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 미천한 것, 별 볼일 없는 것, 인간도 아닌 것들의 가치와 의미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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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사구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이란 치기넘치고 득이양양한 한 권의 비합서적으로 운동권 논쟁을 한획으로 정리했던 내공을 접했던 사람이라면, 이진경이라는 이름을 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후에 그가 '서사연'의 맥을 잇는 '연구공간 수유-너머'로 돌아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다시한번 사회구성체론의 신성이 어떤 역할을 해 주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에는 맑스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들뢰즈를 들고 기우뚱하게 세상에 걸쳐 있는 폼에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그 내공이 어디 가는 건 아니라는 건 이후의 연구결과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증명되었다.

 

한때의 맑시즘 투사가 아나키스트의 혐의를 받는 들뢰즈를 번역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변졀(?)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든지 말든지. 이진경은 많은 책을 썼고, 정치적인 사안에 나름의 희안하(?) 방법으로 개입했으며, 얼마전까지만 해도 제주도 구럼비를 쏘다니다 왔다.

 

이 책은 그의 이런 지적, 정치적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일종의 정신적 탐색 목록으로 보인다. 사회과학에서 생물학 그리고 들뢰즈 철학, 최신의 정치철학까지.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말자. 이 책이 무지무지하게 어렵거나, 철학 개념으로 도배된 책은 결코 아니니 말이다. 공부가 깊어진 사람일수록 '지상의 언어'를 더 심오하게 부리는 법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런 생각이 들 것이다. 다음은? 도대체 이 '불온함의 목록'들은 언제 '철학'이 또는 '정치'가 될 것인가? 이들 '불온한 것들'이 언제 초리얼(hyperreal)한 이 2MB시절에 리얼하게 등장할 것인가? 결국 그의 사유 전반은 여기 맞닿아 있다. '변혁의 전망 그리고 그 주체' 결국 맑스에서 시작해서 다시 맑스로?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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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췌와 참고자료, R-Commentary]

1장 불온성이란 무엇인가?

불온성: 기분 혹은 감정

[25]불온성이란 오히려 수나 힘 같은 양적 지표에 반비례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좀 더 세심하게 보면 초기에 아주 [26]작은 수였을 때는 보이지 않고 지각되지 않기에 전혀 불온성을 느끼지 못하다가, 그것의 규모나 힘이 성장해 불편함과 불안함을 야기하면서 지각이 되기 시작하면, 가시적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야기되는 불온성의 감정이 급격히 상승해 극대화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그 행동이나 움직임이 반복되면서 패턴화되어 예측가능한 것이 됨으로써, 그리고 그것의 존재가 상식이나 통념 속에 자리 잡으며 익숙해짐에 따라 불온성의 강도가 점차 감소할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의 감지되지 못하던 때와 불온성의 강도가 상승해 극댓값을 취할 때의 차이는 불온한 것의 정체가 파악되고 이해되는 데 필요한 문턱, ‘이해가능성의 문턱’을 표시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수적으로 다수화하면서 불온성이 감소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익숙해진다는 면과 더불어, 그것들이 조직되면서 포섭할 수 있는 ‘실체성’을 갖게 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수적으로 소수일 때는 포섭해봐야 무[27]의미하거나 새로이 생성되는 다른 것들로 인해 무효화되며, 그래서 포섭할 수 없게 된다. 노동조합도 장애인단체도 조직화되어 어떤 ‘대표성’을 갖게 되면, 이제 그것만 포섭하거나 길들이면 되기에 불온성은 실질적으로 감소한다.

[R-Commentary]

1. ‘조직화→이해가능성=실체성=대표성’

2. 하나의 고전적 질문: “그렇다면 일체의 조직화는 불온성의 강도를 약화시키는가?”

불온과 불안

[28]엉뚱한 곳에서 난데없이 밀고 들어오는 자 혹은 밀고 들어와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는자가 불온성이라는 감정의 첫 번째 측면을 촉발한다면, 그 웃음의 알 수 없음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쉽게 잊히지 않는 침입자의 모호함, 거기에 담긴 모종의 불길함이 그 감정의 두 번째 측면을 촉발한다. 시간적으로는 전자가 일차적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후자가 일차적이다. 왜냐하면 나를 잠식하고 침몰시킬 것 같은 불안함이 없다면, 횡단이나 교란이나 침범은 비난이나 징치(懲治)의 대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략)

1970년대의 노동조합이나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명시적 목표는 전혀 전복적이라 할 수 없고 현행적 힘이나 수에서도 결코 상대가 되지 않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지배자나 자본가가 보이는 그토록 지나친 반응은 그것이 그들 말대로 장차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 불안이 히스테리를 일으키듯 불온한 것들은 불온함의 감정에 의해 증폭된 과잉반응을 일으킨다. 볼온성이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어떤 두려움의 예감이다.

(중략)

[32]근본적인 면에서 불온성이 야기하는 불안은 정신분석의 그것과 상반된다고 말해야 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불안을 “초자아에 대한 자아의 두려움”이라고 이해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불안은 차라리 자신이, 자아가 믿고 동일시했던 초자아가 동요하고 와해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자아로 상징되는 세계가 와해될지도 모른다는 잠재적 위험에 대한 정서적 반응, 그것이 불온성에 내포된 불안의 핵심이다.

[R-Commentary]

3. 때로는 이 ‘지나친 반응’이 불온한 자들의 죽음을 불러 오기도 하는 것이다. 이때 불온한 자들은 여전히 사회적 약자라는 범주 안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불온한 자들은 어떻게 해야 그 불온성을 전염시킬 수 있는가? 언제 약자라는 소극적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 이것도 하나의 고전적 질문인가?

4. 저들은 이 불안감을 극대화시켜 임계점을 통과시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실수’하도록 하는 것(때로 치명적인 실수?). 혹시 이것이 하나의 투쟁법, 또는 투쟁의 recipe인가?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ex) 나꼼수 등등

감각적 각성

[36]예감적 정서인 이러한 불안 뒤에서 맨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마도 ‘감각적 각성’일 것이다.

(중략)

불온한 것들이 우리의 익숙한 감각 속으로 낯설게 침입할 때 우리는 ‘감각적 각성’에 이르게 된다. 각성이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는 사건이다. (...) [38]감각적 각성이란 기존의 익숙해진 감각에선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느끼고 감지하게 되는 사건이다.

(중략)

벤야민[1]의 말처럼 [약물적 각성과는 다른] ‘세속적 각성’이 이와 구별되어 정의되어야 한다면, 일단 먹어보라고, 일단 믿어 보라고, 요컨대 일단 들어와 보라고 요구하지 않고 새로운 감각으로 각성시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약물이나 믿음을 가정하지 않고 뜻하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는 것, 그런 식으로 세상의 비밀을 보게 하는 것.

불온한 자들, 어떤 동의도 구하지 않고 우리의 경계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들이야말로 이런 세속적 각성을 가능하게 하는 계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39]불온한 것들이 야기하는 불편함과 불안함을 긍정할 수 있을 때, 그들에 매혹되어 그들이 이끄는 미지의 세계로 이끌려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발생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감각적 각성일 것이다.

(중략)

인간의 혁명,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감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사적 소유의 지양은 모든 인간적 감각들과 속성들의 완전한 해방이다” 혁명을 위해서 현실보다 한발 앞서 수립해야 할 것은 바로 ‘감성의 코뮨 권력’이라고 하는 타니가와 간[2]의 말 또한 바로 이런 뜻이었을 것이다. 이런 감각적 각성이 오기 전에 뜻하지 않게 세계가 먼저 바뀌는 사건도 있을 것이다. 그 경우 혁명을 긍정하는 자들이 그 바뀐 세계 속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이미 닥쳐온 혁명 속에서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적 각성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40]까? (...) 경계를 유지하던 오래된 감각을 뒤집는 전면적인 감각적 각성의 사건 (...) 아마도 이것이 혁명을 꿈꾸는 자들이 불온한 자들에게 쉽게 매료되는 이유일 것이고, 혁명의 정치학이 불온한 자들의 존재론에 쉽게 침식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R-Commentary]

5. ‘전면적인 감각적 각성의 사건’이 불온한 자들의 존재론에 머물 것인가, 혁명의 정치학으로 진화할 것인가? 문제는 이것이다. 존재론에서 혁명론으로 가는 그 길목에서 감각적 각성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조직론은? 전략과 전술은? 아, 위험하다. 혁명이여.

2장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존재와 존재자: 존재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47]존재와 존재자는 다르다. 존재자가 존재하지 않을 때도 존재자는 존재자다. “그 산엔 곰이 한 마리도 없어”라는 말은 곰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지만, 그 경우에도 ‘곰’은 곰이라는 존재자임이 분명하다. 특정한 규정을 갖는 한, 존재자는 존재하는가 여부와 무관하게 존재자다. 존재하는가 여부와 무관하게 표상되는 명사적 실체다. 반면 존재는 동사적이다. 존재하는 한에서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에서처럼 어떤 존재자인지 규정할 수 없는 경우에도 존재하는 것은 존재한다. (...) [48]존재가 드러나게 하려면 존재자가 말하기를 중단해야 한다. 존재자가 말의 뒤편으로 물러서야 하며, 말이 존재자와 거리를 두고 멀어져야 한다. 말이 존재자를 따라 말하길 그치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존재자의 형상을 지울 때에야 존재가 드러날 수 있다.

(...) “시는 침묵이다.” 존재는 그 침묵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R-Commentary]

6. 존재는 침묵 속에서 드러나기도 하지만, 한없는 소음, 대중의 잡담, 수다를 통해 도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다음 발췌문에 나오는 논의 참조. 그렇다면 침묵과 수다는 어떤 관계성 안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인가?

[50]시인을 부러워하지만 결코 시인이 될 수 없고 무위의 언어에 감탄[51]하지만 결코 무위의 언어를 꿈꿀 수 없는 자가, 존재자 저편의 침묵에 이르기 위해 찾아야 할 길은, 침묵과 그 반대편을 향하는 이 길이 아닐까 싶다. 시적인 고요와 고독의 침묵, 반대로 이 소란스런 소음을 반복해서 섞고, 최대한 밀고 감으로써 침묵 속의 존재에 도달할 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소란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존재자의 안정성을 와해하는 곳까지 밀고 가는 것 (...) 소음마저 모두 싸안는 어떤 소리의 평면

(...) 침묵으로 존재자의 형상을 지우며 오는 목소리와 존재자의 형상을 뒤섞어 지우며 오는 목소리는 차라리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리라[는 것]

(중략)

[52]이 경우 존재론이란, ‘인간’을 뜻하는 인칭적 보편성을 통해 인격/인칭을 초월한 보편성에 도달하고자 하기보다는, 인격을 갖지 않는 ‘보잘것없는’ 것들을 통해 그것들을 하나로 묶어가며 ‘우리’를 침몰시키는 어떤 일반성을 그리는 것이 될 것이다.

[R-Commentary]

7. 이것은 차라리 ‘횡단성’(traversité)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지 않겠는가?

존재론의 장소

[53]존재란 모든 존재자에게 공통된 어떤 성질을 뜻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어떤 유(상위 범주)를 뜻하지도 않는다. 존재는 차라리 그런 공통성질이 사라지고 지워지는 곳, 그런 유적 동일성이 사라지는 곳에 있다. (...) ‘존재하다’라는 말이 하나의 단어로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있음’이라는 어떤 공통성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공통성도 갖지 않아 모든 차이를 담을 수 있는 미규정성 때문이다. 존재란 모든 존재자의 규정성이 녹아드는 하나의 거대한 심연이다.

[R-Commentary]

1.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자로서 들뢰지앙다운 진술이다. 여기서 ‘공통성’은 ‘일의성’과 구별되어야 하겠다.

[55]존재한다는 것은 존재자에게 발생하는 동사적 사태다. 내가 존재한다, 저기 나무가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는, 무엇이 ‘나’란 말에 ‘존재하다’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지, 무엇이 저 나무를 존재하게 해주는지를 묻는 것이다.

(중략)

[56]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차라리 이런 점에서 그것을 존재하게 하는 이 조건들과 같은 외연을 갖는다고 해야 한다. (...) 따라서 존재란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는 조건 자체, 그런 조건의 절대적 미규정성이다.

존재의 그 미규정성은 어떤 규정성도 결여한 텅 빈 상태라기보다는, 반대로 모든 규정성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해야 한다. (...) 존재의 미규정성, 그것은 규정의 절대적 결여가 아니라, 절대적 과잉을 뜻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자를 향해, 모든 규정성을 향해 열[57]려 있는 절대적 과잉.

[58]존재론의 장소는 존재자가 보이지 않는 저기 어딘가에 따로 있는 ‘심연’이 아니라, 바로 존재자가 있는 곳이고, 그 존재자들이 만나는 곳이며, 또한 갈라지고 헤어지는 곳이다.

(...)[59]존재론들은 우리에게, 우리의 존재에 어떤 방향과 규정을 부여할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다른 존재자와 만날 것인지, 혹은 다른 어떤 존재자와 만날 것인지는 각각의 존재론이 존재로 가기 위해 선택한 길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존재란, 우리의 존재의 지속이란, 혹은 우리의 삶이란 항상 그때마다 자신이 더듬어 찾아온 그런 방향에 의해, 존재를 사유하는 그 출발점에 따라 이미 앞서서 규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론은 레비나스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윤리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항상-이미 윤리적이다. 그것은 ‘존재’라는 말의 초역사적 포괄성으로 인해 흔히 표상되는 것과 달리 처음부터 역사적이다. 그것은 또 존재라는 말의 아득한 추상성이 표상하게 하는 것과 달리 항상-이미 구체적인 삶의 방식과 결부되어 있으며, 그것의 [60]변환을 위한 집합적 행동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충분히 정치적이다.

[R-Commentary]

9 하지만 이때 ‘존재’는 ‘존재자’와 동일하지도 유사하지도 않다.

10‘존재’는 그것이 구체적인 삶의 ‘표현’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고 역사적이지만 그 자체로는 오히려 ‘비역사적’이다. 이것은 경험적으로 초월적이다.

어떤 존재론?

[64]존재론은 정의상 우리의 존재를, 혹은 우리의 삶을 포괄하지만, 사실 우리는 존재론 속에서 살지 않는다. 반대로 존재론이, 아니 수많은 존재론이 우리의 삶 속에 있으며, 그 삶에 의해 방향 지어지고 분화되고 이론화된다. 삶이 그리는 선의 궤적 안에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방향을 잡는다. 따라서 어떤 존재론을 할 것인지는 묻지 않는 순간에도 이미 항상 물어지고 있으며, 그에 대한 답이 제시되기 전에 답을 알고 있다. 그렇게 이미 주어진 방향에서 존재에 대한 사유는 시작된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68]결코 통상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어떤 특이성을 갖는 것이 탁월한 것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를 잠식해 들어갈 때, 그것이 우리를 존재론적 일반성으로 인도한다. 대개는 ‘미천함’의 부정적 감정으로 인해 눈을 피해왔기에 우리의 눈을 잡아끌지 못하던 어떤 특이성의 ‘평범함’이 역으로 모든 ‘평범한 것’의 어떤 특이성을 보게 해줄 때, 그리하여 평범함의 일상적 시선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해줄 때 우리는 모든 존재자를 끌어안는 어떤 특이성과 대면하게 된다.

[69]인간의 위대함이나 탁월함에서 시작하는 보편화란, 그것에 포함될 수 없는 것들, 그것에 의해 어두운 부정의 색이 칠해진 어떤 대상을 지우고 제거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포괄성을 완성하려 한다. 이는 인간이라는 주체로부터 ‘정념적인(pathological) 것’을 제거함으로써, 다시 쓰면 ‘병리적(pathological) 것’을 소거함으로써 선험적 주체라는 도덕적 보편성에 이르고자 했던 칸트에게서도 다르지 않았다. 이 선험적 주체란 라캉의 말처럼 ‘주이상스(Jouissance)’라는 ‘실제적’ 대상이 제거된 주체라는 의미에서 ‘텅 빈 주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적 특이성들이 비루한 결함으로 간주되어 제거된 주체라는 의미에서 ‘텅 빈 주체’리고 해야 할 것 같다.

[R-Commentary]

11 에피쿠로스적 의미에서 ‘선별’과 ‘측정’은 여기서 말하는 칸트적인 ‘선별’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후자는 ‘부정적’이며, 전자는 ‘긍정적’이며 디오니소스적이다.

3장 장애자: 존재, 장애의 그늘 속에 있는 것

장애의 그늘

[82]존재는 장애자에 대한 동정이나 장애에 쉽게 실리는 슬픔의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 그것은 특정한 존재자의 형상에 실린, 보는 자의 감정일 뿐이기 때문이다. 장애자이 몸을 통해 존재는 자신을 조용히 드러내지만, 장애자를 보고 장애에 눈이 매인다면 존재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우리의 눈이 장애자에 매이지 않을 때에만 그 드러남과 만난다.

(...)사실 세상과의 불화가 존재하는 곳에서 우리는 모두 장애자다. (...) 따라서 세상에 불화가 존재하는 한, 그 불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한, 그 세상에 사는 자들은 모두 장애자라고 해야 한다.

[R-Commentary]

12 여기서 ‘사유’의 특권이 나타나면 안 될 것이다. 물론 ‘감각’의 소외를 통해 역으로 ‘존재’를 말하는 방식도 불완전하다. 이제 이진경은 아래에서와 같이 그것을 어떤 집합적 감각으로 파악하려 할 것이다. 들뢰즈라면 개별자의 타자성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폐를 끼치는 자’

‘폐’를 지우는 것

[89]교환이 지배적인 사회,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선 누구든 남에게 신세를 지며 산다는 것, 폐를 끼치며 산다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다. 그래도 돈이 없는 자들은 좋든 싫든 남에게 폐를 끼치고 산다는 것을 자각하며 산다. 폐를 지워줄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폐는, 우리의 기대어 있음은 이처럼 지불수단의 부재, 지불능력의 결여를 통해 드러난다. 반대로 돈이 많은 자들은 자신이 항상 타인들에게 기대어 산다는 것, 폐를 끼치며 산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한다. 지불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자신이 끼치는 모든 종류의 폐를 미리 지우기 때문이다.

그늘 속의 우주

[91]모든 존재자는 항상-이미 다른 수많은 존재자에 기대어 그것들에 ‘폐를 끼치며’ 살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장애자다. (...) 이 경우 장애는 존재 그 자체와 결부된 것이라는 점에서 존재론적 장애다. 이런 점에서 모든 존재자는 ‘동등하다.’ (...) 장애자란 이렇게 하나로 묶인 모든 존재자를 지칭한다. 장애자를 통해 우리는 하나의 ‘존재론적 일반성’에 도달한다.

[R-Commentary]

13. 이진경-랑시에르? 이진경-레비나스? 후자보다는 전자가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장애의 선물

[97]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를 본다는 것은, 폐를 끼치는 자에서 눈을 돌려 그가 폐를 끼치는 자를 보는 것이다. 그가 폐를 끼치도록 해주는 자들의 거대한 연쇄가 폐를 끼치는 자에게 주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때 기댐과 가져감은 의도 없는 ‘줌’으로 전환된다. 그것은 방향을 바꾸어서 보는 것이고, ‘끼침’을 ‘줌’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 경우 줌과 받음, 끼침과 끼치게 해줌은 비대칭적이며,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다. 반면 존재와 존재자 간에는 거대한 비대칭성이 있다. 존재는 각각의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주고, 그것이 존재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준다. 존재[98]자들의 거대한 연쇄가 각각의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떠받쳐준다. 존재자는 그러한 ‘줌’에 기대어 있다.

(중략)

[99]장애가 있는 곳에 선물이 있다. 모든 존재자는 자신이 폐를 끼치는 모든 타자로부터 존재라는 선물을 받고, 자신에게 폐를 끼치는 모든 타자에게 존재를 선물하는 연쇄에 가담한다.

[R-Commentary]

14. 줌(giveness)의 문제. 오래된 문제. 비대칭성도 마찬가지. 그런데 여전히 존재의 ‘줌’은 분명하지 않다. 왜 그럴까?

문턱과 장애자

문턱과 혁명

[111]계급이론은 문턱의 이론이다. 그것은 장애의 정치학에 속한다. (...) 혁명이란 문턱을 제거하려는 집합적 운동이다.

(중략)

[112]근본적으로 하나인 존재론의 평면에 적대가 들어앉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적대, 그것은 문턱을 유지하려는 자와 제거하려는 자 간에 존재하는 관계다. (...) 적대란 이해관계가 상반되는 [113]두 집단의 대칭적 대립이 아니라, 문턱을 설치하고 유지함으로써 흐름과 이동을 저지하려는 자와 문턱을 제거함으로써 흐름과 이동을 자유롭게 하려는 자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 혁명이 근본적으로 탈영토화 운동인 것은 이 때문이다.

[R-Commentary]

15. 조심해야 할 것은 ‘흐름과 이동의 자유’가 자본주의라는 절편에 의해 주도될 때는 허위-탈영토화의 경향성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가타리의 말처럼 이러한 허위-탈영토화를 더 앞서 빨리 가야한다.

4장 박테리아: “우리는 모두 박테리아다”

존재와 생성

[122]존재란 생성의 결과를 표시하는 어떤 개체의 지속이다. 어떤 규정을 갖는 존재자의 지속이다. 그 규정으로 명명되는 어떤 상태의 지속이다.

존재자의 존재란 ‘지속’의 형태로 포착된 생성이다. (...) 베르그손이 말하는 ‘지속’이 생성이요 변화임을 안다면, 이렇게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존재의 본질은 생성이다.

따라서 생성만이 존재한다. 어떤 개체의 ‘출현’과 그 개체의 ‘지속’이라는 구분 속에서 생성과 존재로 대비되었지만, 그래서 흔히 전자는 불연속적 비약이고 후자는 연속적 상태로 거기 대비되지만, 양자 [123]모두 생성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평면 위에 있다고 해야 한다.

[R-Commentary]

16. 그래서 사실상 ‘존재’는 생성의 ‘표현’이거나 그것의 생산일 뿐이다. 존재가 ‘대칭성’을 함축한다면, 생성은 ‘대칭성 깨짐’을 의미한다. ‘실재’는 항상 이 대칭성 깨짐의 상태에서 ‘지속’되므로, 항상 잠재적인 ‘파국’을 내장할 수밖에 없다. 물은 언제나 물이지만 얼음은 언제나 얼음일 수 없다.

[125]순수존재란 모든 규정성을 삭제한 무가 아니라, 수많은 규정성으로 가득 찬, 그래서 어느 하나의 규정을 들어 말할 수 없는 그런 무일 것이다. 그것은 생성이나 존재자의 출현을 설명해줄 어떤 배경이 아니라, 이미 진행된 어떤 생성, 그 결과의 지속일 뿐이다. (...) 존재와 생성을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성을 통해 존재를 이해하는 것, 존재와 무의 변증법으로 탄생하는 어떤 종합으로 생성을 위치 짓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존재에 앞서는, 항상 새로이 시작되는 ‘기원’으로서 생성을 위치 짓는 것, 그것만이 존재와 생성을 이어주는 끈일 것이다. 존재조차 생성으로 정의해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R-Commentary]

17.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18. ‘새로이 시작되는 기원으로서의 생성’-이것은 생성을 ‘배치’ 또는 ‘하나의 거대한 주사위 놀이’로 보게 하는 것이다. 관점의 전환.

[126]존재자의 탄생, 그것은 사실 매 순간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진다. 그것은 이질적이고 우연적인 만남에 의해, 뜻하지 않은 실수나 실패에 의해 엉뚱한 곳으로 표류하는 선을 그리며 이루어진다. 생성을 통해 존재를 사유한다는 것은, 존재자의 존재란 이런 이질성과 우연성과 외부성을 항상-이미 포함하고 있음을 함축한다. 그 이질적[127]인 것들이 만나며 결합해 하나의 개체로 개체화되는 것을 통해, 그런 개체화의 지속을 통해, 그 지속이 생산하는 공동성에 의해 존재자는 존재하게 되고 그 존재를 지속할 수 있다. (...)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질적인 것, 외부적인 것을 추방하고 잘라내는 끝없는 배제의 푸닥거리는 결코 유지될 수 없는 환상이다.

[R-Commentary]

19. 우리는 ‘우발성’과 ‘우연성’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필연성의 상보물이지만 하나는 그렇지 않다. 여기서 이진경은 형이상학과 정치학 사이에서 담론을 진행한다. 이 책 전체가 그러하다고 보이지만.

개체화와 개체성

[130]모든 것은 분할가능한 부분들로 이루어졌다. 분리되어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부분들로. 애초의 ‘전체’란 그 분할 가능한 것들의 집합체였던 것이다. (...) 모든 개체(individual)는 분할가능한(dividual) 것들의 집합체다. 모든 개체는 복수의 분할가능한 요소들이 무리[衆]지어 형성된 집합체고, 항상-이미 그런 무리로서만 존속하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개체는 ‘衆-生(multi-dividual)’이다.

(...)모든 개체는 복수의 분할가능한 요소들이 모여 하나의 개체로 개체화된 결과다. 개체화가 작동하는 모든 지점마다 개체는 존재한다. (...)개체화에 의해 존재하고 지속하게 된 개체는 모두 진정한 개체다.

[R-Commentary]

20.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개체는 일종의 ‘창발’의 결과다. 하지만 이 유기체는 더는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바닥’의 혼돈에 잠겨들 수 있는 불안한 개체, 왼쪽으로든 오른쪽으로든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맹목적인 자유(필연성에 붙잡혀 있다는 의미에서 맹목적인)를 추구하는 개체다.

박테리아의 평면[3]

[132]모든 개체는 공동체다. 개체화 과정에 말려들어간 복수의 요소로 구성된 공동체다. 모든 공동체는 개체다. 제각각의 이질적 요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개체화에 의해 존재하는 개체다.

[R-Commentary]

21. 이 절을 더 심도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물학, 진화론에 대한 더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

[133]경쟁이상으로 현실적인 공생이 있다. 그것이 원핵생물에서 진핵생물로의 진화, 그리고 단세포 생물에서 다세포 생물로의 진화에서 매우 결정적 계기를 이룬다는 것은 지금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핵의 발생사가 아직 해명되진 않았다고 해도, 원핵생물에 없는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가, 어떤 세균이 다른 세균을 먹었지만 먹힌 것인 죽지 않은 채 내부에서 살아남아 공생하게 된 결과임은, 이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확고한 사실에 속한다. 미토콘드리아의 DNA가 핵의 DNA보다는 프로테오박테리아라는 원핵생물의 그것과 더 유사하며, 엽록체의 DNA 역시 핵보다는 남세균의 DNA와 훨씬 가깝다는 사실은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가 잡아먹힌 세균이었음을 뜻한다.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는 이중막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들이 다른 세균에게 잡아먹힐 때 잡아먹은 세균의 원형질막이 한 겹 더 둘러쳐지며 만들어진 것이다. 유글레나의 엽록체는 삼중막을 가지고 있으며, 홍조문에 속하는 쌍편모조류에는 사중막을 가진 엽록체도 있다. 이는 공생관계를 형성한 세균을 다시 잡아먹었지만, 역시 살아남아 2차, 3차의 공생관계를 형성했음을 의미한다.

잡아먹힌 세균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을 잡아먹은 세균 안에서 산소를 먹어치워 에너지(ATP)를 제공하고, 먹은 세균은 그것에 산소를 제공하고 그것을 보호하며 종류에 따라 이동성을 제공하는 관계, 혹은 광합성을 해서 자신을 잡아먹은 세균에게 영양을 제공하고, 마찬가지로 보호나 이동성을 얻는 관계가 공생관계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런 공생관계기에 그것들은 10억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공생은 서로의 선의를 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심지어 먹고 먹히는 경쟁과 적대의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서로 먹고 먹히는 적대적 관계가, 경쟁을 위한 선의 없는 만남이 ‘실패’에 의해 공생으로 귀착된 것이다.

(...) 19세기적 위계의 감각이 아직도 남아 있는 말인 ‘하등’ 생물의 이 역설적 역사가 보여주는 것은 가장 ‘고등’한 생물이자 가장 진화한 종임을 확신하는 인간 자신 역시 사실은 이 하등한 동물들의 거대한 집합체, 몇 겹으로 겹쳐진 박테리아들의 거대한 공동체라는 것이다. 우리[136]의 신체를 이루는 모든 세포에 포함된 미토콘드리아는 그러한 사실의, 지울 수 없는 증거다.

(...) [137]좀 더 큰 동물이 작은 것보다 더 ‘고등’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면, 좀 더 많은 수의 집합체가 적은 수의 그것보다 더 ‘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면, 단지 그 크기와 형태를 달리할 뿐인 박테리아의 집합체들 사이에 우열이나 진화의 위계를 수립하려는 시도 또한 어리석은 짓이라고 해야 되지 않을까?

요컨대 ‘종’이라고 불리는 존재자의 집합, 혹은 생명을 갖는 개개의 존재자들의 존재는 뜻밖의 실패로 끝난 만남, 혹은 뜻하지 않게 서로가 말려들어간 어떤 만남에서, 그 만남으로 인한 어떤 비약에서 시작되었다. 어느 한쪽의 죽음으로 귀착되지 않으며 새로운 분기의 선을 그리는 어떤 표류의 지속, 그것이 바로 진핵세포에서 오징어와 거북이와 인간, 혹은 미역과 은행나무에 이르는 모든 생물이 존재의 장으로 들어서게 한 결정적 문턱이었다.

[R-Commentary]

22. 따라서 ‘죽음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다만 ‘생명의 도약이 있다’고 해야 한다. 여기가 로두스다!

공생과 공동성

[137]개체화는 불쑥 솟아나는 어떤 것의 출현으로 시작한다. (...) 그것은 요소들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외부지만, 개체화를 통해 내부가 되는 모호한 공간에서 출현한다. 전체였던 것들을 부분으로 만드는 어떤 합체 속에서, 그 합체를 하나의 실재로 만드는 어떤 프로세스가 출현하면서 시작된다. 그 프로세스가 어떤 안정성 혹은 지속성을 가질 때 새로이 출현한 개체의 존재는 지속된다. 즉 개체는 계속 존재할 수 있다.

[R-Commentary]

23. residuum. 개체발생의 잔여.

[139]개체화에 말려들어간 요소들이 ‘하나처럼’ 공조(共調)하여 움직이고 활동함으로써 그 과정 밖에 있는 것들과 구별되는 리듬의 안정적 패턴을 형성할 때 그 요소들은 하나의 또 다른 개체로 개체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드나듦이 가능한 열린 상태에서, 초월적 제3자를 가정하지 않아도 어떤 개체들이 모이며 ‘상위’의 개체를 구성하는 것은 이런 리듬적 공조를 통해서다. 리듬적 공조는 일시적 발생인이 아니라 개체가 존재하는 한 계속되는 지속적 발생이다. (...) [140]리듬적 공조가 중단되어 더는 하나처럼 움직이지 못하는 순간 그 개체는 개체이길 중단하고 해체되고 만다.

(...) 분명한 것은 행운이든 불운이든 이미 그런 개체화에 말려들어가기 시작했다면, ‘나’라고 부르던 개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함께 움직이고 함께 존속하는 이웃들 사이로 ‘나’는 소멸한다. 혹은 그 사이에서 ‘나’는 다시 탄생한다. 함께 움직이는 것, 무언가를 주고받는 관계의 지속은, 이 분할가능한 요소들 사이에 어떤 ‘공동성’을 수립한다.

[R-Commentary]

24. 따라서 유기체든, 무기물이든 평형성을 지속한다는 것은 ‘진동’한다는 것이고 그 ‘진동’의 짧은 주기마다 ‘잔여’를 남긴다는 것이다. 잔여가 존재하지 않으면 개체는 해체된다.

[141]에너지 차원의 항상성이 미세한 시간적 차이를 두고 각 요소의 작용이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어떤 결과를 주고받으며 요소들 사이에 공간적 공시성을 형성한다면, 리듬적 차원의 안정성은 공조에 의해 하나의 시간을 발생시키면서 신체적 ‘단수성(단일성)’을 형성한다. 이 ‘단수성’은 스피노자가 잘 말해주었듯이, 항상-이미 복수의 요소가 공동으로 작용하여 산출하는 결과의 단수성이고, 그 단일한 결과에 의해 소급적으로 정의되는 단일성이며, 현행적인 결과에 의해 소급적으로 구성되는 잠재적 개체성이다.

[R-Commentary]

25. 개체의 발생과 시간의 생성은 함께 가는 것인가? 아니면 시간은 잠재성의 차원에서 먼저 나타나고, 개체의 차원에서 소멸하여 공간화되는 것인가?

면역과 개체성

[144]공동체가 면역이라는 개념과 대쌍을 이룬다는 점을 어원학적 방식으로 지적했던 것은 에스포지토[4]였다. 공동체를 가리키는 코무니스(communis)라는 말은 ‘증여’, ‘의무’를 뜻하는 무누스(munus)에 ‘함께’, ‘결합’을 의미하는 com(cum)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증여의 의무를 통해 개인이 타자와 결합된 관계, 증여를 통해 타자에게 자신을 여는 관계, 그리하여 타자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관계를 표시한다. 반면 면역을 뜻하는 임무니스(immunis)는 동일한 munus에 ‘면제’를 뜻하는 임(im)이 붙어서 증여의 의무로부터 면제되었음을, 면제를 통해 자기를 보호하는 것을 표시한다.

(...) [145]증여의 의무가 공동체 내부의 관계를 규정한다면, 의무의 면제는 공동체와 그것의 외부자 간의 관계를 규정한다. 전자가 복수의 요소가 공동체로서 개체화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면, 후자는 개체로서의 공동체가 자신의 개체성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148]어떤 생물도, 아니 [149]어떤 개체도 개체화의 범위를 갖는 한, ‘자기’와 비자기를 구별하는 경계를 갖는다고 해야 한다. 다만 그 경계를 유지하는 메커니즘이, 막이나 껍질 같은 외연적 형태를 취하는 것이 있거나, 그 형태에 더해 내부로 들어온 것에 대해 특이적으로 반응하는 체계가 있거나 하는 구별이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자기’라고 불리는 개체화의 경계를, 원생동물이나 식물 또한 동물과 마찬가지로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외부적인 어떤 요소를 받아들이거나 적극적으로 흡수하는 방식으로 열려 있으며, 따라서 가변적이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즉 자아는 어떤 불변의 실체 같은 것이 아니다.

[R-Commentary]

26. 이런 생물학적인 ‘자아’를 손쉽게 철학적 ‘자아’로 환원하거나 그 반대로 해서는 신중하지 못할 것이다. 이 둘 사이에 무슨 거대한 심연이 있는 것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밀접하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렇게 본다면 여기서 ‘불변의 실체 같은 것이 아니다’고 하는 것은 가능할까?

면역능력과 면역계

[154]능력으로서의 면역이란 이질적인 것, 외부자들과의 공존능력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무균사육 동물의 면역능력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 위생의 ‘발전’이 면역능력의 저하를 야기하여 약간의 오염이나 감염만으로도 질병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 (...) 반대로 치명적인 감염조차, 거기서 살아남은 것에게는 새로운 공생관계로 발전한다는 것 또한 잘 알려진 이야기다.

(...) 이런 점에서 질병의 관념 또한 바꾸어야 한다. 외부의 세균에 신체가 잠식된 상태로 질병을 정의하는 것은 피감염자의 신체만을 고려한 일방적 정의다. (...) 숙주의 신체에 ‘기생’하기 위해 들어간 원인균으로선 숙주가 죽는 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칫하면 자신도 같이 죽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사태다. (...) 이런 이유로 감염을 견뎌내는 경우에는 면역계의 ‘기억’에 의한 반격만 빨라지는 것이 아니라, 원인균의 독성자체도 급격히 완화되며, 죽음이나 치명상을 피해 서로 공존할 가능성이 확대된다. 서로에게 적응하는 것이다.

[R-Commentary]

27. 이 ‘적응’, 일종의 ‘투쟁하는 적응’이란 개체화가 공동체적인 개체를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인가? 과연 그렇다면 그 역도 가능한가? 즉 ‘적응하는 투쟁’ 어느 것이 더 관건인가? 적응? 투쟁?

[156]면역능력의 공백, 그것의 무능력 지대에서 면역계가 작동한다. (...) 개체화가 외부자와 만나는 지대, 만나는 방식마다 다른 외연의 경계선이 그려지고, 다른 기작의 면역계가 작동한다. (...)[157]자아와 비자아의 그 경계는, 면역능력에 의해서, 개체의 신체적 수용능력에 의해서, 다시 말하면 개체화의 개방성에 의해서 규정된다.

이런 점에서 자아란 신체적 구별로 존재하는 경우조차 확정적 실체가 아니며, 조건에 따라, 능력에 따라 가변적인 경계를 갖는다고 해야 한다.

[R-Commentary]

28. 즉 자아란 환경과의 모호한 경계지대를 감싸고 도는 ‘세속화된 아우라’이며, 그것이 곧 데카르트가 놓친 지점이라 할 것이다.

5장 사이보그: “태초에 사이보그가 있었느니라”

존재와 부재

[167]효과가 ‘존재하다’라는 동사를 가능하게 한다. 존재하는 것이 효과를 갖는 게 아니라, 효과를 갖는 것이 존재한다고 하게 한다. (...) 따라서 이러한 효과의 범위를 통해 존재한다는 말이 갖는 타당성의 범위를 규정할 수 있다. (...) 기독교도에게 신은 존재하지만, 무신론자에게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R-Commentary]

29. 이제 잘 살펴 보면, 여기서 이진경이 말하는 효과(ramification)는 실체(substance)가 아니라 거의 헛것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동=효과=가상→존재’라는 이 공식의 기원은 어딘가? 내 생각은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와 니체의 것이다.

[169]존재는 존재자가 걷어차고 뛰어간 것을 따라, 흔들고 멈춘 것을 따라 다가온다. 존재자는 자신의 효과를 통해 존재한다. 어떤 효과를 산출하며 ‘작용하는’ 모든 것은 존재한다. (...) 물론 하나의 효과를 산출하는 작용에는 복수의 요소가 참여하고 가담함을 앞서 충분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스피노자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작용하여 어떤 결과를 산출하는 것들은 ‘하나의 존재자’로 존재한다.

기계를 넘어선 기계

[172]한편 그것[사이보그]은 기계를 넘어선 기계를 뜻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기계라고 비난받는 기계를 뜻한다. 하지만 이 모두는 사이보그가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와해하고 지우는 자임을 뜻하는 것일 게다. 사이보그란 인간과 기계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다.

횡단한다는 것, 사이보그에게 그것은 이질적인 것의 결합을 뜻한다. 사이보그는 유기체아 기계, 혹은 생명과 기계라는 거대한 균열을 처음부터 가로지르며, 그 균열에 의해 분할된 것들을 ‘하나로 모은다’.

최초의 사이보그

최[181]초의 사이보그, 그것은 처음으로 도구를 사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었던 원시인이다. 도구를 손에 들고 움직이는 인간, 그것은 기계와 유기체가 결합해 하나처럼 작동한 최초의 사이보그였다. 만약 그보다 먼저 도구를 들어 열매를 따던 원숭이가 있었다면, 혹은 도구를 사용한 다른 동물이 있었다면, 그에게 최초의 사이보그 자리를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기계’와 ‘도구’를 구별함으로써 첫 번째 사이보그의 자리를 탈환하려는 시도는 포기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이미 여러 사람이 보여주었듯이 도구와 기계를 구별해주는 뚜렷한 경계선은 없기 때문이다.

[R-Commentary]

30. 이진경의 이 논의가 겨냥하는 바는 분명해 보인다. 즉 그는 도구와 기계의 분리를 임의적인 역사적 사실로 취급함으로써 사이보그라는 후기모더니티의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을 정치적으로 하부구조 속에 정위함으로써, 어떤 변혁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다. 항상 느끼지만 이진경의 논의에는 줄기차게 지속되는 ‘혁명론’의 저변이 존재한다.

[184]사이보그의 탄생과 진화, 그것은 엥겔스가 노동이라고 명명한 이러한 작동의 산물이다. 그것은 도구라고 명명된 사물이 유기체와, 기계가 유기체와 하나의 개체로 개체화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사물과 유기체의 공생(Symbiosis)’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사물과 유기체의 ‘공진화(co-evolution)’라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이것을 제외하고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노동이 혹은 인간이 처음부터 이[185]질적인 것들이 섞이는 이런 혼성과 혼합의 지대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을 것이다.

인간의 미래

[191]사이보그는 인간 신체의 외연으로부터 개체화의 경계를 벗어나려 한다. (...) 전기적 신호로 연결된 신체들, 그것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강한 의미에서 하나의 개체인 것이다. 사이보그는 이처럼 인간의 외연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경계를 부수어버린다.

인터넷과 휴대전화 등의 거대한 네트워크-신경망에 의해 연결되고, 카메라 녹음기 등 새로운 감각기관을 덧대어 장착한 채, 수많은 저장장치에 기억된 자료들을 가공하면서 하나처럼 움직이는 대중은 사이보그가 해체한 개체의 자리에서 새로이 출현한 또 다른 양상의 개체다. 거대한 집합적 신체를 갖고,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가로지르며 하나처럼 작동하는 집합적 개체, 수많은 기계와 수많은 유기체가, 모호하지만 그때마다 수렵적인 어떤 조절의 프로세스에 따라 하나처럼 움직이는 이 거대한 집합체, 그것은 거대 네트워크 시대에 새로이 출현한 집합적 사이보그의 또 다른 형상일 것이다.[5]

[R-Commentary]

31. 이 말은 ‘새로운 주체성’이라는 말로 고쳐 써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들뢰즈의 자장 안에서 ‘주체’개념을 쓰지 않고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사이보그’를 통한 주체의 존재론적 확장과정에서 ‘인간의 미래’는 혁명적 전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최후의 사이보그

오염과 변조의 존재론[6]

197]오염과 감염은 지금 시대 사이보그의 존재 방식이 되었다. 오염에 의해 자아의 경계를 잃어버리고, 감염에 의해 서 있던 곳에서 이탈하고 그 이탈로 타자들을 감염시키는 것. (...) 기계에 의한 오염, 사물에 의한 오염은 기계가, 상품이 인간의 세계 속에 비약적으로 밀려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철학자가 비판하고 경고하던 것 아니었는가! 접속의 시대가 이전과 다른 게 있다면, ‘물질성’이라는 저항의 두께가 얇아졌다는 점, ‘복사’나 ‘복제’라는 말이 일반화될 정도로 오염의 폭이 넓어졌다는 점, 그리하여 애초의 원본이 무엇인지, 복제 이전의 ‘원형’이 원래 있던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접속의 시대는 일반[198]화된 오염의 시대다.

(...) 소통은 항상-이미 오염된 정보의 소통일 뿐 아니라 오염시키는 정보의 소통이며, 따라서 오염의 소통이라고 말해야 더 적절할 것이다. 따라서 ‘소통’이라는 말은 접속의 시대를 담기엔 매우 부적절한 말이다.

(...) 소통은 없다. 오염과 감염이 있을 뿐이다. 소통은 없다. 변조와 변형이 있을 뿐이다.

(...) 변조란 오염되는 것 이상으로 오염시키는, 주어진 것을 초과하는 변형의 과정이다. 변조는 오염의 시대에 ‘나’를 구성하고 다시 구성하는 일반화된 방법이다. 문제는 오염이나 감염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염과 감염을 초과하는 변조능력을 가동하는 것이[199]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신체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것이다. ‘주체’라는 오래된 개념은 이 변조를 통해 그때마다 새로이 구성되는, 변조 과정의 결과물을 지칭하는 방식으로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R-Commentary]

32. 언제나 그렇듯이 이념이 제 역할을 하고 물러나면 전략이 중요하게 된다. 이 ‘변조능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199]‘정보’라는 말[은] (...) ‘형태를 부여하다(informare)’라는 말에서 파생되었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 그것은 어떤 것도 있는 그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특정한 형태로, 어떤 형식에 의해 포섭된 방식으로 알려주며, 그 소재 이상으로 형식을 전달한다. 알려지는 내용은 항상-이미 형식화된 내용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앞서 그랬듯이 정보란 오염이며, 항상 오염되었다는 것 (...)

[200]정보보다 먼저 형식이, 그 ‘정보’를 틀 짓는 잉여적인(redundant) 것이 먼저 전달된다. 내가 채취하여 수행하는 정보의 변조는 그런 잉여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채취한 정보를 따라다니거나 그것이 배제하는 다른 정보들과의 연결고리들에 매이고 오염되며 변조한다.

상식이라고 불리는 통념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이런저런 종류의 지식이 정보 변조라는 종합의 과정에 항상-이미 개입한다.

(...)정보변조가 항상-이미 권력의 문제인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따라서 사이보그의 작동/활동은 존재론적 층위에서 이미 정치적인 것이다. (...)[201]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떤 선을 따라갈지, 어떤 선을 그릴지를 끊임없이 다시 묻고 다시 그리는 것일 게다. 전복을 꿈꾸는 사이보그로서.

[R-Commentary]

33. 이 ‘선’은 분명 ‘전복의 선’이다. 이미 정치적인 개체성으로서의 사이보그-우리는 무엇보다 ‘신체’의 층위에서 이 선을 그려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시 전략이다. 아니면 혹시 나는 이 ‘전략’이라는 단어를 옛 방식대로 이해하면서 질문의 포지션을 잘못 정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전략’, 그 사이보그의 전략은 어떤 것인가?

6장 온코마우스: 시뮬라크르의 정치학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들

인간, 목적론적 초월자

[215]인간이 이런 환상[목적성의, 초월성의 환상] 없이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런 것인지 이해하긴 어렵지 않다. 하지만 환상은 실재를 가린다. ‘인간’의 얼굴로 목적성의 부재를 가리고, 목적의 초월성으로 목적과 수단의 내재성을 가린다. 자신이 많은 경우 수단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다는 오인을 야기한다. 그것이 존재를 보이지 않게 한다. 인간은 존재의 의미에 관심을 갖기에 존재의 의미를 보지 못하는 존재다.

[217]목적론은 미래/도래의 시제를 통해 현재와 과거를 규정한다. 현재에 항상 작용하고 있는 미래, 그것은 목적의 시간성이다. 도래할 것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형성할 때, 그 목적의 시간성 속에서,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은 목적성의 환상 속에 빠져든다. 언제나 목적일 수 있으리라는 환상의 세계 속으로 불려 들어간다. 그러나 존재에 눈을 돌린다는 것은, 때로는 목적으로, 때로는 수단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존재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일 게다. 그것은 때로는 목적으로서, 때로는 수단으로서 현재를 현재로 긍정하는 것일 테고, 그때그때의 현재에 매진하는 것이다. 그러한 현재를 통해 형성되는 어떤 포텐셜의 잠재성을 믿는 것이다. 미래란 그 잠재성의 포텐셜이 도래할 어떤 사건들과 만나며 펼쳐지는 가능성의 장일 것이다. 수다하게 열린.

[R-Commentary]

34. 윤리학, 또는 정치학으로 가는 문턱. 하지만 이 문턱에서부터 잠재성의 포텐셜이 어떤 선을 그릴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과연 어떤 선인가? ‘전복의 선’이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수단으로서의 생명

원본과 복제

[231]복제는 원본을 모델로 하지만, 항상 원본을 초과하는 경향을 갖는다. 온코마우스 또한 그러하다고 말해야 한다. 생쥐를 유전자 조작을 통해 복제하여 생산하는 것은, 원본에 없는 어떤 것을 강화하기 위해서다. (...) 암세포를 갖고 태어난 생쥐란 보통의 생쥐보다 명백히 유용한 강점을 갖는다. 여기서도 복제인 온코마우스는 원본인 생쥐보다 좀 더 나은 강점을 갖는다.

[235]질적인 것이든 양적인 것이든, 복제의 초과는 복제가 원본과 경쟁하며 원본을 모방하던 사태를 넘어선다. (...) 원본은, 더는 복제가 지향하는 목표가 아니다. 차라리 원본은 복제의 소재가 되거나 변형의 대상이 된다. 복제는 원본으로부터 이탈해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하며, 원본과의 거리를 통해 자신의 원본됨을 주장한다. 복제가 원본을 초과하는 또 다른 원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R-Commentary]

35. 이 단락에서 중요한 것은 ‘거리’라는 이 개념으로 보인다. 다른 구절들은 익숙하다. ‘거리’ ... ‘거리를 통해’ 원본이 된다, 는 것. 이때 ‘거리’는 무엇인가? 망각? 또는 혼잡함과 소음? 백색희망? 중요하다, 중요하다...

물질성의 저항: 목적론의 외부

[239]절망을 직시하고 그 절망을 긍정하는 것, 살아 있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대를 그 절망에 거는 것이 나을 것이다. 재난에, 합목적성을 이탈하여 되돌아온 물질성의 저항에, 거대하게 증폭된 이탈에, 정신의 간교함을 흘러넘치는 그 거대한 범람에 몸을 싣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그것이 이성의 한 형식이라고 덧붙일 때조차 절망의 이유는, 외부성은 그것을 이탈하고 벗어날 것이다. 정신으로, 이성으로 환원불가능한 그 무능력의 지대를 주시하고, 그것을 다시 또 우리의 목적성에 쓸어 담기보다는 그것이 자신의 길을 가도록, 목적성[240]의 외부지대를 형성하도록 맡겨두는 편이, 그러기 위해 충분히 절망하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R-Commentary]

36. 무의식, 이데올로기의 거대한 하부구조, 경제 결정론을 항상 흘러넘치는 욕망의 기계적 흐름들 ...

지하의 오이코스

[240]‘오이코스(oikos)’, 그것은 수단으로서의 존재자가 사는 거처다. ‘인간’들의 삶을 결정하는 목적성의 영역을 위하여, ‘인간’들이 ‘폴리스(polis)’라고 불리는 그 고상한 세계에 들어갈 충분한 자격을 갖추도록 노예가 되고 그림자가 되어 주인의 합목적성에 복무해야 하는 자들의 거처다. (...)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다.

이에 반해 폴리스는 생계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그렇기에 자유에 대해 논하고 자유를 위한 정치를 논하는 영역이며, 명예를 위해 자신의 삶을 거는 고상한 세계다. 하지만 (...) [241]폴리스가 고상할 수 있는 것은 오이코스의 비천함에 발 딛고 섰기 때문이다.

[R-Commentary]

37. 오이코스는 필연성이 지배하는 세계, 외부로부터 강제된 목적론이 삶을 쥐고 흔드는 세계이며, 폴리스는 오이코스의 비천함을 항구화하기 위한 이성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관계는 금새 역전될 수 있다. 필연성이 자유를 압도하는 단계, 폴리스에 비천함이 전염되는 단계, 형이상학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우연’이 필연성 범주를 덮치는 니체적인 주사위 놀이, 기독교라는 계시의 우연성이 로마라는 잘 기획된 제국을 오염시키는 그 단계 ... 정념(복수, ressentiment)이, 디오뉘소스가 ...

7장 페티시스트: 사랑의 존재론 혹은 페티시즘으로의 초대

매혹과 사랑

[254]‘사랑’이라는 말이 이런 매혹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매혹에 의해 야기된 감정이다. (...) 사랑이 마치 자신의 능동적 선택이라도 되는 양 능동적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경우에도 그것은 매혹에 대한 반응을 표시할 뿐이다.

(...) 무언가에 매혹되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은 아무리 감정을 고양하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은 상승과 고양의 운동이 아니라 하강과 침몰의 운동을 야기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 타락하고 오염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 [255]그것은 자아를 찾는 여정이 아니라, 자아를 떠나 뜻하지 않은 곳으로 가는 여행이다. 매혹의 강도, 사랑의 강도는 자신으로부터 멀어진 그 거리에 의해 정의될 것이다.

[R-Commentary]

38. 최초의 ‘매혹’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것을 찾는 것이 주요할 것이다. 프루스트의 ‘되찾은 시간’은 그러한 것이 아닐까?

[256]정신없는 사랑은 (...) 수동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 자아를 회복하고 자신의 지고성을 되찾기 위한 게임을 시작한다. 자신이 매혹되었던 대상을 자기 가까이에 붙잡아두고자 하며, 그것에 자신의 의지를 투영하고자 한다. 자아와 타자의 변증법 속에서 매혹은 ‘사랑’에게, ‘나의 사랑’에게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이다. 시간은 매혹보다는 ‘정신’의 편인 셈이다.

[R-Commentary]

39. 매혹의 편인 시간도 물론 존재할 것이다. 이때 시간은 공간화된 시간이 아니라 개체의 변용을 가능하게 하고, 또 스스로 변용을 통해 구성되는 시간, 잠재적이며 표현적인 그런 시간일 것이다.

탈생식화된 성욕

[261]성욕이 음지에서 벗어나 ‘발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는 아마도 1929년의 대공황이었을 것이다. 전 세계로 파급된 유례 없는 규모의 그 공황은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주의와 포드 공장의 어셈블리 라인으로 상징되는 대량생산 간의 모순이 더는 공존할 수 없는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보여주는 징후적 사건이었다. 여기서 벗어나려면 이제 절약 대신 소비를 촉구해야 했다. 소비를 위해 ‘수요’에 필요한 돈을 풀어야 했다. 뉴딜이 그를 위한 ‘정치적’ 출구였다면, 케인즈주의는 그를 위한 새로운 경제학이었다. 어느 쪽이든 대중의 소비를 투자유인으로 삼는 것, 그를 위해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을 직접적 목표로 하고 있었다. 금욕주의라는 억제된 욕망의 체제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체제로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R-Commentary]

40. 경제사는 소비와 긴축 또는 내핍의 순환 과정이다. 이를 베버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금욕과 쾌락의 순환일 것이다. 경제는 곧 윤리학을 위한 새로운 자양이 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케인즈는 모순적인 금욕주의자들, 키니코스들 중 한 인물일 수도 있다.

젠더와 성

[268]성이나 성적 신체가 구성적인 것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 자연이라는 영역을 지우는 것은 적절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런 발상에는 자연적인 것은 불변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가변적이라는 관념이 전제되어 있다.

(...) 성의 이항적 관념을 비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것을 문화의 영역에 넣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성의 개념이 ‘생물학적 차원’에서 구성되는 것임을 보는 것이다; 성적 이항성이 구성된 것임을 말하기 위해 생물학적 성질이나 기능을 추방해버리는 게 아니라, 생물학적 차원에서도 그 이항성이 부적절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R-Commentary]

41. 이러한 ‘구성주의’가 가지는 강점은 확실히 존재론적 지평을 유사-물활론에 근접시킨다는 것에 있다. 이때 물활론은 어떤 존속하는 실체(substratum)를 가정하기보다 존속 그 자체를 영속적인 유동성의 상태에 놓아둔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별성이 관계 안에서 변용되게 한다.

수많은 성들

[278]우리의 신체는 수많은 분자적 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개체고, 그렇기에 지극히 다양한 성적 조성을 가질 뿐 아니라, 그것이 변함에 따라 이런저런 ‘중간적’ 상태를 오가는 가변성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 성적 행위는 단지 수정이라는 목적에 귀착하는 수단이 아니다. 그렇지만 수정이라는 목적을 떠날 줄 모르는 목적론적 사고는 모든 사랑의 행위를 ‘결국은 2개의 성’으로 분할하고 이성애로 귀착시킨다. 생식 내지 수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한,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결론처럼 보일 것이다.

(...)[279]유기체의 생식기관을 벗어나서는 그 속에 들끓는 수많은 분자적 성의 움직임을 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성애주의가 ‘자연적 본성’, ‘자연적 실체성’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R-Commentary]

42. schizophrenia, 즉 분열증적 성

두 가지 페티시즘

페티시즘으로의 초대

8장 프레카리아트: 프롤레타리아트의 불가능성

귀속과 이탈

[308]그들[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의 노동자라는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방식으로 포함되어 있다. (...) 이들은 모두 소속과 포함의 뚜렷한 외연을 더럽히고 지워서 모호하게 만든다. 사실 엄격하게 말하자면,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모든 존재자는 이미 이전에 자신이 속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 아직 자신이 소속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가는 도중에 있다.이들을 소속이나 포함으로 다루는 것은 이들이 변화를 시작하기 전의 ‘신원’으로 이들의 변화를 환원하는 것이거나, 이들이 ‘결국은’ 귀착될 결과로 이들의 존재를 귀속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변화나 변이에서 본질적인 것은 이들이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변이와 변화를 자신의 ‘본성’으로 하는 존재자는 귀속이 아닌 이탈의 벡터를 통해 그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R-Commentary]

43. 그래서 항상 문제는 ‘이동’이며 ‘잠재성’이며, ‘방향’이다. 일상이든 존재론이든. 탈주의 벡터

대중 혹은 ‘소속’과 ‘포함’의 문제

[311]대중은, 굳이 바디우식 용어로 말하자면, 상황에 소속되지만 소속에서 이탈하는 자들의 ‘집합’이고, 상황의 부분에 포함되지만 그 부분에서 벗어나는 자들의 ‘집합’이다. (...) 항상 이동하고 이탈 중인 존재자들의 무리, 항상 뒤섞이며 혼합되는 존재자들의 무리는, 처음부터 소속과 포함의 정연한 존재론에서 벗어나는 자들이다. 그것은 점들 간의 일대일대응을 통해 사고하는 집합론과 달리, 처음부터 점에서 벗어나는 점이고, 선을 그리는 존재자들이다.

[313]그[바디우]가 이런 경우를 상정했던 것은 그에게 사건이란 전에 없던 것의 ‘출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출현을 다루기 위해 그는 소속/포함의 교차 개념 대신 ‘사건적 장소’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사건적 장소란 사건이 출현하는 그 “장소에 속하는 원소와 사건 자체를 [314]원소로 하는 집합”으로 정의되며, ‘사건의 수학소’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장소에 속한다는 점에서 상황에 속하지만, 상황에서 벗어나는 사건 자체를 원소로 하기에 상황에 속하지 않는다. (...) 따라서 “사건에 대해 존재론은 어떤 말할 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하는 것은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이는 이탈이나 침입을 다룰 수 없는 소속과 포함의 개념이 갖는 난점을 뜻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은 소속과 포함을 통해 존재를 포착하는 ‘귀속의 존재론’에 한정된[315]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탈이나 침입의 선을 다루는 존재론, 변이나 생성, 출현이나 소멸을 다루는 ‘이탈의 존재론’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소속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형성되는 대중에 대해서도, 소속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소속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충분히 말할 것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R-Commentary]

43. 그래서 항상 문제는 ‘이동’이며 ‘잠재성’이며, ‘방향’이다. 일상이든 존재론이든. 탈주의 벡터

44. 대중으로의 회귀, 하지만 그것이 mass라는 것은 변함없다. 물론 mass에서 시작되고 그것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더 많으며, 그래왔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people이 됨으로써 소속되며, proletariat가 됨으로써 군대가 된다. 하지만 다시 이탈, 탈주. 분명한 것은 탈주의 벡터만으로도 또는 정주의 집합론만으로도 ‘혁명이라는 이 생물’(뒤집어진 리바이어던?)을 정의내리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중과 계급

[319]계급이 귀속의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작용한다’면, 즉 ‘존재한다’면 대중은 이탈의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구성하고 작용한다. (...) 물론 노동자는 쉽게 대중이 되며, 대중 또한 그렇다. (...) 2008년 촛불시위 후반기에 거리에서 보았던 것처럼, 노동자가 대중 속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유지하고자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 노동자-대중은 대중의 흐름과는 섞이지 않은 독립된 덩어리로 움직이고, 따로 놀며 층류화된다. 대중이 노동자가 되는 경우 그 덩어리는 해체되어 하나하나 세어지고 선별되며, 정해진 지위와 역할에 대응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얻는다.

[320]대중의 창출은, 소속과 지위에서 이탈한 사람들의 무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소속된 것으로 개개인을 귀속시켜 조직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무리의 창출을 뜻한다. 이들이 그 당시[영국 엔클로저 당시] 사회의 가장 중요한 ‘불안 요인’이었고, 사회 전체를 불안하게 만들던 자들, 우리 식으로 말하면 ‘불온한 자들’이었다.

(...) [321]그러한 무산자대중은 자본이 존재하는 어디에나 항상-이미 있다고 해야 한다.

[R-Commentary]

45. 이 사실이 중요하다. 하지만 더 섬세하게 들여다 보면 대중과 계급의 이러한 상호교환과 층류화는 애초부터 그 두 계열이 식별불가능한 지점에서 서로의 입자를 주고 받는 것을 통해 생성의 과정을 겪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치적 개체는 어느 한 집합 안에 귀속되는 방식이 아니라 사건의 도약이 일어나는 지점지점마다 변용되고, 변용함으로써 서로에게 기쁨의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계급과 대중은 정치-윤리적 이념의 동선이다. 이것은 연대라기보다 거리의 확인이다.

대항계급 혹은 가능한 계급

[325]그것은[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발명] 혁명적 대중의 흐름에서 그 흐름을 혁명적 권력의 장악 내지 구성으로 인도할 명확한 계급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절박한 감정에서 기인할 것이다. (...) 그것은 부르주아지 계급에 대항하기 위한 계급이고, 부르주아지 계급에 포섭되어 자본화된 노동자(가변자본)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되어야 할 계급이 뿐 아니라, 계급의 존재 자체에 대항하기 위한 계급이라는 점에서 대항계급(counter-class) 혹은 반계급(anti-class)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28]대항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있는’ 계급이 아니라 아직 부재하는, 만들어져야 하는 계급이다. 아직 없지만 만들 수 있는 객관적 가능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가능한 계급’이라는 것이다. 둘째 그것은 개인들이 ‘계급의식화’를 통해 도달 가능한 한계치라는 점에서 ‘가능한 계급’을 뜻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해방의 가능성을 담지한 계급, 새로운 사회를 지배할 가능성을 담지한 계급이라는 의미 또한 부가될 수 있을 것이다.

[331]역사는 ‘가능한 계급’ 개념에 포함된 가능성이 또 다른 가능성들을 오직 하나의 ‘객관적’ 가능성에 귀속시켜버릴 수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이탈하는 선들이 갖는 잠재력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가 도래할 가능성을 아예 소거해버린 것은 아닌가 묻게 해주었다. 대중의 흐름이 갖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항계급, 가능한 계급에 멈춰 있을 수 없는 것은, 대중의 흐름을 반복하여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R-Commentary]

46. 이 논의는 목적론의 함량이 높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가능성’으로 규정하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방식, 그로인해 결국은 하나의 ‘형상’ 또는 ‘이데아’로 정위하는 방식이 아니라, 계급의 내적 한계를 드러내고, 그것을 탈신비화함으로써 ‘현실성’과 표면의 효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맑스의 호명을 따라 대지에 번져 가는 바로 그 존재, 또는 스피노자-네그리식으로 말하자면 기쁨의 코뮤니스트들이기 때문이다. 보다 심층에는 계급과 대중이 교환과정(혹은 다른 무엇?)이 있다.

프레카리아트: 비계급화하는 계급

[333]고용의 유연성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 결과 ‘유연성’을 특징으로 하는 축적체계가 전 지구적 스케일로 만들어졌다.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불안정을 뜻하는 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를 합쳐 만든 이 단어가 출현한 것은 이런 조건에서였다. (...) 비정규직 노동자의 급속한 증가가 그것이다. (...) 더불어 프레카리아트가 노동자계급을 잠식해 들어가 노동자계급 전체의 존재방식을 바꾸어놓고 있다.[7]

[335]프레카리아트는 명확한 소속과 뚜렷한 구별을 특징으로 하는 노동자계급과 그러한 소속이나 위치에서 이탈하는 선을 그리는 비계급 대중 사이에 있다. (...) 따라서 프[336]레카리아트란 비계급이 되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계급이라고 해야 적절할 것이다. 그것은 와해되기 시작한 노동자계급이고, 와해된 지점에서 계급의 경계 밖으로 흘러나가는 노동자계급이다. (...) 이 계급 아닌 계급을 ‘탈계급’(post-class)이라고 명명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경우 ‘탈’이란 말은 post라는 말이 표현하듯이 노동자계급 ‘다음’에 오는 것을 지칭한다고 해도 좋겠지만, ‘벗어남’을 뜻하는 ‘탈’이란 단어 그대로 현행적인 계급적 조건에 포함된 이탈의 벡터를 지칭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338]프레카리아트란 불안정한 노동자계급이 아니라 불안정하게 만드는 계급이다. 노동자계급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계급이고, 계급적 규정 자체를 동요시키고 지우는 계급이다. 비움의 포텐셜로 노동자계급을 계급에서 이탈하도록 만드는 계급이다. 계급이기를 중단한 계급이다. 따라서 여기에 ‘불온한 것’이란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극히 타당한 일일 것이다. (...) 그런 방식으로 불온성의 벡터를 가동하는 존재자다. 프레카리아트의 존재에서, 불안정에서 불온성으로의 힘의 이동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R-Commentary]

47. 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이 지점이다. 이탈의 벡터가 담지하는 강도에 따라 결정되는 ‘무엇’. 아래 발췌문도 참조. 따라서 이진경의 ‘불온성’은 이탈의 벡터, 그 강도의 문제가 된다.

불가능한 계급, 프롤레타리아트

[339]프레카리아트는, 노동자계급의 경계를 흘러넘치며 그 규정을 지우고 비워낸 것처럼, 대항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리라고 믿어도 좋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 개념에 존재론적 변위를 가해야 한다. 노동자 계급 내부에 유동성을 끌어들이는 프레카리아트의 이탈의 벡터를 통해, 노동자를 계급과 비계급 사이의 공간으로 밀어넣는 그 ‘비움의 포텐셜’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를 재정의하고 다시 사유하게 해야 한다.

(...) 부르주아지에 대항해 권력장악을 목표로 하는 경우조차, 주어진 자리에서 주어지는 명령을 엄격한 규율로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 일사불란하게 관철하는 ‘노동자의 군대’가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과 조건, 만남의 양상 속에서 이탈의 벡터를 가동하며 뜻하지 않은 역할에 말려들어가는 그런 (반)계급이 있을 수 있지 않을[340]까? (...) 기관에서 이탈해 다른 ‘기계’로 변환되며 탈영토화하는 투쟁기계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식으로 계급적 규정에서 대중의 무규정성이 작동하게 하는 계급이. 조직 안에서까지 대중적 유동성이 유효하게 가동되게 하는 그런 계급이.

[R-Commentary]

48. 관접을 ‘사회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이러한 전략에서 핵심이다. 프레카리아트를 공장에 가둘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변위’는 ‘사회적 프롤레타리아트’(네그리)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치론의 붕괴’를 다룰 수도 있다. 혹, ‘이탈의 벡터’, ‘비움의 포텐셜’은 이 포스트적인 사태와 관련 있는 것은 아닐까?

[341]무한히 연기되는 프롤레타리아트. 이제 프롤레타리아트는 총체성을 갖는 완결된 전체가 아니라 결코 완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 전체화될 수 없는 계급이 될 것이다. 비-전체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

[342]그것은 가능성의 끝이라는 이름으로 특권화되는 하나의 프롤레타리아트 규정을 반복하여 비우고 다시 지우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트란 점에서 ‘가능한 계급’이 아니라 ‘불가능한 계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영원히 되돌아오는 프롤레타리아트 (...) 프롤레타리아트를 끊임없이 비워내고 재탄생하게 하는 이 영원한 반복에 우리는 맑스가 제안했던 ‘영구혁명’이라는 개념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R-Commentary]

49. 에필로그 바로 앞의 전체 내용 마지막 부분을 ‘프레카리아트’보다 ‘프롤레타리아트’로 마무리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에필로그-출구 혹은 입구

[358]불온한 것과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낯설고 불편했던 것들에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익숙해지는 것보다 빠르게 그것들과 낯설어지고, 익숙했던 것들마저 다시 낯설고 불편하게 만나는 것이다. (...) 어떤 낯선 것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열린 감각’을 갖는 것 이상으로 낯섦 자체를 자신의 감각으로 만드는 것이고, 모든 익숙한 것을 다시 낯선 것으로 만날 수 있는 ‘미친 감각’을 갖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모든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고, 그 낯섦을 통해 인근의 인접한 자들을 하나둘 뜻하지 않은 바다로 끌고 들어가 침수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R-Commentary]

50. 책의 마지막 단락이다. 여기서 희안하게도 내가 ‘러시아 형식주의’라는 말을 떠올린다면 농담이 될까? 불온성의 정치학=낯설게 하기.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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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터 벤야민(Walter Bendix Schönflies Benjamin, 1892년 7월 15일 ~ 1940년 9월 27일)은 유대계 독일인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이자 문학평론가이며 철학자이다. 그는 게르숌 숄렘의 유대교 신비주의와 베르톨트 브레히트로부터 마르크시즘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또한 비판이론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와도 관련이 있다.

생애

발터 벤야민은 1892년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에서 고미술품상이었던 아버지 에밀 벤야민(Emil Benjamin, 1856-1926)과 어머니 파울리네(Pauline, 1869-1930)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독일사회에 편입되어 있던 유대인 공동체에 속해 있었고, 그는 유년시절을 베를린에서 보냈는데, 그 시기의 기억은 그의 책인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실려 있다. 청년 시절 그는 청년운동으로서의 구스타프 비네켄(Gustav Wyneken)의 그룹에 가담했고 거기서 젊은 시절 친구인 시인 하인레(Christoph Friedrich Heinle)를 만났다.

1912년 프리드리히 왕립학교를 졸업한 이후, 벤야민은 프라이부르크에서 철학, 독문학, 미술사 공부를 시작하였고 베를린으로 옮겨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1914년 8월 8일 그의 친구인 하인레의 자살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고, 벤야민은 그의 죽은 친구를 위해서 시를 지어서 바치고 하인레의 유작을 출판해주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5년 점차 높아지는 전쟁열 때문에 그는 스승이었던 비네켄과 작별하게 된다. 같은 해, 벤야민은 자신보다 4살 어린 수학도 게르숌 숄렘(Gershom Scholem)을 알게 되고 그와 평생 친구로 남는다. 1917년 도라 켈너(Dora Kellner)와 결혼하였지만, 결혼생활은 13년 만에 파경에 이르고 둘 사이에는 아들 슈테판 라파엘(Stefan Rafael, 1918-1972)이 있다. 결혼과 함께 (또한 점차 높아지는 징병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베른으로 이동, 2년후 리하르트 헤르베르츠(Richard Herbertz)의 지도 아래 그의 박사학위인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 개념>을 완성한다.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후, 벤야민은 자유기고가와 독립출판가로 활동한다. 1921년 보들레르의 시를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번역가의 역할"이라는 에세이를 책 서두에 넣는다. 그가 같은해 출판한 철학 에세이인 "폭력의 비평"은 세간의 주목을 끌게 된다.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라는 잡지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1923년, 24년 교수자격 심사 논문을 제출하고자 프랑크푸르트로 떠난다. 거기서 벤야민은 그보다 어린 아도르노(Theodor Adorno),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와 친분을 쌓는다. 그의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비극의 원천>은 벤야민이 기존의 학술계과 비교해서 상당히 파격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국 벤야민은 이 논문이 심사에서 공식적으로 탈락되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 1925년 스스로 교수자격 논문제출을 포기한다.

1926년에서 27년까지 벤야민은 파리에서 지내면서 프란츠 헤셀(Franz Hessel)과 함께 프루스트의 작품을 번역하는 일을 한다. 1924년경부터 갖게된 사회주의에 대한 관심은 그를 1926년, 27년 겨울에 모스크바로 향하게 한다. 공산주의운동에 대해서 점점 동정을 하게 됨에 불구하고 벤야민은 평생 동안 그 스스로를 "좌파 아웃사이더"라는 위치를 고수한다.

주요 저작

생전에 나온 작품

《독일 낭만주의에서의 예술비평 개념》, 1920년, 박사학위 논문 Begriff der Kunstkritik in der deutschen Romantik. Verlag A. Francke, Bern 1920, 111s.

보들레르의 파리 | 조형준 옮김| 새물결 펴냄 | 2008 Charles Baudelaire, Tableaux Parisiens. Deutsche Übertragung mit einem Vorwort über die Aufgabe des Übersetzers, französisch und deutsch, Verlag von Richard Weißbach, Heidelberg 1923, XVII+67s.

《일방통행로》새물결, 조형준 옮김, 2007년 Einbahnstraße. Rowohlt, Berlin 1928, 83s.

독일 비애극의 원천 | 최성만 김유동 옮김| 한길사 펴냄 | 2009, 교수자격 제출 논문, Ursprung des deutschen Trauerspiels. Rowohlt, Berlin 1928, 258s.

《독일인들, 일련의 편지들》, 1936년, 서간 선집, Deutsche Menschen. Eine Folge von Briefen. Auswahl und Einleitungen von Detlef Holz [Pseudonym]. Vita Nova Verlag, Luzern 1936, 116s, Auflage: 500 Expl.

주요 개별 출간물

폭력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Gewalt. In: Archiv für Sozialwissenschaften und Sozialpolitik. 1921 (pdf)

《괴테의 친화력》, 1924년, 에세이, Goethes Wahlverwandtschaften. In: Neue Deutsche Beiträge. 1924/1925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일기》그린비, 김남시 옮김, 2005년, Moskauer Tagebuch, 1926/27

초현실주의 Der Surrealismus. In: Die literarische Welt. 1929

《푸르스트의 이미지》, 1929년, 평론, Zum Bilde Prousts. In: Die literarische Welt. 1929

《칼 크라우스》, 1928년, 작가론 Karl Kraus. In: Frankfurter Zeitung. 1931

《프란츠 카프카》, 1934년, 작가론 Franz Kafka. Zur zehnten Wiederkehr seines Todestages. Auszüge in: Jüdische Rundschau. 21. Dezember und 28. Dezember 1934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1935년, 에세이,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vier Fassungen 1935-1939). In: 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 1936 [franz. Übers.] 《현대 사회와 예술》문학과 지성사, 1980년

《얘기꾼. 나콜라이 레스코프의 작품에 대한 고찰》, 1936년, 평론, Der Erzähler. Betrachtungen zum Werk Nikolai Lesskows. In: Orient und Occident. 1936

《수집가이자 역사가로서의 에두아르트 푹스》, 1937년, 평론, Eduard Fuchs, der Sammler und der Historiker. In: 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 1937

보를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Über einige Motive bei Baudelaire. In: Zeitschrift für Sozialforschung. 1939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1942년, 에세이, Ü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 (1940). In: Walter Benjamin zum Gedächtnis. 1942; Die Neue Rundschau. 1950

《아케이드 프로젝트》새물결, 조형준 옮김, 2005년, Das Passagen-Werk (1928–1929, 1934–1940), hrsg. von Rolf Tiedemann, 2 Bände, Suhrkamp Frankfurt am Main 1983 [Taschenbuchausgabe] 파리의 원풍경

보들레르의 파리

도시의 산책자

방법으로서의 유토피아

부르주아의 꿈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탄생

《베를린의 유년시절》솔출판사, 1992년, 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 (1932–1934/1938). Mit einem Nachwort von Theodor W. Adorno und einem editorischen Postskriptum von Rolf Tiedemann. Fassung letzter Hand und Fragmente aus früheren Fassungen. Suhrkamp, Frankfurt am Main 1987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베를린 연대기 | 윤미애 옮김| 길(박우정) 펴냄 | 2007

Berliner Kindheit um Neunzehnhundert. Gießener Fassung, hrsg. und mit einem Nachwort von Rolf Tiedemann. Suhrkamp, Frankfurt am Main 2000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반성완 옮김, 1983년 《문예비평과 이론》문예출판사, 1989년

벤야민 선집(길 출판사 펴냄)

1.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2.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사진의 작은 역사 외

3.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4.보를레르의 작품에 나타난 제2제정기의 파리 / 보를레르의 몇가지 모티브에 관하여

5.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 폭력비판을 위하여 / 초현실주의 외

6.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 번역자의 과제 외

출처: 위키사전

[2]

타니가와 간은 누구인가?

유민의 코뮨을 환시한다-‘운동체’로서의 타니가와 간

1) 타니가와 간의 부활

타니가와 간의 부활의 조짐이 일고 있다(2006 <<서클 마을>>복간, 운동 관계자들의 재평가 작업). 왜 그럴까? 또 어떻게 다시 읽어야 할까? 최근 신자유주의의 진행 속에서 나타나는 노동자들의 난민화, 유민화(비정규노동자, 파견노동자)와 그 속에서의 새로운 코뮨 운동(‘새해 맞기 파견 마을’)의 등장이, 2차 대전 후 주변화되어 가던 민중(광부와 가난한 농어민)과 함께 싸웠던 그 사상과 운동에 다시 주목하게 하고 있다.

그동안 타니가와는 신좌파의 기원이나 원류처럼 읽혀왔다. 2.26 사건의 우익 파토스와 전공투의 신좌익 파토스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타니가와를 읽고 농촌에 뿌리 내린 애국심을 기반으로,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주의로 통하는 관점에서 다시 읽는 시도도 있다(마츠모토 켄이치). 그러나 이건 말도 안 된다(오키나와와 자이니치에 대한 타니가와의 관점). 타니가와 간의 사상은 ‘집단’에 대한 사상이라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전공투 세대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친 카리스마적 사상가이기도 하지만, 그의 본령은 ‘집단’과 코뮨 활동, 그것을 네트워크해가는 활동에 있었다. 그는 이질적인 것을 이어내는 ‘공작자’로서 사람들을 움직이고, 그 속에서 자신 또한 변해갔다. 50년대 전반 비주류 국제파에 속해 있던 타니가와는 ‘공작자’라는 키워드를 다시금 내걸어 당과 민중의 틈에서 새로이 ‘집단’ 형성을 시작한 것이다.

2) 우에노와 모리사키와의 연관과 결별

‘침묵’의 우에노와 ‘요설’의 타니가와 사이에는 감성의 차이가 짙게 있었다. 우에노는 ‘타이쇼 행동대’와 ‘타이쇼 광업 퇴직자 동맹’의 활동에 대해 “저것은 룸펜 프롤레타리아를 모은 타니가와 씨의 놀이”라고 야유한 적이 있다.

모리사키는 나카마 시의 여성들과 함께 서클 잡지를 내고 있었고, 머리만 굵은 남자들과는 다른 여성들의 생활에 대한 실감 속에서 어떻게 말이 직조될 수 있는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요설’스런운 지식인인 타니가와의 ‘말의 폭력’에 대해 쓰디쓴 비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리사키가 전하는 일화(“말로 노동자를 낚는 놈으 죽여버리겠다!”며 타니가와를 식칼로 위협했던 젊은 광부)와 타니가와의 도쿄로의 이주를 두고, 노동자의 생활세계로부터 괴리된 타니가와가 좌절 속에서 철수했다는 식으로 상투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와 함께 ‘타이쇼 투쟁’을 만들어 낸 ‘동지’들은 자신들과 타니가와는 노동자와 지식이라는 관계로 사귀었던 것도 아니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지’로 대등하게 활동했다고 증언한다. 그 동지들은 타니가와가 ‘자립건설’운동이 궤도에 오르면서 실업 광부들이 자립해갔기에 할 일이 없어졌고, 그래서 그곳을 떠난 것은 아닌가라고 증언한다. 노동자 속에 들어가려다 못한 지식인이 철수했다는 틀에 박힌 스토리를 만들어버리면 실제로 ‘자립’해갔던 이런 노동자의 관점이 누락돼 버린다.

3) 라보 교육운동으로부터 ‘모노가타리 문화회’로

중 산계급의 안정된 가정과 아이들로 그 계급적 기반은 바뀌었지만, 타니가와에게 있어서는 라보교육운동 역시 집단, 코뮨을 만들어내면서 그 속에서 주체성과 감수성을 변환시켜가는 운동체였다. (68년부터 71년에 걸친 ‘테크 쟁의’ 시 타니가와가 보여준 ‘변절’은 라보 또한 운동체라는 생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체교향극’에서 출현하는 것은 바로 시시각각 유동해가는 일시적인 코뮨이다. 고도성장 하에서 많은 노동자가 일본형 경영의 기업체에 편입되어 춘투로 편안하게 임금투쟁을 하는 노사협조시스템이 확립되어 가던 시기, 타나가와는 그 속에서 노동자의 감수성에서의 어떤 변질을 보고 있다. 머리는 전투적인 좌익의 마음으로 있지만 신체의 감수성은 고도성장기의 소비사회의 욕망에 말려들어가 있는 것. 타니가와는 그것에 저항하는 자립적 감수성을 어떻게 직조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다. 그는 그 키를 언어, 이야기에서 찾아냈고, 이야기를 해독해가는 아이들의 감수성 속에서 가능성을 보았던 것은 아닐까?

타니가와는 강렬한 개성을 갖는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사상운동을 사적 소유로부터 해방시켜가는 ‘사상의 무서명성’을 향한 갈망을 볼 수도 있다(모순 덩어리 같은 존재로서 타니가와 간이라는 ‘공작자’, ‘운동체’).

4) 환영의 혁명정부에 대해서(타니가와 간)

나는 내 생애에 어떤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만들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지 않다. 오히려 여러 개의 자아와 그런 자아의 생산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당적(黨籍)은 과거를 포함하고 현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이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반쪽 증명서에 불과하다.

(눈이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거울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하나의 논리가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이질적인 반사 장치, 즉 또 다른 논리를 필요로 한다. 서로 완전히 배척하는 뿌리를 갖고 있지만, 마치 서로 분신인 것처럼 닮아 있는 두 논리(가령 불교의 무상관(無常觀)과 레닌의 국가 사멸론, 관념론과 유물론), 이 대조되는 논리를 서로 맞물려 보면 그 범주 주변에 있는 애매한 영역이 떠오를 것이다. 만약 그 애매함이 행위를 통해 뛰어넘을 수 있는 허용 한도 내의 것이라면, 오히려 뛰어넘는 것이 틈의 넓이를 알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측량법일 것이다(가령, 일본 민중의 불교적 무상관을 관념론이라고 비판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레닌적 국가 사멸론으로 이끌 수 있다?) 한 개의 사상을 표현하는 복수의 형식이 가능하다. 한 사상의 골격을 이루는 주요한 논리는 반대 측면에서 어떤 충전을 받지 못한다면 행위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없다. 적절한 보충을 얻지 못해 생명체가 될 수 없었던 최고의 지적 산물이 (민중 속에) ‘무수히’ 존재한다(‘민중의 추상 능력’).

혁명가를 이상화하는 이러저러한 특징의 반대 속성을 집중시켜 하나의 인간을 만들어 내보자. 만약 그 인간이 ‘자아’나 ‘혁명’과 같은 것들과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면, 그 인간은 과연 어떠한 성질의 침묵을 소유하고 있을 것인가?(완전한 침묵 속에 있을 것이다.) 완전히 수동적인 몸을 지닌 인간, 가능한 것이라고는 침묵과 거절 밖에 없는 듯한 그런 인간, 이런 인간이야말로 흙 속의 흙, 돌 속의 돌, 이 세상에서 가장 민감하게 갈고 닦여 맑아진 정지(靜止)한 거울이다.

현대는 그 한쪽 극에서 모순 해결에 대한 책임을 주체적으로 짊어진 정치적이고 논리적인 전위(플러스의 전위)를 낳은 시대였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것은 피라미드식 의식으로 전락하고 만다. 스스로를 의식의 극에 위치시키면서 부단히 그것과 대립하는 극과 연결하려는 조직체가 전위라면, 민중의 의식 밑바닥에는 반동사상을 가장 높고 가장 날카롭게 반영하고 있는 곳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곳에 미래를 지향하는 태아가, 어떤 초발운동을 하고 있는 지점이 분명 있을 것이다. 반동사상의 뿌리가 그 자체로 혁명사상의 맹아가 되는 관계…모방과 부정, 즉 비유의 탄력을 통해 이질적인 가치체계 사이를 이동하고 역행하는 미시적 지점(또는 순간)의 존재를 그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마이너스 극한, 잠재적 에너지의 우물, 이것을 나는 원점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것은 결코 후위도 반동도 아니다. 그것은 부호를 달리하는 전위(마이너스 전위)라고 보아야 한다(민중의 잠재성에 대한 무한한 믿음). 전위가 나아가기 위해서는 후위를 타격함으로써 후위로부터 타격 받아야 한다(대중추수주의에 대한 비판). 따라서 전위의 책임은 최초로 점화하는 책임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전위는 자신에게 한 순간의 점화 에너지가 내재하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마이너스 전위인 원점은 어떻게 자신의 마이너스의 말, 이른바 침묵의 표현을 통해 플러스 전위에게 충격을 줄 수 있을까? 세계의 영상을 뒤집지 않는 한, 현실을 뒤집은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먼저 이미지를 변화시켜라! 이것이 원점의 역학이다. 비록 유물론에 대립할지라도, 민중의 정당한 혁명의 순로는, 물질적인 조건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서는 결코 불가능하다(경제결정론, 대중추수주의 비판/ 일공의 ‘평화노선’ 비판).

개성이라는 언어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 우리들의 내부란 외부의 힘, 즉 대략 생리적 식염수와 동일한 농도를 가진 것이 집중된 결과물에 불과하다. 원점(감성, 하부의식, 대지, 고향)은 전위(논리, 의식, 기계, 수도)를 대조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그림자 그림이며, 그것은 전위를 보충하고 수정하고 충전하는 하나의 마이너스 체계가 될 것이다. (기존의 전위와 대중의 ‘변증법적 통일’에) 결여되어 있는 것은 전위와 원점이 일순간 통합되는 장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관념과 실재하는 집단을 혼동하는 위험을 범하고 나서야 전진하게 되는 작업이리라. 이른바 탄광, 특수부락, 화산재 지역의 빈농, 한센병, 외딴 섬…이 원점에 대한 믿음은 개별 자아의 틀에 끼워 맞춰진 그 어떤 도취와도 닮지 않은 쾌락으로 지탱되고 있다. 어려운 것은 감각의 다리(를 놓는 것)이다. 마이너스 전위가 아직 열리지도 못한 채 혈류만 밖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성문, 어떻게 그것에 이를 것인가? 요구되는 것은 불완전하고 애매한 소유형태인 사유(私有)로는 채울 수 없는, 강렬한 두 종류의 소유욕(자신의 사유를 버리고 분해해 그 에너지로 전진하는 수밖에 없는 플러스 전위와, 공유라는 형태가 아니면 아주 작은 땅조차 소유할 수 없는 마이너스 전위가 지닌 두 개의 소유욕) 이 포옹하는 고온고압의 상황이다.

나는 감성의 코뮨 권력을 ‘현실’보다 한발 앞서 세우려고 하고 있다. 정치에 종속된 문학이란 이런 식으로서만 종속하는 것이지 않을까? 나는 연대의 왕국을 필요로 한다(또는 연대와 왕국의 일치를 요구한다). 혁명의 마이너스 극, 여기에 나는 정신의 변방 소비에트를 세우고, 환영의 혁명정부를 선언한다. 분명 나는 그들(주류 공산당?)에게 이족(異族)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공민권을 요구한다. 외다리를 찾아 외다리로 걷는다. 어디로? 아무 것도 아닌 곳, 신도 다신 살지 않는 곳, 혁명만이 있어야 할 곳으로. 그러나 거기에는 아직 아무도 없다.

– 요네타니 마사후미 (변성찬 요약)

출처: 수유위클리 http://suyunomo.net/?p=4913

[3]

이 절을 심도있게 이해하기 위한 레퍼런스들. 이진경이 직접 언급함 마굴리스와 닉 레인.

*린 마굴리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 1938년 3월 5일 - 2011년 11월 22일)는 미국의 생물학자로서 매사추세츠 대학 앰허스트(University of Massachusetts Amherst) 대학교의 지구과학과 교수이다. 세포 생물학과 매생물의 진화 연구, 지구 시스템 과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마굴리스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과학국의 지구생물학과 화학 진화에 관한 상임위원회의 의장을 역임했으며, NASA의 지구생물학에 관한 실험들을 지도하였다.

마굴리스의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업적은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의 기원을 진핵 세포(eukryotic cell)로 들어간 외부조직 공생적 관계를 이루다 정착했다고 보는 이론이다. (endosymbiosis) 이러한 공생이론 같은 충격적인 가설로 생물학계를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100여 종의 논문과 더불어 10여권의 책을 펴냈다.

그는 영국 대기과학자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이 주창한 가이아 이론을 지지하며, 가설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또한 칼 세이건의 첫 번째 부인이었으며, 도리언 세이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번역된 저서들

*닉 레인

닉 레인(Nick Lane)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저명한 과학저술가. 임페리얼칼리지런던에서 생화학을 배운 뒤 왕립시료병원Royal Free Hospital에서 이식 장기의 대사 기능 등에 관해 연구했다(박사학위 취득). 그 후 런던의 의료 관련 멀티미디어 기업을 거쳐 현재는 과학전문지 『네이처』 등에 기고하는 과학저술가로 활약 중이다. 또한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의 유전·진화·환경 부문에서 미토콘드리아 연구 컨소시엄을 구성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서로 『미토콘드리아: 박테리아에서 인간으로, 진화의 숨은 지배자』 『산소: 세상을 만든 분자』가 있다. 레인 박사는 현재 런던에 살고 있으며, www.nick-lane.net을 방문하면 그에 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번역된 저서들

[4]

Roberto Esposito is an Italian philosopher, who is important for his work in biopolitics and his book Communitas.[1] He was featured in the Summer 2006 issue of the journal Diacritics.

reference- http://www.biopolitica.cl/docs/Esposito_Immunization_Violence.pdf

[5]

집합적 개체화에 대한 최근의 좋은 예;

미치도록 기발한 잉여문화

이응일/영화감독/한겨레 2011. 12. 15

디시인사이드에서 시작된 인터넷 놀이 창작물들이 높인 한국 사회 집단창의성 지수

나꼼수(팟캐스트 ‘나는 꼼수다’)가 엄청 떴다. 필자는 그들의 정치폭로 못지않게 반가운 것이 ‘저렴하기 짝이 없는’ 4인방의 입담과 태도이다. ‘봉도사’ 정봉주의 도를 넘는 자기자랑, ‘씨바’로 요약되는 김어준의 건들건들함, ‘목사아들 돼지’ 김용민의 물오른 성대모사, 그리고 ‘누나전문기자’ 주진우의 어눌한 잔소리! 어쩌면 그들은 너무 점잖고 긴장해 피곤한 한국 사회의 정수리에 디오게네스의 감로를 흩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초딩 시절부터 몸에 밴 거지 같은 겸양의 미덕 따위 던져버리고 나도 그들처럼 깔대기도 들이대고 어른들 앞에서 ‘씨바 졸라’ 말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

개죽이, 소피티아, 싱하횽, 헥토파스칼킥…

나꼼수와 성격은 다르지만 우리에겐 그 이전부터 한바탕 웃음 주시고 스트레스 덜어 주시는 인터넷 ‘짤방’(삭제 방지라는 뜻의 기발한 합성사진) 따위 손수제작물들이 있었다. 대체 이것들은 누가 만들어 올리는 것일까? 그 근원을 추적해 보면 상당수가 ‘디시인사이드’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다. 그들은 시간을 들여 일견 쓸모없는 콘텐츠를 만들어내며 스스로를 잉여라 부른다. 그러므로 그들의 잉여 창작물을 모아 ‘잉여문화’라 불러도 괜찮을 것이다.

1990년대 후반 초고속 통신망이 아파트 단지마다 파고들고 아이티(IT) 벤처 붐이 일던 시절, 1999년에 디시인사이드(이하 디시)가 탄생한다. 처음에는 디지털카메라와 주변기기를 판매하는 쇼핑몰이 본업이고, 여기에 디카 마니아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곤 했다. 그런데 여기에 직접 찍은 사진을 올리는 갤러리를 개설하면서 변화가 시작됐다. 좀더 기발하고 재밌는 사진과 댓글을 경쟁적으로 올리더니, 어느 날 그들의 정체성이 선명히 담긴 최초의 발화를 낳았다. ‘아햏햏’. 좋지도 나쁘지도 않고 표현하기 힘든 멍하고 괴상한 기분을 이르는 말. 곧이어 귀엽고도 이상한 디시의 마스코트 ‘개죽이’ 사진 등장.

이를 시작으로 디시는 온갖 해괴한 유행어와 합성사진의 진원지가 되었다. 초기의 햏자, 득햏, 주침야활, 면식수햏, 방법한다, 쌔우다, ~의 압박, 킹왕짱 등에서 최근의 코렁탕, 우왕ㅋ굳ㅋ, 포풍, 시망, ~긔체, 돋다, 병맛, 병림픽, 멘붕(멘탈 붕괴)에 이르기까지…. 나이 지긋하신 독자라도 이 중 한두 개 쯤은 철업ㅂ은(없는) 자식들 입을 통해 들어보셨을 것이다.

또 그들은 단지 유행어를 넘어서 우리말에 전혀 없던 훌륭한 개념어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손발이 오그라든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이 놀림거리가 되고 있음을 모를때 그것을 보는 이가 괜히 창피해지는 기분을 일컫는다.

합성사진은 초기에 소피티아, 싱하횽, 헥토파스칼킥, 콩나물밥햏 등에서 출발해, 동영상 편집 기술이 보급되면서 동영상 짤방도 생겨났다. 미국의 게이포르노 배우의 민망한 영상을 모아 극단적인 반복 편집으로 재해석한 ‘빌리 헤링턴’ 동영상은 우리를 아스트랄한 세계로 이끈다. 그 만듦새와 전달하는 심상은 가히 첨단의 비디오아트를 뺨친다. ‘고자라니’ 동영상은 드라마 <야인시대>에서 “내가 고자라니!”라며 절규하는 심영 배우의 처절한 연기를 훔쳐온 것으로, 괴괴하기 짝이 없는 폭소를 자극한다. ‘슈퍼스타케이(K) 락통령 힙통령 리믹스’와 공중강하 체험하는 ‘기자양반’ 동영상도 포복절도를 보장한다.

합성사진, 동영상과 같이 고퀄(높은 품질)의 창작물을 만들지 못하는 디시 갤러(갤러리 유저)들은 댓글놀이에 탐닉한다. ‘늬들 컵라면 먹고 난 다음에 건더기까지 다 먹어라’나 ‘사람은 똥이야! 똥이라고! 히히! 오줌발사!’ 따위의 이상한 댓글을 수백 개씩 도배하는 ‘꾸준글’은 별다른 기술 없이도 쉽게 잉여 문화에 동참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실명이 아닌 ‘닉’(닉네임)으로 활동하면서도 열심히 잉여짓을 하는 것은 오직 즐거움 때문이다. 두근거리면서 반응을 확인하고, 또 큰 호응을 얻은 게시물은 ‘힛갤’(히트 갤러리)이라는 명예의 전당으로 옮겨지는데, 디시인이라면 누구나 힛갤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다. 필자의 닉은 누룽치인데, 작년에 디시에 바친 잉여에스에프(SF)영화 <불청객> 덕분에 드디어 힛갤에 입성하는 영광을 누렸다.^.^V

현재 디시에는 ‘디시의 수도’ 4대 갤러리-코갤, 야갤, 와갤, 스갤-를 포함, 하위 갤러리와 지난 갤러리를 합쳐 1300여개의 갤러리가 존재한다. 디시는 포털을 제외한 국내 인터넷 커뮤니티로는 최초로 일일 조회수가 1억회를 돌파한(2007년) 공룡 사이트로 성장한다. 이제 디시는 더이상 마이너에 머물지 않고 ‘인터넷 하위문화의 저수지’라는 평을 들으며 3대 포털과 방송에서도 인용하는 새로운 원전이 되었다.

또한 디시가 커지고 이용자들이 디시인의 정체성을 내면화하면서 다른 커뮤니티와 영향을 주고받거나 오프라인으로 활동이 확대된 사례도 많다. 황우석 논문조작 규명에 과학 갤이 기여한 일이나, 피겨갤에서 안일하기 짝이 없는 빙상연맹을 대신해 김나영 선수를 그랑프리대회에 출전시킨 일, 북한 사이트 ‘우리민족끼리’ 해킹 사건, 일본 니코동, 2ch과 3·1, 8·15 사이버 대전 등등….

디시인사이드가 비록 인터넷 잉여문화의 선두주자지만 빼놓을 수 없는 곳들이 있다. 디시와 쌍벽을 이루(려 노력하)는 ‘웃긴대학’,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의 패러디 격인 엔하위키와 백괴사전. 또 포털의 특정 게시판이 발전해 자기만의 색깔을 갖기도 한다. 온갖 고민거리, 황당 체험, 귀신과 유에프오(UFO)가 난무하는 네이트 판, 인터넷 토론의 성지 다음 아고라, 자작 웹툰 등 유머의 산실 네이버 붐….

이렇게 미치도록 기발하고 이상한 창작물을 쏟아내는 누리꾼의 잉여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비록 형식의 완성도나 품위 따윈 없지만, 그 속엔 개인이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번뜩이는 재치, 집요함, 발상의 전환 등이 스며 있다. 필자는 이를 요즘 회자되는 창발성(emergence), 또 ‘집단 지성’에서 가져온 집단 창의성(collective creativity) 개념으로 설명해본다. 한마디로 ‘열 명의 신나는 범재가 뭉치면 한 명의 천재보다 낫다’는 얘기다. 누군가 올린 소스를 다른 이가 고쳐 올리고, 또 누군가 아이디어를 덧대며 좋은 안이 채택되고 발전하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의 잉여가 일본 오타쿠와 다른 점

또한 현실세계에서 분절된 개인들의 역량을 가상공간에서 하나로 모아준다는 점에서 ‘아랍의 봄’을 불러온 에스엔에스(SNS)의 힘이 생각나기도 한다. 현실도피적 오타쿠 중심의 일본 잉여와 달리, 한국의 잉여들이 곧잘 현실의 부조리한 풍경들을 재료로 삼고 성스러운 척하는 것들을 조롱한다는 점은 왠지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이제 5년이라는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올 것이다. 추위에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었다. 봄이 올 때까지, 그리고 그 봄의 푸른 들판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너무 진지해지지 말자. 흔들리지 않으려면, 명랑하게 씩씩하게 낄낄대며 가자, 자기. <끝>

[6]

이와 관련하여 요절한 시인 이연주의 시편들이 참조될 수 있다.

[7]

프레카리아트에 관해 참고할 만한 번역서.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 아마미야 가린 (지은이) | 김미정 (옮긴이) | 미지북스 | 2011-07-15

저자 : 아마미야 가린 (Karin Amamiya): 일본 신사회운동의 기수로 알려진 아마미야 카린의 삶의 이력은 매우 독특하다. 홋카이도에서 태어난 그녀는 10대가 되기 전 따돌림을 경험한 바 있고, 초등학교 때는 레즈비언 행동을 하기도 했으며, 사춘기 시절에는 가출을 일삼으며 비주얼계 밴드를 쫓아다녔다. 한때 인형작가를 지망했지만 건강 문제로 좌절, 손목 긋는 일을 반복. 대학입시에서 떨어지고 재수할 무렵에는 아르바이트 일터에서 며칠 만에 해고되는 일이 연속되자 자포자기, 약물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스무 살 때부터 우익활동에 투신. 극우파 펑크록 밴드 ‘유신적성숙’(維新赤誠塾)을 결성해 보컬로 활동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좌파 감독 쓰치야 유타카 감독의 실험적인 다큐멘터리 영화 〈새로운 신〉에 직접 비디오카메라를 들고 참여하게 되고, 이 자기 반추의 경험을 통해 삶의 방향을 전환. 이후 자신의 파란만장한 체험을 기초로 한 작품 《생지옥 천국》이 주목을 받으면서 본격적인 집필활동을 시작한다.

극단을 오간 삶이었지만, 그녀의 감성을 이루는 기반은 ‘고단한 삶’의 경험. 갈수록 심각해지는 격차 사회 속에서 절망적인 처지로 내몰린 젊은 세대 운동에 뛰어들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한다. 빈곤과 생존을 요구하는 운동에는 좌와 우가 없다며 프레카리아트 운동을 주도하면서 이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다.

저서로는 <생지옥 천국>, <자살의 코스트>, <살게 하라! 난민화하는 젊은이들>, <살아내기의 어려움에 대하여>, <살기 위하여 반격하라> 등 3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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