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민승남 옮김 / 엘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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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방문객」의 일부)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일부처럼 한 사람을 알게 되는 일은 진정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와 관계를 맺는다는 일은 나를 보여준다는 일이고 나 역시 그에게 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 관계는 일생에 몇 번이나 올까. 모두와 두루두루 잘 지내는 사람에게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한 사람을 안다는 것, 그의 일생을 지켜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며 강요하지 않고 관계를 지속하는 일,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영원할 것 같은 앤과 조지의 우정이 한순간의 결별로 이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앤’과 ‘조지’는 1968년 대학교에서 만났다. 기숙사의 같은 방을 쓰는 사이였다. 앤과 조지는 비슷한 게 하나도 없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앤, 똑똑하고 예쁘고 모든 게 완벽했다. 조지는 그 반대였다. 서로 다른 둘은 어떻게 친해질 수 있었을까. 달라서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어쩌면 그 역시 평생의 과제인지도 모른다. 가까웠다가 멀어지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소설 속 앤과 조지처럼.


앤이 바라던 삶은 자신과 정반대의 삶이었다. 가난하고 약자인 삶을 강력하게 바라고 원하는 앤을 조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완벽 그 자체인 부모를 원망하고 무시하는 앤이라니. 자신의 아버지처럼 가정을 버리지도 않았고 엄마처럼 폭력과 욕을 일삼 지도 않는 다정하고 친절한 부모를 왜 그렇게 싫어할까. 사실 이 궁금증은 이 소설의 축이기도 하다. 어떤 이유로 앤이 부모와 자신의 환경을 증오하고 경멸하는지 말이다.


소설은 조지의 시선으로 현재와 과거를 교차로 이어간다. 1968년 집을 떠난 홀가분한 기분, 반전시위, 인권운동, 히피, 마약에 취했던 순간들, 앤과 끊임없이 마음을 나누던 시간이 필름처럼 스쳐가고 사회적 이슈와 정치적 문제도 빠지지 않는다. 그것을 대하는 앤의 격렬하고 단호한 태도까지. 그런 이유로 때로 혼란스럽다. 그러나 결국은 ‘앤’이라는 한 사람의 이야기, 조지와 앤 둘 사이의 우정과 사랑에 대한 걸 알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은 앤에 대해 알아가는 과정, 앤이 살아온 삶에 대한 기록이다. 앤을 통해 당시 미국 사회의 복잡한 문제점을 심층적으로 다루는 사회소설로도 읽을 수 있다.앤이 사랑한 한 남자로 인해 조지는 앤과 결별한다. 앤보다 열 살이나 많은 흑인 남자, 결별의 이유는 사소했지만 그 사소함에서 앤은 조지가 흑인을 대하는 편견을 보았다고 판단한다.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 해도 걷잡을 수 없다. 조지는 자신만의 삶에 집중한다. 1학년을 마치고 그만둔 학교로 돌아가고 연애를 하고 가출했다 돌아온 여동생을 돌본다. 처음부터 자신의 삶에는 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러다 조지의 삶에 앤이 스며든다. 앤이 경찰을 죽인 사건이었다. 경찰이 남편을 과잉진압하고 폭력을 가하고 총을 쏘았기에 앤은 남편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을 총으로 쏜 것이다. 백인 여성이 경찰관을 살해한 사건, 죄를 시인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앤의 단호함. 변호를 거부하며 자신의 행동의 당당함을 주장한다. 앤은 남은 인생을 감옥에서 보낸다. 감옥에서 앤은 오히려 평온하다. 약자가 있고 자신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일들이 있다. 앤이 감옥에 있는 동안 조지는 자신의 커리어를 쌓고 두 번의 결혼을 하고 딸과 아들을 두었다. 일어난 사건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과 다르게 조지는 대학시절 처음 만났던 앤을 떠올리며 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감옥에서 앤이 자유로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왜 그토록 부모를 미워하고 약자를 위한 삶을 살고 싶어 했는지 조지는 이제서야 비로소 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건 독자인 나도 마찬가지였다.


여성의 삶을 극단적으로 앤과 조지의 그것으로 분류할 수 없지만 그래도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떤 부류일까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인 ‘그 부류의 마지막 존재’에 대해서도 말이다. 가늠하건대 앤이 아닐는지. 소설에서 앤을 ‘시몬 베유’와 ‘개츠비’와 비유하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인데 사실 그 부분에서 앤을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앤이 선택한 삶이 반드시 옳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녀의 삶은 존중 받고 사랑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조지의 삶 또한 그렇다.


불평등과 차별이 여전한 세상이다. 여성으로 살아내기란 더욱 힘듦을 체감한다. 수많은 앤과 조지를 생각하면 울컥해진다. 우리 역시 앤과 조지이기 때문이다. 내 삶에 찾아온 특별한 방문객을 헤아린다. 앤과 조지처럼 나에게도 그런 소중한 우정이 있어 감사하다. 지켜보며 응원하고 때로 질책하며 나를 사랑하는 이들. 사랑하는 친구, 자매, 닉네임으로 존재하는 이들까지. ‘누구와 알고 지냈는지가 가장 중요하다.’(589쪽)란 소설 속 문장처럼 내 인생에 그들과 알고 지내며 살아간다는 게 감격스럽다.


많은 것들로 채워졌고 그 이상의 것들을 말하며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하여 자꾸만 뭔가 더 설명하고 싶은 소설이다. 하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설이라는 말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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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24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저도 이책! 눈부시게 아름다운 소설!!
꺼내 놓지 못할 정도로! ㅎㅎ

가족 모두 행복 가득! 하시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ℳ𝒶𝓇𝓇𝓎 𝒞𝓇𝒾𝓈𝓉𝓂𝒶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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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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ଫ/⌒づ🎁

자목련 2021-12-24 16:39   좋아요 1 | URL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이 조금씩 좋아집니다. ㅎ
스콧 님, 즐겁고 평온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해피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