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돼가? 무엇이든 -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 이경미 첫 번째 에세이
이경미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하루하루를 기록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정성을 들이지 않더라도 쓰는 동안 하루를 돌아보고 감정을 정리하는 일은 일정량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습관처럼 쓴다고 해도 어렵다. 인생의 소중한 날, 슬픈 날은 기록하지 않아도 가슴에 새겨진다. 일기를 쓴다는 건 나를 기록하는 일이다. 나 외에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긴다. 기억력이 좋지 않은 이에게는 기록은 중요한 정보이며 제법 시간이 지난 후에 마주하면 호탕한 웃음을 선물하기도 한다.

 

 남한테 칭찬을 받으려는 생각 속에는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다. 혼자 의연히 선 사람은 칭찬을 기대하지 않는다. 물론 남의 비난에도 일일이 신경 쓰지 않는다. (132쪽)

 

 지나고 보면 다 별거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걸 어느 순간 알게 됐다. 호기롭게 말로만 그런 경우도 있지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때의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때의 나에게 잘했어, 괜찮아라고 말을 건넬 여유가 생긴다. 쓸데없는 말들이 이어지는 걸 보니 내게 이경미의 『잘 돼가? 무엇이든』​가 나쁘지 않았나 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런 종류의 에세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런 종류란 흥행 영화, 드라마로 대중에게 알려진 이들의 글이라는 거다. 어떻게 보면 괜히 부러워서 심술을 부리는 모양이다. 이경미 감독의 영화는 보지 않았다. 안면홍조증에 걸린 배우 공효진에게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작품의 감독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다. 그보다는 방송에서 단편영화를 촬영하는 걸 보여주는 프로를 통해 <아랫집>을 보았을 뿐이다. 기이하면서도 신선하고 놀랍다고 생각했다.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의 글은 역시 감각적이라고 해야 하나.

 

 누군가에게 제목처럼 ‘잘 돼가? 무엇이든?’라고 묻는다면 ‘응, 잘 돼가고 있어. 완벽해!’라고 답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처럼 ‘그냥 그래’, 혹은 ‘생각처럼 안 돼서 힘들어’ 하고 답하는 이가 훨씬 많겠다. 예상했겠지만 그냥 사는 이야기다. 그냥 사는 이야기인데 내 이야기 같기도 하고 내가 아는 어떤 이의 이야기 같아서 웃기도 많이 웃고 고개를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나중에는 나도 엄마가 있었으면 좋겠다 속상해했다.

 

 백인 공포증이 있었지만 13살 연하의 백인과 결혼했고 어쩌다 보니 영화학교에 입학했고 시나리오가 안 써져서 죽을 것 같아 악몽을 꾸고 짝사랑하는 이에게 고백도 못 하고 같이 술을 마시고 스크립터로 일할 때는 밧데리를 가져다 달라는 감독의 말을 박대리로 알아듣고 스텝들에게 박대리를 외치고 아빠랑 싸우다가 상추로 맞은 이야기. 진짜 인간 이경미 감독의 소소한 일상이자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다. 블로그의 비공개 카테고리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글들을 공개로 돌려 짠하고 보여주는 거랄까. 그런 느낌이었다. 순간 궁금해졌다. 비공개가 공개로 바뀌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채널예스에서 ‘이경미의 어쨌든’이란 칼럼으로 연재를 한 글을 제외하면 말이다.

 

 유머를 장착한 진솔한 글을 읽다 보면 이경미 감독에겐 영화, 시나리오, 가족이 전부라는 걸 알게 된다. 힘겹고 고통스럽지만 좋아하는 일과 든든한 응원을 하는 지원군이 있으니 그녀는 행복한 편이다. 나는 그녀가 부모님과 나누는 정겨운 대화가 너무 좋았다. 아니, 부러웠다. 이상한 소리를 들은 고3 딸을 데리고 광복절에 구마 사제에게 데리고 가고 딸의 손목 염증이 걸려 맥 짚어주는 할아버지가 처방한 여섯 개의 구멍이 있는 스티커를 몸 여기저기 붙이고, 웨딩드레스 대신 원피스 입겠다는 딸 때문에 9일 기도에 들어 가고, 애정이 담긴 잔소리를 문자로 보내는 엄마라니.

 

 입은 꼭 다문 채 점점 마르고 새까맣게 변해가는 나를 본 뒤로 엄마는 매일 밤 “편안히 잘 자라” 문자를 보내주었다. 어두운 망망대해 위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때, 엄마의 문자는 그날 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저 문자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211쪽)

 

 한때는 잘 살고 싶었다. 소위 남들처럼 행복하게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잘 산다는 게 뭔지, 남들처럼은 또 뭔가 하고 따져보게 되었다. 내가 사는 건 내 삶이지 남들이 사는 삶이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알았으니 이제 나의 판단과 가치를 믿고 살아간다. 그러니 예전보다 편안해졌고 부질없는 욕심도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내려놓음, 비움의 단계에 이르렀다는 말은 아니다. 오해하지 말길. 좌절하고 질투하고 화내고 버티는 중이니까.

 

 그동안 살면서 깨달은 점 하나는, 선의와 도덕성이 아무리 충분해도 나와 같은 입장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온전한 동의와 공감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살아온 배경이 제각각인 우리. 그러나 인생은 덧없이 짧고, 세상이 변하는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빠르고, 성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시대에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아등바등 버티기는 다 마찬가지다.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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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19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밧데리!박대리....아 그 순간 얼마나 부끄럽고 황당했을까요 하지만 돌아보면 웃을수 있고 그게 인생인가 싶네요

자목련 2018-08-20 17:19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소소한 실수와 민망한 상황들의 집합체가 인생이겠지요. 이 책에는 그런 에피소드가 몇 개 더 등장하는데 넘 웃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