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부주의하고 망각하는 인간들이다. 사실 실제 현실에서 우리는 수 세기 전부터 계속되어 오고 있으며 끝날지 안 끝날지 알 수 없는 우주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존재다. 우리는 핏빛으로 물든 달과 불길과 강풍 속에서, 10월에 지는 얼어붙은 나뭇잎에서, 나비의 초조한 날갯짓에서, 밤을 무한대로 길게 늘리거나, 매일 정오 갑자기 멈추는 불규칙한 시간의 맥박 속에서 어떤 존재의 반영만을 보고 있을 뿐이다. (『낮의 집, 밤의 집』, 116쪽)

소설을 읽으면서 블랙홀에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한 발을 내디디면 끝날 때까지 나올 수 없다고 하면 적절할까. 어떤 이야기가 계속될지, 어떤 문장을 발견할까 기대하면서 책장을 넘긴다. 이해했다거나 인물이 또렷하게 그려지는 게 아니어도 괜찮다. 그게 올가 토카르추크 소설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거대한 꿈을 꾸는 듯, 알 수 없는 우주를 유영하는 느낌. 『낮의 집, 밤의 집』을 읽으면서도 모호한 존재들을 상상한다. 선명하게 밝혀지지 않는 인간의 생과 존재들 말이다. 그러면서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외감을 놓치지 않는다.


세 번째 만나는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은 여전히 어려웠다. 그러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다시 읽고 싶은 그런 소설이라는 거다.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인물이 등장하며 짧고도 긴 사유의 글들이 조각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이야기가 하나가 되고 전혀 상관없는 그들의 이야기는 돌고 돈다. 『방랑자들』보다 10년 전에 발표한 소설이다. 개인적으로 ‘방랑자’들이 이 소설의 후속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화자인 ‘나’의 꿈으로 시작해 그녀가 들려주는 ‘마르타’에 대한 이야기가 소설의 축을 이룬다. 1990년대 폴란드의 작은 마을 피에토느에서 가발을 만드는 마르타와 교류한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지만 화자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화를 나누는 이는 노인인 마르타다. 그러나 마르타가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아니다. 다만 화자가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할 뿐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들, 때로 환상처럼 때로 꿈속처럼 다가온다. 마르타 외의 마을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다르지 않다. 폭력을 쓰는 아버지로 힘든 가족의 상처를 대물림되고, 아이가 없는 부부의 일상에서 허전함이 전해지고,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이가 있다. 그런가 하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인물, 아니 괴물처럼 여겨지는 인물도 있다.

나와는 상관없을 것만 타인의 이야기, 서로 다른 꿈들, 곳곳에 등장하는 자연에 대한 사유를 듣다 보면 그 모든 것들이 삶의 조각들이란 걸 알게 된다. 전설처럼, 신화처럼 성녀 쿰메르니스의 이야기도 그러하다. 평범했던 한 여자가 성녀가 되는 과정과 그것을 기록하는 사람. 수녀원, 동굴, 지하실, 다락방, 숲, 소설 속 장소와 공간은 모두 집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마르타에게 우리는 각자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로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두 곳에서 동시에 살고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21쪽)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과 죽음으로 향하는 인간의 생을 통해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그려낸 세상에 감탄하지만 소설 속 모든 관계와 사건들을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하나의 소설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보와 자료를 수집했을까. 액자소설처럼 이야기는 이야기를 불러온다. 성녀 쿰메르니스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다. 올가 토카르추크의 이야기는 경계를 허물고 확장되어 넓은 세계로 향한다. 그러면서도 죽음에 대한 분명한 사유를 전한다.

인생이 갈망이 될 때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종이처럼 보이고, 손가락 사이에서 바스러져 떨어진다. 모든 동작들과 모든 생각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각각의 감정은 시작되긴 하지만 결코 끝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그리움의 대상조차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비현실적인 것이다. 오직 그리움만 진짜이고, 중독성이 있다. 있지 않은 곳에 있어야 하고, 소유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만져야 한다. (『낮의 집, 밤의 집』,430~431쪽)


맨 처음 그녀의 소설을 읽었을 때는 도무지 따가갈 수가 없았다. 외국 소설의 경우 주요인물의 이름도 기억하기 힘들다. 『태고의 시간들』에서도 많은 인물이 등장해 신화처럼 폴란드의 역사를 말한다. 그녀에게 시간과 공간은 무척 중요한 의미인 것 같다. 그 소설에서도 보리수, 버섯 균, 과수원, 죽은 자, 신의 시간이 등장한다. 저마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시간을 산다고 할까. 그라인더의 시간이라니.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러한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태고의 시간들』, 54쪽)


작품 순서를 보면 『낮의 집, 밤의 집』이 『태고의 시간들』, 『방랑자들』보다 먼저 출판되었지만 번역으로 출판된 순서는 다르다. 어쩌면 순차적으로 읽었더라면 더욱 그녀가 지향하는 세계와 가까이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떻게 이렇게 거대하면서도 아름다운 소설을 쓸 수 있을까. 하나하나 조각으로 이어진 소설, 서로 다른 화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크게 다가온다. 처음에 읽을 때는 그저 좋은 문장이라고 여겼던 부분에서 멈칫한다. 모든 소설의 인물은 방랑자이며 올가 토카르추크 그녀 자신이구나 알게 된다.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 그녀가 이동하는 공간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 그리고 구축하고 만들어지는 세상.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이 세 개뿐인 눈금이 바로 우리의 삶이라는 놀라운 통찰력.


나는 기차와 호텔, 대기실에서, 그리고 비행기의 접이식 테이블에서 글 쓰는 법을 익혔다. 밥을 먹다 식탁 밑에서, 혹은 화장실에서 뭔가를 끄적이기도 한다. 박물관의 계단에서, 카페에서, 길가에 잠시 정차해놓은 자동차 안에서 글을 쓴다. 종이쪽지에, 수첩에, 엽서에, 손바닥에, 냅킨에, 책의 한 귀퉁이에 쓴다. ( 『방랑자들』, 35쪽)


한 귀퉁이에 서서 바라보는 것. 그건 세상을 그저 파편으로 본다는 뜻이다. 거기에 다른 세상은 없다. 순간들, 부스러기들,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바로 조각나 버리는 일시적인 배열들뿐. 인생? 그런 건 없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 면, 구체, 그리고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모습뿐이다. 반면에 시간은 미세한 변화의 측정을 위한 간단한 도구에 불과하다. 아주 단순화된 줄자와 마찬가지다. 거기엔 눈금이 딱 세 개뿐이다. 있었다, 있다, 있을 것이다.( 『방랑자들』, 280쪽)


다시 『낮의 집, 밤의 집』로 돌아와서 생각한다. 올가 토카르추크가 안내하는 독특하고 다양한 세계가 어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상상을 한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전부가 아닐 것이다. 내가 이동하는 만큼 볼 수 있고 내가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만큼만 가능할 것이다. 그녀와 소설이 방랑자인 것처럼. 그런 이유로 이 굉장한 소설 속에서 이런 문장을 오래 기억하고 되새기고 싶다. 우리 생은 순간의 연속이라는 명징한 사실을 말이다.


나 자신에 대해 말할 수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는 나 자신에게서 생기고, 공간과 시간의 한 지점을 흘러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이 장소와 시간의 속성의 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다른 지점에서만 바라본 세계들은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볼 수 있는 만큼 많은 세상에서 살 수 있다. (『낮의 집, 밤의 집』,380쪽)


마르타의 집은 그녀와 닮았다. 그녀처럼 하느님도, 그의 피조물도, 심지어 그 자신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오직 한순간, 지금만 존재할 뿐이지만, 그것은 거대하고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사람에게는 압도적이다. (『낮의 집, 밤의 집』,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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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와파롤 2020-11-04 17: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고의 시간들 읽으면서 너무 신비한 새로운 세계를 보았는데.... 이 책도 빨리 읽어보고 싶어지네요...

자목련 2020-11-05 11:18   좋아요 0 | URL
아, 맞아요. 랑그와파롤 님의 말씀처럼 신비하고 새로운 세계.
이 책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