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이방인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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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자신을 표현하고 증명한다. 고유한 이름처럼 말이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습득한 모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모국을 떠나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의 증거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는 오직 모국어 하나뿐인데 타국에서 살아야 한다면 삶은 온통 공포와 두려움일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란 가장 원초적이고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없다. 당연 정체성을 생각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문제가 가장 클 테니 말이다.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주는 놀라운 힘, 언어의 상징에 대해 생각한 적이 없다. 나는 언어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을 경험할 일이 없었으므로. 어떠한 이유로도(여행, 유학) 이 땅을 떠난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짐작할 수는 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일상이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운 것인지. 나를 둘러싼 모든 소리가 공격적으로 들릴 테니까. 긴장한 상태의 일상을 유지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불러온다. 그런 환경에서 나의 언어를 다른 언어가 흡수한 채 살다 보면 어느새 자신을 증명하는 언어는 바뀌고 그 순간 정체성의 혼란과 마주하고 만다.

이창래 작가의 첫 장편소설 『영원한 이방인』은 언어가 상징하는 정체성의 이야기다. 소설은 자의로 한국을 떠나 미국을 선택한 이민 1세대 아버지를 둔 아들 헨리 파크(박병호)가 살아가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최고의 공과대학을 나온 엘리트였다. 한국에서 성공할 수 없어 고국을 떠나왔다. 그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 헨리는 집 안에서는 한국어를 쓰고 밖에서는 영어를 사용했다. 수많은 이방인과 경쟁하며 살아가는 아버지는 아들은 온전한 미국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버지는 백인인 릴리아와 아들의 결혼을 기뻐한다. 아버지의 삶에서 자아나 정체성은 중요한 게 아니라 미국인처럼 보이는 게 다였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방식으로 헨리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전 어머니가 죽었고 어머니 대신 살림을 살아준 한국인 아주머니, 어려서 죽은 아들 미트, 릴리아와 헤어짐을 반복하는 모습, 그가 하고 있는 일까지 전부를 초반에 공개한다. 시민권을 부여받은 미국인이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살았던 헨리가 다국적 기업의 정보 담담(스파이)란 직업을 선택한 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일 말이다.

고집스럽게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성공했지만 절대 미국인의 삶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절대 이해할 수 없었던 헨리는 아버지가 닮은 듯 다른 한 남자 존 강을 통해 조금씩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존 강은 시의원으로 시장 출마를 꿈꾸는 사람이다. 헨리는 그의 사무실에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그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존 강을 돕는 다양한 사람들과 시내를 돌며 그를 지지하는 많은 이들을 만난다. 그들에게 존 강은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며 닮고 싶고 마지막으로 되고 싶은 인물이었다.

헨리는 자원봉사자로 일을 하면서 그날의 보고서를 작성하여 회사로 보낸다. 보통의 스파이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존 강과 접촉하면서 그와 대화를 들으면서 그의 가족과 아이들을 만나면서 자꾸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말았다. 아내 릴리아에 대해, 죽은 아들 미트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회사의 요구에 응하는 대신 존 강을 진짜로 돕고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느낀다. 존 강과 대화를 나누면서 짧게 서툰 한국어를 사용할 때 전해지는 친밀감, 자신을 향해 모든 걸 오픈하는 존 강에게 그와 함께 간다면 괜찮은 삶을 살 것 같다.

그런 헨리의 변화를 눈치챈 것일까. 존 강의 사무실에 폭탄이 터지고 젊은 자원봉사자 에두아르도가 목숨을 잃는다. 헨리가 당할 수도 있는 사고였다. 상심에 빠진 존 강을 대신해 헨리가 에두아르도의 가족을 찾는다. 그들은 헨리가 존 강이라 여긴다. 사람들의 눈에 비슷한 외모의 미국계 한국인은 구별할 수 없다. 존 강을 대하는 그들 가족의 태도는 절대적으로 보였다. 헨리는 이민사회에서 존 강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그가 이 위기를 잘 극복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존 강은 쉽게 무너진다. 단단하게 쌓아올린 그의 정체성은 한순간 허물어진다. 위태롭고 나약한 한 인간에 불과했던 존 강을 보면서 헨리는 자신을 찾아간다. 지금처럼 경계인으로 살아도 괜찮은 건지.

언어로 인해 불편을 겪었던 유년 시절을 지내고 좋은 대학을 나와 예쁜 아내를 만났으니 보통의 삶이 주는 행복을 느끼며 살아도 괜찮았을 텐데. 헨리를 만들고 이룬 정체성 가운데 무엇이 그를 가장 힘들게 만들었을까. 미국인도 아니고 한국인도 아닌 그 경계의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 그 사회에 올인 했더라면 훨씬 견디기 쉬웠을 것이다. 존 강을 만나면서 그와 아버지를 대입하면서 교차하는 감정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미국이라는 사회에 들어와 중도 탈락을 하지 않고 안착했지만 지향하는 목표가 다른 두 사람. 헨리는 존 강의 방식이 옳았다고 여겼지만 결국엔 그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돌아온다. 그 역시 아버지와 같은 이민자였으므로.

헨리가 진짜 원하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지독한 이방인으로 살았던 아버지의 바람대로 미국인으로 사는 것일까. 아내 릴리아처럼 세상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무엇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정체성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더 이상 스파이가 아니다. 경계인의 삶에서 벗어났다. 수많은 가짜 이름이 아닌 오직 하나의 이름, 헨리 박이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는 이름, 릴리아가 부르는 이름으로 존재한다. 가장 익숙하고 가장 원초적인 사람이 된다. 아이를 가르치는 아내를 도우며 그 아이들을 통해 잊고 있었던 정체성과 마주한다. 그 아이들의 부모를 통해 아버지를 본다. 그리고 질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미국인으로 살든 미국계 한국인을 살든 상관없다. 그저 ‘나’의 이름을 부르는 이의 곁에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할 뿐이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어떤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든, 그곳이 어디든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다. 나의 목소리를 듣고 알아듣는 이와 함께 말이다.

이제 그녀는 최대한 성의를 다해 아이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른다. 고저와 억양까지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나는 그녀가 아름다운 모국어 여남은 가지를 말하는 소리,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 주는 그 어려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5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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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6-02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로 개정판이 나온 게 엊그제 같은데
판권 시효가 다 되었는지 품절이 되어
버렸네요.

이창래 선생의 근원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꼭 읽어봐야 하는 소설이 아닌
가 싶습니다.

구판으로 읽어서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네요.

이번 여름에는 이창래 선생 다시 읽기
에 도전할까 생각 중입니다.

자목련 2020-06-03 09:40   좋아요 0 | URL
책도 타이밍을 놓치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꾸준하게 다시 읽기를 하시는 레사매냐 님의 좋은 리뷰를 잘 읽고 있습니다.
다시 읽는다는 게 참 쉽지 않은데, 정말 대단하세요.이창래 작가와의 만남,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