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리시아의 여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5
윌리엄 트레버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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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길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여행이든, 출장이든, 그냥이든 이곳을 떠난다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떠나는 삶을 규정할 수 있는 이는 자신뿐이다. 떠나기까지의 결정도 여정의 시작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장편소설 『펠리시아의 여정』의 주인공 펠리시아도 그랬을 것이다. 수없이 고민하고 결정한 일이다. 아직 어린 십 대 소녀 펠리시아에게는 집을 떠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연인 조니가 일하는 도시 영국에 가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믿었을지도 모른다. 충분한 의지가 있고 조니는 자신을 사랑하니까 가능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막상 영국에 도착한 펠리시아가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누가 봐도 영국에 처음 온 풋내기 소녀란 걸 알 수 있었다.


양손에 쇼핑백을 꼭 쥔 소녀 펠리시아를 지켜본 헬디치 씨는 친절하게 도움을 전하려 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나쁜 곳인지 알기에 십 대 소녀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대를 배려하는 보통의 중년 남자. 조니가 일한다는 공장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런 공장은 없다면서도 펠리시아가 포기하지 않도록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서 그녀 곁에 머문다. 헬디치 씨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집에서 혼자 산다. 그의 일상은 단순하고도 단순하다. 직장에 나가고 퇴근하고 음악을 듣고 과거를 회상하고.


어떤 것은 크게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법이고, 어떤 것은 심지어 혼잣말로도 말하지 않는 법이다. 그냥 그 자리에 두는 것이, 잊고 지내는 것이 최선이다. (69쪽)


펠리시아가 헬디치 씨와 자꾸만 만나는 모습을 통해 나는 이 소설이 어떻게 흐를까 무척 궁금해졌다. 펠리시아가 조니를 찾도록 헬디치 씨가 도와주며 그녀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과거 어머니와 단둘이 살면서 느꼈던 결핍, 혼자라는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보상심리로 주변 사람을 도와주는 게 아닐까 싶었던 거다. 그러나 그동안 헬디치 씨가 펠리시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도움을 준 여자들(엘시, 샤론, 베스 등)가 등장하면서는 점점 불안해졌다. 스릴러 소설로 바뀌는 순간이 등장할까 봐. 선교 활동을 하는 무리들과 만났을 때 그들과 함께 지내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들이 펠리시아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과연 자신을 떠난 연인의 아이를 임신한 십 대 소녀에게 가장 절실한 도움은 무엇일까. 끊임없이 펠리시아 주변을 서성이며 결국엔 병원에 데리고 간 헬디치 씨의 선택은 잘못된 것일까. 어쩌면 그는 펠리시아의 아이가 자신처럼 될까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의 과거 범죄에 대한 판결과 별개로 그가 살아온 삶은 너무도 안타깝다.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했고 원하는 걸 갖지 못하며 상대의 눈치를 살피면서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깊게 파고든 삶. 처음 펠리시아에게 향한 그의 마음처럼 과거의 헬디치 씨에게도 누군가 작은 마음을 건넸더라면 어땠을까. 그러기에 펠리시아가 그를 떠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건 그의 마지막 선의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에는 다 처음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며 노상의 잠자리에 자리 잡는다. 한동안은 실종으로 처리되지만 나중에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다. 밑바닥 인생, 이제 그들은 그렇게 불린다. (306~307쪽)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길 위의 삶을 선택하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기로 한 펠리시아의 의지가 헬디치 씨에게도 있었더라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펠리시아는 계속 이동하는 삶을 선택했고 헬디치 씨는 제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삶을 선택했다. 그녀 스스로 이전의 펠리시아가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누군가는 펠리시아의 여정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문득 궁금해진다. 1994년에 발표된 이 소설 속 펠리시아가 2021년을 살아가는 다양한 펠리시아에겐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끊나지 않은 펠리시아의 여정이 궁금하다. 새로운 길을 만나 펼쳐질 그녀의 삶을 응원한다. 다른 얼굴, 다른 이름의 헬디치 씨와 조니를 만나게 될 그녀가 성장하여 들려줄 이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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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24 19: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어지선가 읽어본 ‘여행‘과 ‘여정‘의 차이에 대한 글을 보고 아하 했던 기억이 나네요. 손에 땀을 지게 했던 펠리시아의 여정 너무 흥미로워요 ^^

자목련 2021-07-28 15:00   좋아요 2 | URL
맞아요, 잔혹한 설명없이 잔혹했고 다른 한 편으로는 애잔하고도 애잔한 소설이었어요.
많이 더워요, 시원한 오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