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시스타북스 Seestarbooks 18
최진영 지음 / 스타북스 / 202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어려지고 싶다면

어른이 된 것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견디고 또 이겨내며

지나온 삶을 웃으며

돌이켜 볼 수 있다면

그대 어른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손이 거친 게 이제야 보이고

아버지의 등이 더는 커 보이지 않으면

우리 어른이 된 것이다

아무리 아파도

엄마 품에 안길 수 없을 때

홀로 불 꺼진 방 안에

입술 깨무는 이슬비처럼

우는 게 고작일 때

조금 슬프지만

우리 어른이 된 것이다 (「어른」, 전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모두가 이렇게 쓸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시를 읽는 것이겠지. 어른이지만 어른이고 싶지 않은 날들이 많다. 어른이라는 걸 부정하고 마구 떼를 쓰고 싶은 날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울음을 삼킨다. 어른의 삶이 더욱 버거운 코로나 시국에 모두를 위로하는 시다. 시는 그렇다. 시는 때로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 이상하고 때로 울컥한다.


최진영의 첫 시집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는 제목부터 내게 생소했다. 그러니까 시집의 제목 ‘PK’에 대해 나는 알지 못했다. 검색을 해 보니 게임 용어라고 한다. 나는 게임을 하지 않고 유저들의 기분을 알지 못하니 시가 추구하는 방향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집에는 내가 모르는 영역만 존재하는 건 아니고 일상의 영역이 많이 등장한다. 편의점, 지하철, 아파트, 병원이라는 공간을 시인이 느끼는 감정과 은유적인 표현한다. 특히 중환자실, 응급실, 병상은 실제적인 경험이 느껴진다. 그 공간에서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을 나 역시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호자와 환자는 서로 같은 듯 다른 상실을 경험하는 공간 중환자실 ‘누구든 실려 들어가고/눈꺼풀이 커튼을 치면/눈동자는 깊은 블랙홀이 된다’ (「중환자실 2」, 일부)과 절박함이 흐르는 응급실의 공기가 ‘생을 붙잡고 있는 건/자기 자신일까/사랑하는 사람일까’ (「응급실에서」, 일부)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익숙한 분위기, 식상한 표현의 시도 보인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빛나지 않는 건 아니에요/그래요,그대처럼요.’(「밤하늘」, 전문)이나 『밤』이라는 시에서 ‘검은 창호지 같은 밤하늘’이나 ‘지상의 불빛이 반쯤 눈을 뜬 시간’이란 표현은 고유하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건 취향의 문제다. 내가 게임을 즐겨 하는 이라면 시 「PK」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시집에서 시인이 어떤 삶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지 충분히 전해진다.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같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 시를 향한 간절함,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시로 쓰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물과 풍경을 보고 이런 시를 쓰는 이, 그는 건강하고 따뜻한 시인이다.

햇살 좋은 오후

문을 열고 나와서

맞은편 아파트 창문을 본다


빨래를 터는 사람

화분에 물을 주는 사람

블라인드를 치는 사람

노는 이를 보며 웃는 사람


그들의 모습이 잠시 책갈피가 된다


책꽂이 같은 아파트

책장처럼 칸칸이 꽂혀있는 책들의

한 페이지가 보였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더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책갈피가 된다」, 전문)

어쩌면 그에게는 삶과 시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좋은 시가 무엇인지 찾으려 노력하는 이런 시를 보면 그러하다. ‘가슴이 아닌 대가리 깨져가며 쓴 시가/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그런 시나 쓰고 앉아 있으니/삶이 부끄럽고, 그런 삶을 살면서//좋은 시 한 편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 「좋은 시」, 일부) 시를 향한 염원과 시를 쓰며 성장하는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첫 시집은 그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첫 시집이니까. 그러니 두 번째 시집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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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9-1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들은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시 한줄의 말도 안되는가격, 그렇지만 그 시 한 줄 위한 엄청난 노고 ㅠㅠ

자목련 2021-09-15 16:5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시를 읽을 때마다 놀라고 감탄해요.
말씀하신 부분은 더 좋은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