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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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사랑해야 한다.(307쪽)하밀 할아버지가 노망이 들기 전에 한 말이 맞는 것 같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다.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감정을 쏟을 가치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르튀르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고, 사랑해야 한다.(307쪽)

​모두에게 좋은 책이라는 평을 받은 책은 읽기가 겁난다. 읽어야 할 책으로 분류되었고 꼭 읽어야지 하는 다짐을 끝내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아쉬운 무언가와 마주했다면 더욱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잘못 읽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남들이 느끼는 감동의 크기가 나의 그것과 같을까. 누군가 붙잡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 솔직한 기분을 가짜로 포장할 수도 없으니 큰일이 아닌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 그러했다. 열네 살 모모의 성장소설이며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란 질문을 떠올리는 소설 말이다. 아름다운 감동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흡수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이 아니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모모를 만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럼에도 충분히 좋은 소설이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모모는 부모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대신 로자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성장했다. 아니다, 모모 스스로 자랐다는 게 맞겠다. 자신이 처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며 로자 아주머니가 키우는 아이들을 돌보며 살았다. 어린 모모는 일찍 철이 들었고 긍정적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모모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모모뿐 아니라 창녀의 아이들을 키우는 로자 아주머니와 양탄자를 팔았던 하밀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 주변의 이웃들. 그들은 모두 상처를 지녔고 버림받았고 고통을 견디며 살고 있다. 유태인인 로자 아주머니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힘든 시절을 보냈고 하밀 할아버지는 점점 눈이 보이지 않는다. 모모와 대화를 나누고 모모의 질문에 답을 해주는 건 모두 그들이다. 정확한 나이를 몰라서 학교에 갈 수 없었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모모가 마주한 세상은 로자 아주머니의 말처럼 엉덩이로 먹고사는 삶이 있었고 자신과 같은 아랍인이 아닌 유대인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러나 모모는 그만의 유머로 모든 걸 소화해냈고 어린아이가 느꼈을 외로움과 슬픔을 모르는 척했다. 그런 모모를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프다.

 

“왜 세상에는 못생기고 가난하고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나쁜 것은 하나도 없고 좋은 것만 가진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244쪽)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252쪽)

죽었던 사람이 죽기 전으로 돌아가고, 자동차가 거꾸로 달리는 모습은 모모에게 최고의 감동이었다. 영화를 더빙하는 모습을 마주하면서 영화 되감기처럼 모든 걸 되감을 수 있기를 바라는,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모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현재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살고 싶었던 모모의 진심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아무리 철이 들었다 해도 아이는 아니인데. 자신의 보호자인 로자 아주머니가 거구의 몸으로 7층에서 아래로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모모는 얼마나 무서웠을까. 로자 아주머니의 병은 그녀가 두려워했던 암은 아니었지만 그대로 방치하면 식물인간으로 살 수도 있다고 의사는 전했다. 이웃들이 와서 로자 아주머니를 닦아주고 돈을 주기도 하고 의사가 다녀갔지만 희망을 갖기는 어려웠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로자 아주머니를 모모 혼자 간호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없다면 모모는 살 수 없었다. 죽음이 다가올 것을 아는 로자 아주머니는 자신을 지키고 싶어 했고 모모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로자 아주머니가 원하는 방식대로 말이다.

한 아이가 태어나 성장함에 있어 많은 이들의 손길이 필요하다. 모모를 사랑한 어른들이 있어 모모는 사랑을 아는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모모를 사랑해서 같이 살고 싶어서 열네 살이 아니라 열 살이라고 거짓말을 한 로자 아주머니, 세상의 지혜를 들려준 하밀 할아버지, 모모의 존재를 특별하게 인정해준 그들이 없었다면 모모는 웃음을 모르는 아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외당한 이들이 함께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정겹고 따뜻함이 가득하지만 이 소설은 지독하게 아프다. 모모가 조금 천천히 인생을 알았더라면 소년의 날들이 조금 길었을 텐데. 사람이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너무 일찍 알아버린 모모가 사랑 때문에 사람 때문에 지치지 않았으면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사랑받기 충분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아는 것으로도 대견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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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9-10-26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아이는 자신이 자라는 환경 때문에 일찍 철이 들기도 하죠 그렇다고 아이다운 마음이 다 없는 건 아닐 거예요 모모 둘레에 있는 사람도 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지만 모모를 사랑해서 다행이 아닌가 싶어요 지금은 가진 사람이 더 아이한테 사랑을 주지 않기도 하잖아요


희선

자목련 2019-10-30 17:38   좋아요 1 | URL
그래도 아이가 일찍 철이 드는 건 속상한 것 같아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천진난만하게 성장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