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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 시간의 만에서 - 시대를 부유하는 현대인을 위한 사람 공부
장석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6월
평점 :
실은 이 책은 8월에 구입했다. 다른 책들에 밀리고 밀려 12월이 되도록 읽지를 못하다가 드디어 완독했다. 김영하 작가가 '책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서 읽는 것'이라는 표현을 했는데, 그것으로 이 책을 이제까지 질질 끌고 온 데 대한 변명을 대신한다.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함께 시간이 지날수록 기대감도 점점 부풀었다. 오래 만나지 못한 첫사랑을 향해 온갖 긍정적인 상상력을 발휘하듯이 나는 장석주 작가가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를 해줄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키워왔던 것이다. 너무 기대치를 높여놨던 탓이었을까. 아뿔싸, 책이 생각보다 재미가 없었다. 각 장마다 '호모 xxx쿠스'라는 부제목이 붙었다. xxx 안에 서로 다른 단어들이 새겨지고, 그것을 주제로 삼아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식이다. '호모 xxx쿠스'라는 단어를 활용하여 인간이나 그와 연관된 것들을 이야기하려는 시도는 좋았다. 또한 시인이자 평론가답게 굉장히 유려한 문체로 글이 쓰였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크게 이목을 끌지 않으며, 식상한 구석이 있다. 인간이든 사회이든 무언가를 분석하는 책을 출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이제껏 나온 책들과는 (인간의 혹은 사회의) 다른 면을 들춰내야 한다는 점이다. 블로그에 올렸던 <청년 정치는 왜 퇴보하는가>라는 책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다른 책들과 다를 것 없이 동어 반복을 펼칠 거라면 왜 독자들이 굳이 이 책을 사서 읽어야 하겠는가. 예를 들어 '사피엔스'라는 책이 여태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건, 작가 유발 하라리가 내놓은 의견들이 독자들이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들을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물론 '유발 하라리'도 의문만 가득 남겨 놓았을 뿐 특출난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책과 텔레비전'이라는 소재를 삼은 부분이 개선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가 아니라 영상 시대에 걸맞게 '유튜브'나 각종 'sns'에 대해 의견을 교환해야 하지 않을까? 이외에도 "일하는 기계로 사는 삶에 저항하면서 자주 빈둥거려 보라!"거나 "당신의 심신을 갉아먹고 영혼을 피폐하게 만드는 멀티태스킹을 당장 그만두라"라는 말들을 할 때 답답함을 느꼈다. 누구나 작가의 말처럼 일을 자기실현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장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일정 부분 내려놓고 일하러 나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 보장을 위해 사회구조가 바뀌어야 하는 거지, 사람들이 일에서 손을 떼는 게 우선적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보다 일할 필요가 줄어든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일하는 기계로서의 삶을 내려놓게 될 것이다. 물론 인간 자체에 대해 품고 있는 작가의 다정한 열의 같은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몇몇 구절은 논란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중에서 3부 '쓰는 인간'은 무척 공감이 되었고, 흥미롭게 읽기도 했다. 장석주 작가처럼 또 하나의 '호모 부커스'로서 늘 책을 읽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책이나 도서관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읽었다. 저자는 돈이 없던 시절 마치 숲과도 같은 도서관에서 시간 보내기를 즐겼다고 한다. 나도 집 근처에 가까운 도서관이 있어서 어딘가로 도피하고 싶을 때마다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해 도서관으로 숨어들곤 한다. 이런 개인적인 경험의 교감이 책의 완독을 가능하게 했다. 3부뿐만이 아니라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에는 여러 책이 인용되었다. 무언가에 대해 설명할 때 자연스럽게 책이 얹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인문 에세이'가 아니라 '북 에세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니면 '평론집'이라고 불러도 좋겠다. 일정 주제들을 놓고, 책들을 그러모아 쓴 글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이 책에는 더 어울리는 듯하다. 실제로 <호젓한 시간의 만에서>를 읽으면서 인간에 대한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기보다는 읽어보고 싶은 책들이 더 눈에 띄었다. 사람들이 독서를 이어나가야 한다고 믿는 작가의 책에 대한 애정도 담뿍 담겨있기도 하다.
책을 읽기 전에 문득 이 리뷰를 발견하고는 책 사기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책은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이전과는 다른 심층적인 탐구를 원하는 독자라면 책에서 부족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