봐야 하고. 모든 삶과 일은 저마다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