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어하우스
베스 올리리 지음, 문은실 옮김 / 살림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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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로맨스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 오래전에 사랑의 설렘에 들뜨는 나이를 지나왔고 뻔한 결말로 가는 식상한 과정에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현실적이면서도 신선한 이야기를 원했다. 사랑은 환상이 아니고 현실이니까. 은근한 밀당과 자존심을 내세우는 로맨스 소설은 너무도 흔하다. 색다른 느낌을 건네면서도 사랑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뜨거운 감동을 바란다면 나의 욕심이 과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스 올리리의 『셰어하우스』는 내가 원하는 그런 소설이었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집을 나누어 사용하는 이야기다. 은밀하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침대를 공유하는 일이다. 여주인공 티피는 실용 서적을 만드는 출판사의 편집자다. 함께 지냈던 남자친구 저스틴과 헤어지고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야 한다. 세상 어디나 나만의 공간을 ​구하는 일은 어려운 법. 그런 티피가 발견한 광고는 정말 기발하고도 놀라웠다. 평일 낮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은 티피의 공간이 될 수 있다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야간 근무를 하는 간호사의 광고였다. 그가 스물일곱 살의 남자라는 조건을 따질 필요도 없다. 티피와의 면접도 그의 여자친구 케이가 했으니 마주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광고를 낸 리언도 마찬가지였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 동생 리치의 항소심 준비로 ​돈이 필요했다. 생활 패턴이 다르니 조심할 일도 없고 리언의 사정을 아는 여자친구도 동의했다.

 

티피와 리언의 시선이 교차로 서로에 대한 생각과 일상을 보여준다. 나와는 완벽하게 취향이 다른 이가 남긴 흔적을 발견하는 일은 당황스러운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동거 아닌 동거를 하는 티피와 리언은 서로의 일상에 조금씩 눈길이 간다. 리언이 읽은 책, 티피가 만든 음식이 그러했다. 활동 시간이 다른 티피와 리언은 통화가 아닌 포스트잇에 메모를 남기면서 의견을 교환한다. 통화 버튼만 누르며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이처럼 아날로그적 소통이라니. 고백하자면 나는 작가의 이런 설정이 좋았다. 정해진 공간이 아닌 집 안 곳곳에 필요할 때마다 메모를 남긴다. 밤 근무를 하고 힘들었을 리언에게 티피가 남긴 메모와 음식은 훌륭했다. 필요한 질문이나 조율할 일도 모두 포스트잇 하나면 충분했다. 아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알림을 시작으로 한 메모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포스트잇을 쓰면서 답장을 기다리고 또 그에 대한 답을 쓰는 짧은 순간에 서로를 생각하며 미소를 짓는 일. 가장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장면이 아닐까.

 

냉장고 문에 이마를 잠시 얹었다가 종이 쪼가리와 포스트잇 쪽지들을 손가락으로 훑어본다. 엄청난 양이었다. 농담, 비밀, 이야기, 두 사람의 인생이 천천히 펼쳐지고 있는 광경. 두 사람의 인생이 바뀌어가는 광경. 아니면 뭐랄까. 동시에 똑같이 바뀌는 장면이랄까. 다른 시간대, 같은 장소에서. (251쪽)

 

처음부터 티피와 리언이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였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 말 그대로 낯선 타인이었던 티피와 리언이 서로를 걱정하는 사이로 변화할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일까. 솔직하게 모든 걸 말할 수 있어서 가능했다. 우연처럼 리치의 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케이와 이별해서? 아니다. 그건 용기 그 이상의 것이었다. 둘 사이에 오간 포스트잇의 개수만큼 서로에 대해 많은 걸 알게 된 것이다. 리언은 리치에게 벌어진 일들을 들려주고 티피는 전 남자친구 저스틴과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상대에게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마음이 움직이는 건 아주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 교도소에서 걸려온 리치의 전화를 받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일, 티피가 편집하는 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말을 건네는 일.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일도 그러했다. 상대의 주변을 살피고 새롭게 확장된 관계를 맞이하는 일이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랑의 힘이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사랑한다는 건 행동하는 것이다. 마음에 담아두었던 감정을 꺼내는 것이고, 상대를 위해 움직이는 일이다. 오해했던 마음을 사과하기 위해 전화를 거는 사소한 행동부터 티피의 친구들이 리치를 도우려는 행동, 저스틴의 폭력과 집착에 단호하게 대처하는 일,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를 위해 그의 친구를 찾아 나서는 리언의 행동, 이 모두가 사랑이 있기에 가능하다.

 

티피와 리언의 사랑만이 특별한 게 아니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행동한다는 걸 우리는 안다. 두려움이나 걱정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랑은 때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베스 올리리의 『셰어하우스』가 전해주는 사랑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모든 세대가 공감할 이야기로 사랑에 대해 말한다. 잠들었던 사랑의 감각을 자극해 깨우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들에겐 자신의 사랑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며 사랑을 꿈꾸는 이들에겐 좋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준다. 일회적이고 소모적인 사랑이 아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사랑에 대해서 말이다. 서로를 움직이는 원동력, 그 아름다운 힘으로 만드는 눈부신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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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9-12-22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 님 겨울 건강히 지내고 계신지요. 이 책을 시각장애인 녹음도서로 낭독하고 싶어져요. 재미있어 하실 것 같아요. 점자도서관에 추천해 보겠습니다. 사랑은 행동하는 것. 상대를 위해 몸을 움직이는 일이란 문장이 새삼 들어와요. 맞다맞아 이러면서요.

자목련 2019-12-22 13:1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프레이야 님. 그동안 글을 쓰고 책을 내시느라 바쁘셨군요. 출간 축하드려요. 이 책, 좋아요. 재미와 감동, 그리고 즐거움까지 안겨줄 거라 생각해요. 남은 12월 일정이 많으시겠지만 평온하고 포근하게 보내시길 바라요.

2019-12-22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24 1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