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에 피로감을 느끼는 시대다.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다양한 채널에서는 더 짧은 글, 더 자극적인 이미지, 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것도 하나의 이유다. 그럼에도 스치듯 마주한 짧은 문장에 이끌려 그다음 이야기가 궁금하고 더 많은 글을 만나고 싶었던 기억이 있다. 강렬하면서도 따듯한 문구, 읽는 순간 머리와 가슴을 동시에 자극하는 글. 그 안에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기쁨, 충만, 사유를 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박노해의 『걷는 녹서』가 그런 책이다. 그래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어렵기도 하다.단 한 줄이 전하는 뜨거운 울림.
한 줄의 문장이 지닌 힘, 그 문장을 통해 전해지는 어떤 떨림, 어떤 숭고함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423편의 글과 박노해 시인이 지난 20여 년간 기록해온 사진들이 담겼다. 같은 듯 다른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가 잊었던 삶의 질문이라고 할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기에 아쉬운 마음이 크다. 성경 공부 큐티처럼 하루에 한 문장씩 가슴에 새기고 그 문장을 기억해도 좋을 듯하다. 또 다른 하루에는 새로운 문장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잊어도 괜찮다. 다시 읽고 다시 느끼면 된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기계처럼 하루를 시작하고 정신없이 살아가는 우리들.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그 목적을 잃어버리고 그냥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순간, 당신 곁에 이런 문장이 함께 있다면 좋겠다. 자꾸만 뭔가 채워야 하고 잔고를 늘려야 한다는 게 삶의 의무인 양 달려온 시간 마주한 나는 어떤 모습인가. 거울 속 나를 바라보는 나의 표정은 웃고 있는가. 우리는 어쩌면 매일 나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157쪽)
목적지는 저 먼 어딘가가 아니다. 그곳에 이르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목적지다. (425쪽)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말 것.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지 말 것. (482쪽)
때로 얼마나 더 살아야 인생의 답을 찾으까 궁금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인생의 답이라는 건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우주의 작디작은 한 점에 불과한 게 우리의 인생이라는걸. 겨우 100년이라는 시간을 살다가 소멸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고 사랑하며 기쁨을 만끽하는 일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지구별에 놀러 온 아이야. 너는 맘껏 놀고 기뻐하라. 그리고 네 삶을 망치는 것들과 싸워가라. (233쪽)
살아 보면 존재는 의식을 배반한다. 인간은 그가 사는 대로 되어간다. (407쪽)
문장을 읽으면서 문득 궁금하다. 얼마나 많은 길을 떠나 그 길에서 걷고 읽고 사람들을 만나야 이런 사유를 길어올릴 수 있을까. 무기수로 지내면서도 놓을 수 없었던 독서, 걷는 독서가 시작된 그 공간, 나아가 그가 걸어간 길, 그가 만난 세상은 어떤 빛이었을까. 감히 상상할 수 없지만 박노해 시인이 살아온 삶을 채운 고통과 절망을 생각한다.
돌아보니 그랬다. 가난과 노동과 고난으로 점철된 내 인생길에서 그래도 나를 키우고 나를 지키고 나를 밀어 올린 것은 ‘걷는 독서’였다. 어쩌면 모든 것을 빼앗긴 내 인생에서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한 나만의 자유였고 나만의 향연이었다. (9쪽)
박노해 시인이 스스로를 지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놓을 수 없었던 걷는 독서. 그로 인해 우리는 이렇게 쉽고 간편하게 삶을 돌아본다. 온전히 나를 마주할 수 있는 순간을 선물한다. 한 줄의 문장이 전하는 거대한 울림과 삶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 있다. 읽는 일이 부담스럽게 다가오는 이에게 읽는 즐거움을 뒤 찾아줄 한 권의 책이 될지도 모른다. 텅 빈 충만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책으로의 도피나 마취가 아닌 온 삶으로 읽고, 읽어버린 것을 살아내야만 한다. 독서의 완성은 삶이기에. 그리하여 우리는 모두 저마다 한 권의 책을 써나가는 사람이다. 삶이라는 한 권의 책을. (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