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끈질긴 서퍼 - 40대 회사원 킵 고잉 다이어리
김현지 지음 / 여름귤 / 2020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일 마주하는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어떤 얼굴, 피곤하거나 아무 표정이 없는 얼굴. 일부러 웃어 보이거나 화가 난 표정을 짓는 얼굴. 바로 나의 얼굴이다. 양치질을 할 때, 세수를 할 때 나를 본다. 가끔 거울 속 나에게 말을 건네기도 한다. 그 공간에 혼자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삶이라는 규정된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하루하루. 누군가는 과감히 그 틀을 던져버리고 다른 항로를 찾아 나서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울감이 몰려온다. 그러나 곧 나는 나를 찾는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때로 지치고 슬프고 우울하니까.

그런 감정들이 높아지는 벽으로 나를 가둘 때 나는 책을 읽었다. 그 벽들을 부수기 위해, 아니면 다른 재료로 벽을 쌓기 위해 나는 책을 읽고 뭔가를 썼다. 그게 일기든, 중얼거림이든, 리뷰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쓴다는 게 중요했다. 어떤 목표나 결과를 얻기 위한 적도 있었고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몰려드는 잡념에도 단단해지려고 한다. 나는 그러려고 한다. 이런 생각을 주저리주저리 쓰고 있는 건 김현지의 『가장 끈질긴 서퍼』를 읽으면서 더욱 강해졌다. 제목만 보고 정유미, 최우식의 <여름방학>을 생각했다. 파도를 타는 서퍼, 다음 파도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서퍼. 서퍼를 배우는 과정인가, 생각한다. 보기 좋게 어긋났다. 40대 직장인의 일기였다. 하루 일과의 기록이었다가, 여행의 이야기였다가, 일과 나 사이의 거리를 재는 글이었다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고백이자, 연서 같은 그런 글들이었다.


어떤 글은 더욱 몰입했고 어떤 글은 나와는 다른 사람이구나 싶었고 어떤 글은 가만히 반복해서 읽었다. 글이란 이래서 좋다. 글과 대화할 수 있고, 혼자 독백할 수도 있다. 계절의 흐름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처음 미술 학원에 간 봄이 지나고 다시 다음 해 미술 학원에 간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어느 날 소중하게 다가온다. 일상이란 그런 것이다. 좋아하는 책을 만나는 부분,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찌릿함이 몰려온다. 어느 여름이 생각나기도 했고, 그 여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M이 떠올라서다. 우리는 감자, 책,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여름마다 앤드루 포터의 소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는다. 좋은 소설은 왜 여름에 읽어야 할까. 읽을 때마다 운다. 그리고 원하던 것을 대부분 미끄러뜨리는 일을, 노인이 되기 위해 달릴 뿐인 생을 사랑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권태 아니면 비극인 날들 와중에 어떤 문장들은 시간을 견딘다. 물처럼 고인 여름의 빛, 나의 작은 블랙홀, 사랑했던 나라로 떠나는 짧은 여행. (95쪽)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고 특별히 부러울 만한 일상이 아니다. 딸이 있는 상사가 자신과 딸이 나누는 대화를 들려주고 그걸 가만히 듣는 이, 집을 구하고 이사를 하고 벽지를 바라는 부부의 대화를 통해 서툴고 다정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소설을 쓰는 친구의 책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식물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다녀온 여행지를 떠올리는 그런 글이다.

고통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서로의 고통을 느낄 수 있어서 우리의 세계는 넓어진다는 것을, 결국 고통만큼 성장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단지 시간과, 견딜 수 있는 작은방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괜찮아, 시간은 결국 당신의 편이고, 우리는 서로의 곁에 있을 거니까. (197쪽)

그냥 버티고 있다. 요즘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의미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일뿐 아니라 사는 게 버티는 거 아닐까. 버틴 걸로 이미 미루게 되는 일들이 있다. 지속하는 것은 때로 그 자체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다. (288쪽)

삶이란 여전히 알 수 없다. 내가 체험하지 않을 것들은 모르는 세계가 된다. 조금씩 나이를 먹고 다른 삶을 이해하려 하는 시간이 온다. 그게 참 신기하면서도 감사하다. 힘든 일이 생기고 겨우 해결하면 야속하게도 다른 일이 터진다. 한숨을 쉬며 시간을 견디는 일, 질끈 눈을 감고 잊어버리는 순간들, 그 모든 게 나를 이루고 나를 감싸는 다정한 손길인지도 모른다. 그 모든 것들이 뭉클한 오늘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an22598 2020-11-10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도 되고 위로가 되는 글이네요..^^

자목련 2020-11-10 09:38   좋아요 0 | URL
^^*
11월의 남은 날들이 따뜻하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