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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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역사소설 『칼의 노래』는 몇 번을 읽다가 실패했다. 작가의 건조한 문체도 어려웠지만 잔인한 역사의 기록을 읽는 일은 어려웠다. 아름다운 묘사와 비유도 나를 이끌지 못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안중근 열사의 이야기를 다룬 김훈의 『하얼빈』를 읽는 일을 주저했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소설은 그만큼 쓰는 일도 읽는 일도 어려운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 하지만 소설은 기록으로 전해지지 않은 인물의 내면을 전달한다. 


군더더기 없는 김훈의 문장으로 안중근의 거사를 읽는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김훈의 이번 소설을 읽는 일은 쉬웠다. 감당할 수 없는 참혹함이나 슬픔 같은 것은 많지 않았다. 어쩌면 일부러 작가가 그런 것들을 배제하고 썼을지도 모른다. 내게 안중근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란 말로 더 가까웠다. 그래서 처음에 이 소설을 읽으면서 안중근 열사의 생을 검색하려 했던 마음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일정 부분은 기록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이 소설을 통해 안중근을 만나도 좋겠다고 여겼다. 역사적 배경이나 주변 등장인물의 성격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부분도 다르지 않다.


소설은 이토와 안중근의 이야기를 교차로 들려주며 당시 조선의 현실을 설명한다. 우리가 배운 역사와 일본과 조선의 관계를 시작으로 역사적 그날 1909년 10월 26일로 향한다. 천주교 신자인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사살할 결심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1909년 10월 22일에 먼저 하얼빈에 도착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26일까지의 그 시간, 그 행적에 집중한다. 우덕순과의 만남,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조선이 아닌 하얼빈으로 부른 그의 마음을 채운 건 무엇일까. 거사를 치르기 전에 아내와 아이를 만나지 못한 게 다행이라 여기는 사람. 하나의 장면, 한순간으로 모든 게 끝나고 마는 그 짧은 시간을 위해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는 안중근.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총은 한번 쏘면 돌이키지 못한다. (116쪽)


한 자루의 총, 실탄 일곱 발, 충분하지 못한 여비 백 루블, 그것이 전부였다. 사진 한 장으로 익힌 이토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그는 얼마나 애를 썼을까. 포수로 수없이 많은 표적을 명중시켰지만 동물이 아닌 사람을 겨누는 것은 다르다.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총을 쏘고 난 후에 벌어질 일들까지 계획이 되어 있었으니 이토를 겨누는 순간만이 중요했다.


방아쇠를 당길 때, 오른손 검지 손가락 둘째 마디는 몸의 일부가 아니라 홀로 독립된 생명체였다. 둘째 마디는 언제 당겼는지도 알 수 없는 적막 속에서 스스로 직후방으로 작동해서 총알을 내보냈다. 그러므로 이토를 조준해서 쏠 때 이토를 죽여야 한다는 절망감과 복받침, 그리고 표적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전쟁과 침탈과 학살과 기만의 그림자까지도 끊어버리고 둘째 마디의 적막과 평온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159~160쪽)


단 한 번도 총을 잡아본 적이 없다. 놀이공원에서 인형을 향해 총을 쏘는 일도 해본 적이 없기에 총을 잡는 느낌, 그 순간의 결연한 심정을 나는 알 수 없다. 이토를 사살하고도 자신이 정확하게 그를 죽였는지 알지 못해 누가 그 사실을 확인시켜주기를 바라는 그의 심경이 애달프다. 포승줄에 묶여 차례로 끌려가는 그의 동지들. 심문을 받은 기록에도 감정의 흔들림은 찾을 수 없다. 사진으로 둘째 아들을 처음 본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포수였고 가족은 없다고 말하는 남자. 결심 하나로 결심이 확고하면 아무리 경호가 많아도 암살에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안중근의 단호한 표정을 상상해 본다. “코레아 후라(대한만세)!”를 외치던 청년의 눈빛을 상상해 본다. 사진으로 남은 그의 얼굴에서도 찾을 수 없는 표정을 말이다. 김훈이 그려낸 서른한 살의 안중근은 너무 젊고 어리다. 가문의 종손이고 가장인 그는 나라를 택했다. 


그가 택하고 만든 대한의 후손으로 나는 살고 있다. 아무렇지 않게 자유를 누리고 일상을 이어간다. 그리고 종종 잊는다. 이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이렇게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를 통해 그들을 만나 감사를 전한다. 유난히 추운 겨울에 김훈의 소설로 만난 안중근의 짧은 생이 오래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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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3-01-25 1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사적 인물에 익숙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읽기가 더 꺼려졌던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뜨겁게 쓰였다기보다는 차갑게 쓰였다는 인상이 들죠^^

자목련 2023-01-26 08:50   좋아요 1 | URL
네, 김훈 작가가 일부러 그런 면에 집중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이런 소설 덕분에 역사적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알고 배워요. 오늘도 너무 춥습니다.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