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과거
은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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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작가의 <빛의 과거>는 1977년과 2017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 속 소설'의 구조를 취하고 있어 '김유경'과 '김희진'이 공유한 경험을 각각 다른 시각으로 조망한다. 두 개의 소설로 1977년의 사건은 좀 더 촘촘하게 엮어지고, 독자들에게 더 풍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은희경 작가의 이번 작품에는 공감 가는 문장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단순히 웃고 지나갈 수 있는 위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자꾸만 곱씹게 되는 묘사들이었다. 1970년대를 살았던 독자라면, 또한 여성이라면 한 번씩은 마주쳤을 법한 캐릭터들과 감정들에 관한 서술은 더없이 훌륭했다. 이래서 다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읽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다. 책을 그리 자주 읽지 않는 독자에게도 이 책만큼은 권할 수 있다. 1977년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던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2010년대에 대학에 다닌 여성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갖가지 매력을 가진 캐릭터들에게서 나는 친숙함을 느꼈다. 특히 주 배경이 되는 기숙사에 대한 묘사 또한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리게 했으며, 공감을 자아내는 요소로 작용했다. 소설 속 화자인 '김유경'이 살고 있던 기숙사에서는 온갖 루머들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퇴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소문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은 기숙사는 "'다름'과 '섞임'의 세계"이고, 이곳에서 "다수에 끼지 않는 것이 열등함을 의미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극적인 말들로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모아놓지 않으면 도태될 거라는 불안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 테다. 이는 내가 해외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경험해본 바 있다. 다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그들의 표정과 농담으로 던진 말들 속에서 나는 뒤에서 어떤 말들이 오가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각종 루머에 동조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다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타인에게서 어떤 오해를 받더라도 그것을 감내하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빛의 과거>에서 1970년대의 사회적 배경을 보여줄 때 정말 뜨악한 마음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들이라면 교과서로만 접해왔는데, 책을 읽는 동안 소설 속 개인들의 경험으로 여기게 되다 보니까, 더욱더 마음에 와닿았다. '김유경'은 늘 회피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가진 자신에 대해 불만을 갖는다. 하지만 이렇게 억압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정말로 "온 힘을 다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무리 속에 끼어들어 남들과 비슷해 보이는 것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피도 선택일 뿐 아니라 전 세계의 소통에 폐를 끼치는 악이 될 수 있다"라는 소설 속 말도 맞다. 독재자의 지배 아래에서 누군가는 회피하지 않고 맞서려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만큼의 민주적인 세상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들이 끝끝내 눈앞에 닥친 시련을 외면하려고만 했다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조금도 나아지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대학에서 퇴학을 당하거나 수감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두려움을 떨쳐낼 수 있던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단지 내가 사회를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김유경'은 아니었기를 바랄 뿐이다. 그들을 욕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상황이 현재와는 다르지만 그 속에서 여성들이 받던 차별은 시대를 뛰어넘어 분노를 자아냈다. "지성이든 열정이든 최성옥이 가진 것은 죄다 자신의 사유재산으로서 자기를 보필하는 데만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최성옥'의 고시생 남자친구와 팔려가듯 하는 결혼, "여자의 지성은 남자를 보필할 때에만 인정받을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말들. 대학교에 둘이 입학할 경우 남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자퇴해야만 했던 여성들. "못 가진 사람과 여자들에게 불리한 세상에서 그 둘 다에 해당되는 처지인 만큼 늘 정신을 바짝 차리라는 당부"는 나아질 듯 나아지지 않는 불공평한 현실을 되새기게 한다. '여성'이라고 해서 다 같은 여성이 아니듯이 '남성'이라는 단어 아래에 모든 남성들을 보편화시키고 싶지는 않지만, 여전히 여성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남성들이 존재하고, 못 가진 여성들이 어떤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알기 때문에 은희경 작가가 이를 다시 꺼내준 것이 고마웠다. 현 여성들은 팔려가듯 결혼하는 일이 적고, 대학교에 가는 일을 남자형제에게 양보하는 일도 거의 없다. 이를 세상이 나아졌다고 기뻐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인종주의는 애초에 존재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므로 감소시켰다고 칭찬할 것도 없다(133p, <아메리카나>)"던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려 한다.

<빛의 과거> 속 1977년도에 갓 신입생이었던 이들의 청춘이라는 '빛'은 이젠 과거가 되었다. 서로 다른 곡선을 그리던 인생은 이제 비슷해졌고, 같은 내리막을 향해 걷는 처지가 되었다. 서로 누가 더 나은지 뽐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나는 지금 '빛'으로서 궤도를 그리고 있지만, 끝내는 앞서가던 선배들을 따라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니, 나는 이미 그 빛을 잃었고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놓쳐버린 빛이 자꾸만 아쉬워서 오늘도 친구들과 "그때가 참 좋았지", "다시 돌아가면 아주 방탕하게 살아야지"와 같은 회한의 한숨을 내쉰다. 이미 내 뒤에 새겨진 '빛의 과거'를 남겨두고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나에게 그날은 그런 것들로 기억된다. 기울고 스러져갈 청춘이 한순간 머물렀던 날카로운 환한 빛으로. 나는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 가까이에서 닿을락 말락 흔들리고 있지만 끝내는 만져보지 못한 빛이었다.

그동안 자기 자리가 아닌 곳에 가지 않고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오현수는 모르는 것이 거의 다라는 생각을 하나 더 보태게 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다른 조건을 가진 삶에 대한 존중의 한 방식이었다.

나는 그 시간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것일까. 오로지 내게 주어진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과 성적을 올리는 것. 두 가지에만 의미를 두던 고등학교 시절 훈육의 틀과 그리고 내가 동의할 수 없었던 세상의 모범생이라는 모순된 자리. 거기에서 시스템의 눈치를 보며 적응한 척했던 것이 단지 임시방편이었을까. 혹시 그대로 내 삶의 태도가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장점의 도움으로 성취를 얻지만 약점의 만류로 인해 진정 원하던 것을 포기하거나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약점은 삶의 결핍과 박탈을 관장한다.

여전히 나는 무력하고 방어적인 회색 지대에 갇혀 있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그러다 보니 의욕이 없어 방치하게 되고, 결국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해 무력감에 빠지고, 무력감은 쫓김과 불안을 낳고 그래서 자신감을 잃은 끝에 제풀에 외로워지고, 그 외로움 위에 생존 의지인 자존심이 더해지니 남들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고, 그러자 곧바로 소외감이 찾아오고, 그것이 또 부당하게 느껴지고, 이 모든 감정이 시간 낭비인 것 같아 회의와 비판에 빠지는 것, 그 궤도를 통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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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인을 위한 사람 공부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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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은 이 책은 8월에 구입했다. 다른 책들에 밀리고 밀려 12월이 되도록 읽지를 못하다가 드디어 완독했다. 김영하 작가가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것'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것으로 이 책을 이제까지 질질 끌고 온 데 대한 변명을 대신한다.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감도 점점 부풀었다. 오래 만나지 못한 첫사랑을 향해 온갖 긍정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듯이 나는 장석주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해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키워왔던 것이다. 너무 기대치를 높여놨던 탓이었을까. 아뿔싸, 책이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각 장마다 '호모 xxx쿠스'라는 부제목이 붙었다. xxx 안에 서로 다른 단어들이 새겨지고, 그것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식이다. '호모 xxx쿠스'라는 단어를 활용하여 인간이나 그와 연관된 것들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좋았다. 또한 시인이자 평론가답게 굉장히 유려한 문체로 글이 쓰였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크게 이목을 끌지 않으며, 식상한 구석이 있다. 인간이든 사회이든 무언가를 분석하는 책을 출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이제껏 나온 책들과는 (인간의 혹은 사회의) 다른 면을 들춰내야 한다는 점이다. 블로그에 올렸던 <청년 정치는 왜 퇴보하는가>라는 책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다른 책들과 다를 것 없이 동어 반복을 펼칠 거라면 왜 독자들이 굳이 이 책을 사서 읽어야 하겠는가. 예를 들어 '사피엔스'라는 책이 여태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건, 작가 유발 하라리가 내놓은 의견들이 독자들이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유발 하라리'도 의문만 가득 남겨 놓았을 뿐 특출난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책과 텔레비전'이라는 소재를 삼은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아니라 영상 시대에 걸맞게 '유튜브'나 각종 'sns'에 대해 의견을 교환해야 하지 않을까? 이외에도 "일하는 기계로 사는 삶에 저항하면서 자주 빈둥거려 보라!"거나 "당신의 심신을 갉아먹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멀티태스킹을 당장 그만두라"라는 말들을 할 때 답답함을 느꼈다. 누구나 작가의 말처럼 일을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일정 부분 내려놓고 일하러 나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 보장을 위해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하는 거지, 사람들이 일에서 손을 떼는 게 우선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일할 필요가 줄어든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일하는 기계로서의 삶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물론 인간 자체에 대해 품고 있는 작가의 다정한 열의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몇몇 구절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3부 '쓰는 인간'은 무척 공감이 되었고,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장석주 작가처럼 또 하나의 '호모 부커스'로서 늘 책을 읽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책이나 도서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다. 저자는 돈이 없던 시절 마치 숲과도 같은 도서관에서 시간 보내기를 즐겼다고 한다. 나도 집 근처에 가까운 도서관이 있어서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해 도서관으로 숨어들곤 한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의 교감이 책의 완독을 가능하게 했다. 3부뿐만이 아니라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에는 여러 책이 인용되었다. 무언가에 대해 설명할 때 자연스럽게 책이 얹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인문 에세이'가 아니라 '북 에세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니면 '평론집'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일정 주제들을 놓고, 책들을 그러모아 쓴 글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이 책에는 더 어울리는 듯하다. 실제로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를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는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더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독서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믿는 작가의 책에 대한 애정도 담뿍 담겨있기도 하다.

책을 읽기 전에 문득 이 리뷰를 발견하고는 책 사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이전과는 다른 심층적인 탐구를 원하는 독자라면 책에서 부족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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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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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다산책방에서 이례적으로 서평단을 많이 모집한 일이 있었다. 1000명 정도에게 새로 출간될 책을 읽을 기회를 주다니. 20명까지는 본 적이 있다. 나도 우연히 그 안에 들어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은 책표지에 그려진 '솜브레로'로 알 수 있듯이 멕시코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는 소설이다. 작가 '루이스 알베르토 우레아'는 멕시코계 미국인으로, 책에 스페인어와 영어가 섞여 있듯이 멕시코와 미국의 특색이 섞여 있다. 미국에서 살면서도 미국에 대해 어느 정도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들의 모습은 아마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그는 분명히 미국 시민이지만, 가끔은 그걸 인정하려 들지 않는 수많은 사람과 마주치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는 같은 국가의 뿌리를 공유하면서도,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 자들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혼혈인 친구들이 알 수 없는 적대감과 끝없이 싸워야 하는 것처럼. 또한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의 적은 같은 한국인이라는 말이 도는 것처럼. 저자는 책에 쓰인 내용들이 단지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독자들이 기억해주길 바란다고 적었지만, 그 어느 책보다도 작가의 삶이 많이 묻어나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불치병 말기였던 형이 인생의 마지막 달을 보내고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심지어 장례식이 형의 생일 전 날이었다는 점마저 비슷하다. 그러니까 작가의 말이 편집 과정에서 맨 앞으로 배치되었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이 사실과 결합할 때 슬픔은 배가 되는 법이니까. 이왕이면 '빅 엔젤'의 가계도도 앞쪽으로 옮겨주면 좋겠다. 책을 절반이나 읽고 나서야 나는 가계도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왕 편집에 대해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뒤표지에 어떤 상을 받았는지 열거하기보다 추천사들을 적어 넣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이왕이면 가족의 사랑, 용서 등에 대해 언급한 글들로! 그게 이 책의 중심 소재이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건 가족 간의 애정을 깨닫기 위한 일종의 수단에 불과했다.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에서는 미국과 멕시코의 문화, 사상들이 끝없이 충돌한다. 특히 미국 시민권을 위해 미국 여자를 찾아 떠난 아버지 '돈 안토니오'로 인해 갈등이 심화된다. 갑작스럽게 떠난 아버지로 인해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빈곤한 상태로 지내야 했던 '빅 엔젤'은 아버지가 미국 여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리틀 엔젤'을 아주 오랫동안 미워한다. '미국'이라는 한 국가에 대해서 분노를 퍼붓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빅 엔젤'은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리틀 엔젤'에게도 억울한 사연이 있었다. '돈 안토니오'는 결국 미국 여자 '베티'마저 떠나 버렸고, '리틀 엔젤'도 자신의 삶을 버텨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 했다. '돈 안토니오'는 양쪽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셈이다.

'리틀 엔젤'과 '빅 엔젤'의 형제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소설 속 모든 관계에서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미움은 '죽음' 앞에서 전부 무너져 내린다. 마지막이라는 걸 깨닫고 나서야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서 상대가 어떤 존재였는지를 깨닫는다. 가족이 하나로 제대로 뭉쳐지는데 무려 512페이지의 종이가 필요했다. '돈 안토니오'에게서 배운 강하고 억압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이던 '빅 엔젤'도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사과를 건네고,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은 이렇게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용서임을 보여준다. 그중에서도 가족들에게 마치 '죽음' 앞에 서나 보일 수 있는 진솔한 모습들을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 준다.

<빅 엔젤의 마지막 토요일>에는 여러 인물이 얽혀 들어 있고, 시점이 중구난방이었다. 이야기가 갑작스럽게 다른 시점으로, 다른 인물에게로 넘어가곤 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잘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실은 중간에 덮어버릴까, 많이 생각했었는데, 완독하고 나면 그때야 어떤 깨달음이 찾아온다. 소설 속의 가족들이 '죽음'을 앞두고서야 뒤늦게 서로의 소중함을 새로이 발견하듯이. 평소에 책을 멀리하는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멕시코' 소설의 매력을 엿보고자 하는 독자라면 기꺼이 '빅 엔젤'과 그 가족들의 삶에 뛰어들어 찬찬히 살펴봐 주길.

★내가 뽑은 문장

-"인생이 그런 거라고, 멍청아. 너 말이야. 물결은 처음에 세차게 시작하지만, 해안으로 갈수록 점점 약해지지. 그러다 다시 안으로 돌아오고. 돌아오는 물결은 눈에 보이지 않아. 하지만 분명히 존재해서 세상을 바꾸는 법이야. 그런데 너는 지금 본인이 뭔가 성취했는지 어떤지 의심이나 하고 있잖아."

-어차피 다들 언젠가는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사는 거잖아? 흙 속에 망할 놈의 구덩이를 파기 위해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보쇼, 좀 유하게 살라고. 이건 누가 빨리 가나 시합하는 경주가 아니니까 천천히 가라고요.

-가족이란 게 있으면 책임감도 참 많이 따라붙는다. 수천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겨우 살 만해지는 것이다.

-나는 내가 얼마나 멍청한지 배우고 있는 중이야. ('빅 엔젤'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가 삶이란 끝없이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지를 배우는 것이다, 라는 표현을 했다. 참 옳은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냐하면 여태껏 살아오면서 저지른 실수들이 모조리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내 자신을 얼마나 답답해하고, 자책해 왔던지. 그런데 '미겔(빅 엔젤)'의 대사를 듣고 나니까 얼마든지 멍청한 실수들을 저질러도 된다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자네가 의문을 품고 의심하지 않는다면 하나도 의미 없겠지만. 그게 바로 만사를 현실적으로 만드는 거지. 그게 우리를 사랍답게 만드는 거라고."

-"자네의 인생 여정이 나와는 조금 다른 것뿐이야. 죽음이란 시카고행 열차를 잡아타는 것과 같아. 노선은 백만 개나 되고, 기차는 모두 밤에 운행하지. 어떤 기차는 완행이고, 어떤 건 급행이야. 하지만 모두 낡고 커다란 기차 보관소에 있어."

-"우리는 이러면 안 돼, 친구야. 이건 우리가 아니야. 사람들은 우리가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해도, 그건 진실이 아니라고."

문장들을 정리하고 보니까, 책 자체는 무척 조잡스러웠으나 눈에 띄는 글귀들이 많은 책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한 방들이 모여서 책을 다 읽고 덮고나면 그래도 꽤 괜찮은 구석이 있는 책이었어, 하는 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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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우일 그림,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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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 작년 12월 24일에 도넛 좀 먹었다고 이런 꼴을 당해야 하다니."

2019년도 벌써 며칠 남지 않았고, 특히 크리스마스가 성큼 다가왔다. 종교적인 이벤트지만, 누구에게나 큰 축제로 자리잡은 크리스마스에 딱 걸맞은 책을 소개하려한다. 한국에서도 마니아층이 두터운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작품이다. '하루키'가 쓴 글에 <하와이하다>로 나를 홀려버린 '이우일' 작가의 그림이 더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실 소설마다 성적인 이야기들을 지나치게 많이 삽입해서 책을 읽을 때마다 개인적으로 불편함을 많이 느낀다. 하지만 <1Q84>나 <노르웨이의 숲> 등의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단한 필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여서 책이 나올 때마다 결국은 사고야 만다.<1Q84>에서도 결말이 어딘가 엉성해서 화가 났지만, 마지막까지 스토리가 박진감이 넘쳐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이우일' 작가의 그림체는 말할 것도 없다. 그의 그림들이 내 부족한 상상력을 채워주었고, 덕분에 책을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나 그림들이 매력적이어서 책에서 다 오려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일반 동화와 같은 구조를 가진다. 문제가 발생하고, 타인의 도움을 얻어 문제를 해결해 나가며, 마지막에는 생각지도 못한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양 사나이'라는 남자가 작곡 의뢰를 받았으나, 약속한 크리스마스가 다 되도록 곡을 써내지 못한다. 전전긍긍하던 '양 사나이'에게 '양 박사'가 어떤 해결책을 제공하고(해결책이 무엇인지는 책에서 확인해 보면 좋겠다. 워낙 글이 짧기 때문에 다 공개하기가 꺼려진다), 이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결국엔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아주 충만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는 어릴 때 읽었던 동화들에서 자주 보던 흐름이다.

책과는 상관없는 내용이지만, 물론 현실에서는 나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려는 이도 드물고, 결말이 꼭 좋으리라는 법은 없다. 그러고보니까 동화책에서는 왜 끝끝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인생은 원래 그런 법이라는 걸 알려주지 않았을까? 하긴 어릴 때 주인공이 좌절을 겪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면, 그 트라우마가 꽤 오래갔을 것 같다. '주인공'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사람은 꼭 성공해서 언젠가는 내 인생도 그렇게 되리라는 점을 보여주어야 했으니까.

<양 사나이의 크리스마스>는 어른이나 아이 상관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한 마땅한 선물을 찾지 못했다면, 이 책을 구매해도 좋겠다. '이우일' 작가의 그림이 삽입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구매할 이유가 충분하다. 아, 그리고 초판 한정 카드도 들어있으니 책과 함께 오랜만에 편지를 써 선물하는 것도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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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 빛과 색으로 완성한 회화의 혁명 클래식 클라우드 14
허나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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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클라우드 인생 여행단 12월의 도서에는 인상주의 화가 ‘모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겼다. ‘모네‘는 ˝대상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나 대상의 물질성보다는 ‘감각‘과 ‘느낌‘을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다. 그는 대상과 ˝자신 사이에 있는 공기, 바람, 안개, 온도, 습기, 시간 그리고 빛 등의 요소들을 그리고자 했다˝. 한 가지 대상을 놓고, 시간이나 날씨, 계절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여러 개의 캔버스를 바꿔가며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하나의 대상을 그렇게 오래도록 관찰해 그려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책 속에 등장한 ‘모네‘의 그림들을 보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의 사물이 그렇게 다양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또한 꾸준히 사물을 관찰하고 날카롭게 포착해내는 ‘모네‘의 실력과 태도도 감탄스러웠다. ‘모네‘의 그림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했으며, 인상주의의 특징인 간략한 붓질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진을 찍어 놓은 것과 같은 인상을 주었다. 세세한 특징들을 잡아내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대상에게서 받는 인상만 잘 살릴 수 있다면, 정확한 그림이라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었던 것이다.

책 <모네>에는 이토록 놀라운 재능을 가진 화가 ‘모네‘의 혁명가와 같은 모습이 잘 드러나있다. ‘모네‘의 그림들을 여러 전시회에서 접해 왔지만, 저자가 지적하듯이 나도 그의 그림을 단순하게 ‘예쁜 그림‘이라고만 평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모네의 ‘예쁜 그림‘ 뒤에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외면당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이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의 힘겨운 노력과 투쟁이 있˝었던 것이다.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 미술작품을 즐긴 적이 많았던 나는 ‘모네‘의 그림에서 아름다운 색감만을 포착했을 뿐이었다. 작가가 생존을 위해 그림을 그려야 했던 때도 있었고, 사회가 원하는 길과 다른 방향으로 가면서 빈곤과 냉랭한 시선들을 감내해야 했던 적도 많았으리라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무심히 작품을 지나치던 이전의 모습을 버리고, 깊이 있게 작품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이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장점이다.

‘모네‘가 인생의 굴곡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화가가 된 데에는 사람들의 조력이 있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미술을 하는 데에는 돈이 무척 많이 든다. 아무리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물질적인 어려움을 뛰어넘지 못하고 다른 일에 종사하게 되는 예술가들도 많다. 하지만 ‘모네‘에게는 고모 ‘르카드르‘가 있었다. 그녀는 ‘모네‘의 재능을 알아보고, 금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고모가 없었더라면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 속에서 화가의 길이 좌절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찌어찌 미술학교에 다니게 되었더라도 높은 학비를 감당하기 위해 얼마나 갖은 고생을 어릴 때부터 해야 했을까. ‘르카드르‘와 같은 이들의 도움 없이 간절한 꿈을 안고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을 예술가들이 존경스럽다. 또한 ‘모네‘에게는 함께 인상주의를 이끌었던 동료들의 존재도 있었다. ‘르누아르‘, ‘마네‘, ‘세잔‘, ‘드가‘, ‘바지유‘, ‘피사로‘ 등과 함께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같이 그림을 그리러 나가기도 하면서 그들은 미술사 속에서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모네‘를 인정해주고 그림을 팔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뒤랑뤼엘‘도 빼놓을 수 없다. 보편적이고 안정적인 세계에 대항해 신념을 지켜내고자 했던 동료들이 없었다면, ‘모네‘의 그림은 아주 작은 몸짓에 불과했을 것이다.

‘모네‘는 한 학파의 처음과 끝을 모두 지켜본 흔치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보통 누군가의 전기를 읽다 보면, 사후에 비로소 주목을 받아서 자신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이 적지 않다. 11월 인생 여행단의 목적지였던 ‘레이먼드 카버‘도 작품 <대성당>이 대성공을 거둔 이후 오래지 않아 죽음을 맞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모네‘는 아주 행운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또한 다른 유명인들의 삶과 달리 ‘모네‘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다정하고 좋은 ‘파파 모네‘였다는 점이다. 그는 밖으로 그림을 그리러 나갈 때 자주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드넓은 자연으로 나가서 형제들과 뛰어놀고, 자신의 꿈을 향해 묵묵히 달려나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추억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은 추억으로 남았을까. 자신의 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가정에 소홀하거나, 자신을 갉아먹으면서 예술혼을 불태우는 그런 예술가가 아니라서 ‘모네‘가 더욱 좋았다. 그래서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프랑스‘, 특히 ‘지베르니‘에 가서 ‘모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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