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읽던 순간이 떠오른다. 위트 넘치는 문체에 감탄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중에 나는 뒤늦게 그 작품이 퀴어 소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아무도 몰랐을 테지만, 내가 가진 세상의 편협함에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거의 동시에 친구에게서 ‘퀴어‘라는 단어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다들 숨기고 살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아주 많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때 나는 그건 전부 그 애의 착각일 거라는 생각을 아주 조그맣게 했던 것 같다. 살면서 내가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을 본 건 고등학교 때 딱 한 번이 유일했으니까. 세상의 일부를 못 본 척 지나치는 건 아주 쉬웠고, 그렇게 나의 전체를 이루는 무언가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기울어진 채로 보고 있었는지를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읽는 동안 알아차린 것이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작가 박상영의 작품에 관한 기억을 끄집어낸 것은 작가 김혜진의 작품 또한 그렇게 읽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너‘와 ‘나‘라는 인칭으로만 등장한 그들의 삶을 추측하고, 또 오해하다가 마침내 어떤 문장에 이르러서야 나는 어버버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어떤 이들의 삶을 왜곡하는 나 자신으로 인해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와 ‘나‘의 언저리에 생겨난 공백 덕분에 그들의 삶 자체에 집중하고, 공감하기가 수월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른 것들은 전부 배제해 놓고 ‘너‘와 ‘나‘라는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현실 속 내 주변의 수많은 너의 얼굴이 되고, 또 금세 나 자신의 얼굴이 된다.

소설 속 ‘너‘와 ‘나‘를 향해, 또 지금 여기의 너와 나를 향해 사람들은 어쭙잖은 호기심을 내보이고, 이해와 존중이라는 단어를 남용한다. 조금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도 사람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 의도를 추측하고, 오해하고, 또 지적하고 비난하기도 했다. 일상성의 항상성이 붕괴될까 노심초사하던 타인들이 끝내 선택한 것은 비정상을 향한 이해와 관용이었다. 무엇 때문에 내 방식을 일일이 설명하고, 내 존재를 승인받아야만 하는지, 그런 것들이 내게 주는 무력감과 억울함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내가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흔하고 흔해빠진 연인(201쪽)˝을 향해 꺼내놓은 말들은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상을 미워하면서도 그곳에 동화되어 있는 나 자신을 ‘너‘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발견한다.

『너라는 생활』 속 ‘너‘와 ‘나‘는 정말이지 그 누구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그들 자신이기를 원했던 사람들 전부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적 약자이던 그들에게 세상을 좀 요령 있게 살아보라고 충고하고 싶던 적도 있었다. 다 이해한다는 말로 그들을 세상의 바깥으로 슬쩍 밀어내고 돌아서고 싶던 적도 아주 많았다. 그들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한다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우리가 볼 수 없었고 확인할 수 없었던 광장이라는 신기루 같은 미래(231쪽)˝ 뿐이리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겪게 될 어떤 곤란함 때문에 아주 사소한 격려와 위로를 바라던 ‘너‘를 두고 돌아서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너‘의 얼굴이 또 언제 ‘나‘의 것이 될지 모르기에 나는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골목 쪽을 다시금 이끌리듯 바라보고 있었다(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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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는 이름만으로도 어떤 낭만을 품도록 만든다. 그곳은 이십 년이 넘도록 서울에서만 살아온 내게 가까운 듯 멀어 닿지 않는 피난처였다. 거기에서의 삶이 여기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 사람은 꽤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속 제주는 현실과 동떨어져 온갖 것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열망을 충족시킨다. 김금희 작가가 발견한 ‘제주‘는 나의 것과 다르다. <복자에게> 속 제주는 ˝울고 설운 일이 있는 여자들이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무한대의 바다가 있는 세상(189쪽)˝이다. 타인의 시선에 의해 한정 지어진 삶을 그러안고 그들은 다만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사방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을 호들갑 떠는 일 없이 꿋꿋하게 맞고 서 있는 그들에게 삶의 성패를 구분 짓는 일은 불필요하다. 자신이 손을 쓸 도리도 없이 속수무책으로 밀려든 숱한 실패들을 강인하게 밀고 나아간다. 마치 제주의 해녀들처럼.

제주의 ‘고고리섬‘에서 시작된 작고 어린 이야기는 역경 위에 올라선 인류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삶이라는 부조리함을 견뎌내며 세상을 향해 작은 움직임을 만들어 온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긍정이 작품 안에 존재한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충분히 잘해왔지만, 작가는 ˝나를 본보기로 하면 안 돼, 나보다 더 잘 돼야 해(175쪽).˝라며 작은 불꽃들을 들쑤신다. 윗세대가 자식들을 기어코 대학교에 가도록 몰아세우면서 내보이던 절박함이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세상은 이렇게 여전히 아프고, 똑같이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인간들끼리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세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오세‘의 말처럼 ˝법을 통해 볼 수 있는 인간의 면면도 최소한에 불과(220쪽)˝하다고 믿는다. 인간으로서 희망하는 것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삶을 묵묵히 그러안을 용기가 있는 사람처럼 나는 분노하지 않은 채로 그저 오늘을 견딘다. 바람이 춥다고 엄살을 떨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분노의 목적과 명분은 사라지고 분노라는 상태만 남아 활활(37쪽)˝탄 지 오래되었다.

글을 적다가 문득 내가 삶에 대한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고 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건 역시 삶의 실패마저 껴안고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말에 공감하면서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실패에 분노가 차오르곤 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유년기는 끝났고, 내가 알던 ‘복자‘도 나만큼이나 유년기 때처럼 실패에 상처받지 않으리란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차마 복자에게 안녕(126쪽)˝이라고 건네지 못해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마음은 저쪽에 가닿지 못한 채로 공허하게 울리고, 나 또한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수신하지 못하고서는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고 앉아 있다. 내가 바라본 곳에는 ˝우리는 생존하고 싶다고. 전염병으로부터, 불행으로부터, 가난이나 상실이나 실패로부터(232쪽)˝ 누군가가 외치고 있다. 팬데믹 시대 이전부터 지겹도록 들어온 길고 긴 한숨 속에 ‘복자‘의 얼굴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나의 ‘복자‘, 나의 ‘제주‘만큼은 유년 시절 그곳에 무사히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글을 마무리한다.

보낼 수 있다면 복자야, 나는 너에게도 이 박수를 보내고 싶다. 넘치도록, 자꾸 넘쳐서 네 머리맡에 그것이 고이도록, 그렇게 해서 너가 파도가 치나 아니면 태풍이 올 참인가 싶어서 잠결에 잠깐 눈을 뜨도록, 그러면 태풍이 올리가 없으니 이 밤 아주 편안하게 자고 있던 흰둥이가 귀찮은 듯 네 방문을 잠깐 보고.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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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지음, 이재경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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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와 ‘로맨스‘라니, 부질없고 식상한 조합이다. 살면서 누군가와 이렇게 엇갈릴 수도 있을까 싶을 만큼 독자를 애태우는 로맨스라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런 어이없고 뻔한 우연을 기다리게 된다. <12월의 어느 날>은 그렇게 번번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이에게 선물처럼 다가올 소설이다. 작품을 읽다 보면 몇몇 영화가 문장 위에 겹쳐진다. 동일한 구성의 로맨스 서사가 반복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혀 지치지 않은 채로 이런 작품들을 찾아 헤맨다. 그건 책과 영화 속의 서사를 공유하면서 작품 밖의 우리가 더 이상 그들과 남이 아니게 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사실 뒤표지에 적힌 문구가 왠지 부끄러워 사람들이 많은 곳을 지나가면 꼭 앞표지로 돌려놓았다. 첫눈에 누군가에게 반하는 러브스토리를 믿는다는 사실은 내 나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내게 일절 관심도 없었을 타인의 시선을 나 혼자 의식하면서 처음에는 ‘잭‘과 ‘로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버둥거렸다. 야, 그런 일이 세상에 어딨냐? 하고 갖은 센 척을 다하면서. 그리고 나서는 뒤로 갈수록 격해지는 애틋함에 훌쩍거렸다. ‘잭‘과 ‘로리‘ 위에 내 개인적인 서사를 얹고, 이전에 봤던 로맨스 영화들에 관한 추억까지 겹쳐지면서 나는 완전히 그들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로맨스 소설에서 전하고자 하는 바는 대개 비슷한 것 같다. 우리 관계의 향방은 불분명하고, 그러므로 지금 눈앞의 인연에 다음을 생각하지 않은 채로 충실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전달하려고 콘텐츠들은 온갖 애를 쓴다. 그건 모든 인간관계에 통용되는 진리라는 생각도 든다. 평생 갈 것 같던 친구들을 하나둘씩 잃어 본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을 한다. 이쯤에서 가장 좋아하던 대만 드라마 속 대사가 생각난다: ˝소유는 상실의 시작이야˝. 어떤 관계에서든 상실을 전제하면서도 너무 얽매이지 않은 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지만 역시 너무 어려워서 내 전부를 내어주거나 아니면 상대방이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멀찍이 서서 그를 지켜본다.

<12월의 어느 날>이 다른 작품과 좀 달랐던 건 ‘로리‘가 10년에 걸쳐 성장하고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나가는 방식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로리‘는 누구에게든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찾기 위해 분투했다. 가끔은 현실에 안주하기도 했고, 끝없는 실패에 좌절할 때도 있었지만 그녀는 항상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에 따라 나아가는 사람이었다(이런 식으로 글을 쓰다 보니까 무슨 추도사라도 작성하는 기분이다).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는 식의 로맨스 서사가 과거의 방식처럼 여겨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어릴 적 늘 끼고 살던 동화책을 다른 시각에서 읽어내고, 그것의 잘잘못을 가늠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 많은 ‘로리‘가 탄생하고, 그것이 전혀 놀랍지 않은 때가 우리의 현실에도 완전히 도래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은 어쩐지 ‘로리‘들의 서사가 절반만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때가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완벽한 크리스마스 선물일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말도 했어. 드물지만 가끔은 떠났던 사람이 다시 내 인생에 돌아오기도 한다고. 그리고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영원히 그 사람 곁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고." - P229

그러다 그가 말한다. "사랑해, 루." 더는 견딜 수 없다는 듯이. - P309

"네 자리는 어딘데? 내 생각을 말해줄까? 네 자리는 어딘가가 아니야. 네 자리는 누군가야." - P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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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원 삼대
황석영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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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무언가를 써내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들었다. 생을 압축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페이지 안에서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삶을 살아내며, 무지한 독자인 나를 꾸짖었기 때문이다. <철도원 삼대>는 더욱이 그랬다. "같이 좀 살자(410쪽)"는 작은 부탁을 들어주지 못한 마음이 못내 아쉬워서 나는 책표지를 몇 번이나 쓰다듬고 나서야 어렵사리 정을 뗐다. 하지만 '이진오'와 그의 가족이 내 삶에서 완전히 분리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국 산업 노동자의 역사를 그려내고자 한 <철도원 삼대>를 통해 나는 그들의 삶과 얼마간 엮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후의 나는 산업 노동자의 소식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노동자로서의 자아가 부각된 채로 사회의 굴러감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자리를 되찾기 위해 굴뚝에서 농성 중인 '이진오'의 이야기로 작품은 시작된다.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이진오'가 기울인 노력의 기저에는 역사 속 산업 노동자들의 피와 땀, 눈물이 서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진오'의 굴뚝 농성은 그 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한국의 노동 사회에서 그는 "1970년대의 전태일 선배와 세기가 지난 2003년의 주익이 형의 유서(408쪽)"를 등에 짊어지고 있다. 노동 운동의 전면에 내세워진 남성 노동자를 지원하기 위해 든든히 가정을 지켜주었던 여성들도 물론 배제될 수 없다. 죽음 이후에도 중요한 때마다 등장해 가족의 생과 사를 돌봤던 '주안댁', 그런 그녀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던 '신금이' 등의 여성들은 이념을 위해 싸우는 남성들을 대신해 현실적인 문제들을 씩씩하게 해결하며 한국의 현재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해 주었다.

최소한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한 산업 노동자의 싸움은 그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그들은 '빨갱이'로 내몰렸고, 투쟁의 본질은 흐려졌다. 하지만 작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의사 '리외'가 말했듯이 이건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저기에 죽어가는 생명이 있고, 우리는 그들을 소생시키기 위한 공동의 목표만을 향해 달려나가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프레임을 씌워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은 누군가의 인권 앞에서 무의미하다. 산업 노동자들은 사회의 정상적인 질서 속에서 같이 살아가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응당 그래야만 하는 일들을 스스로만 보장받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내로남불' 식의 언행을 지속해 왔다. 우리는 이제껏 내게 주어진 권리를 타인도 동등하게 부여받을 수 있기를 원하기보다 사회가 암묵적인 약속을 기반으로 별 탈 없이 조용히 굴러갈 수 있기만을 바라왔다. 공공연하게 큰 목소리를 내어 주장하는 것이 마땅히 칭찬받지 못하는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오늘도 외로운 싸움을 지속한다. 수많은 얼굴을 한 '이진오'는 오늘도 굴뚝을 기어오르고 있다.

<철도원 삼대>의 세계에서 작가 황석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비관하지만은 않는다. 겉모습은 달라지더라도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았던 "성난 물결의 소용돌이 같은 세월(604쪽)"을 지나온 작가의 깨달음은 작품 내내 빛을 발한다. '이진오' 일가의 삶을 통해 작가는 "삶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그래도 지속된다는 믿음(207쪽)"을 전하고자 했다. 더불어 그런 믿음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는 다독임을 보낸다. 울고 불며 20대를 통과한 이후에는 나도 삶의 지루한 사이클을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와중에도 삶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를 통과해 지나간다.

최근 몇 년 새에 참 많은 사람들을 잃었다. 그들의 이름, 그리고 시작과 끝에 관한 숫자를 신문기사에서 읽으면서 나는 줄곧 숫자와 숫자 사이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같은 시대를 공유하고 살았음에도 그들의 삶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어쩐지 비통하게 여겨진다. 돌이켜보니 한국의 역사와도 그만큼 거리를 두고 살아왔다. 시기적으로 가깝지 않으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나고 자란 땅에 묻혔을 수많은 이들을 떠올리면 아쉽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 황석영과 같은 이들의 증언이 젊은 독자에게 더없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허구의 것이라도 그것은 분명 어떤 이들의 삶을 기초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철도원 삼대>를 읽으면서 내가 놓치고 사는 세상, 또 그 안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새삼스레 실감한다. 그래서 자꾸만 울컥해지고, 그것을 내리누르려 한숨을 내쉰다.

 

조선에서 해방은 1945년 8월 16일 하루뿐이었다. - P520

그때에는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약한 이들이 이기게 되어있다. 너무 느려서 답답하긴 했지만. - P564

세상은 우리가 바라던 대로 이루어지진 않고 늘 미흡하거나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시간이 무척 오래 지나서야 그러더군요. 장구한 세월에 비하면 우리는 먼지 같은 흔적에 지나지 않아요. - P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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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의 집 밤의 집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이옥진 옮김 / 민음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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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우리들의 '밤'에 대해 이야기한다. '낮'도 분명히 여기에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밤'을 언급하기 위해서 활용되는 수단에 불과하다. 낮을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반대편에 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낮과 밤은 그제서야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낮 동안 이곳은 "잠자는 사람들로 가득하고, 그들은 죽었고, 삶을 꿈꾸고 있다". 우리는 밝고 유동적인 시간 속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자신의 일시적인 순간을 본다. 어디서든 그가 보는 것은 자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안으로 작가는 행성의 반대편에 있는 '밤'으로 자꾸만 파고든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꿈을 꾸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정말로 살아가게 된다. <낮의 집, 밤의 집>에서 '꿈'이라는 것은 밤에 어디엔가 누워 자는 동안 일어난 일로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깨어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던 순간에 보았던 환상도 '꿈'이라는 단어 안에 포함된다. 꿈이 정말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꿈 혹은 꿈같은 환상 속에서 우리는 생생하게 깨어있고, 언어의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 연결된다. 갈급하게 요구되는 진정한 연대는 낮보다 더 깊고, 그만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밤이 되어서야 실현된다.

우리는 이렇게 낮과 밤이라는 두 개의 집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실체가 있는 집"이라면, "다른 하나는 무한하고, 주소도 없고, 건축 설계도로 영원히 남을 기회도 사라진 집"이다. 하루를 끝마치면 자연스레 '밤'이라는 집으로 돌아가듯이 언젠가는 끝끝내 '죽음'이라는 집으로 기어들어가야 한다. 어떤 것으로도 존재를 입증할 수 없고, 아무것도 남길 수 없는 죽음은 비관적으로 바라봐야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죽음이 나쁘기만 하다면, 사람들은 죽어 가는 걸 완전히 그만두게 될" 것이다. 죽음은 그만큼 이 작품에서 신성시되고, 죽은 듯 살아가는 삶에 대한 유일한 대안처럼 여겨진다. 그건 어떤 깨달음을 주고, 그때에 이르러서야 우리는 실체로서 빛을 발한다. 물론 '태양'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한다. 빛을 발할 수 있을 때까지 힘써서 살아가고, "세상의 모든 입자를 빨아들여 주인에게 돌려줄 때까지 계속"해서 이야기는 이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엔 그 빛도 꺼지고, 분해되고야 만다. 모든 이들에게 밤이 찾아오고 은하계의 불이 뚝, 하고 꺼졌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진정으로 살아가고, 또 삶을 공유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동안, 그러니까 낮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는 어떻게 깨어있을 수 있을까. 이에 관해 '마르타'는 "네가 너만의 장소를 찾으면, 너는 불멸의 존재가 될 거야." 하고 말해주었다. 280쪽에서 이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깨어났다. 여태까지 내가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마르타'의 말을 듣는 순간에 정신적으로 내내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쁜 하루가 죽 이어지다 보면 살아 숨 쉬는 시간들이 제대로 분간되지 않을 때가 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두고 왔다는 느낌에 휩싸인다. 작년 이맘때쯤 사회라는 틀 속에서 내 자리를 찾으려고 이리저리 고군분투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만의 장소를 찾아냈다고 믿었는데, 나는 아직도 '불멸의 존재'가 되지 못했다. 시간이 많을 때는 내 존재를 생생하게 감각했는데, 지금은 내 존재가 나로부터 멀어지고 끝내는 지워져 버린 느낌이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현재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또 "새로운 것,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지도 모른다. 낮의 집에 머무르고 있는 지금에도 "내가 ('나'라는 저택의) 주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싶다.



사람들이 "모든 것", "항상", "절대 없다", "모든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고, 왜냐하면 외부 세계에는 그런 일반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 P158

"네가 너만의 장소를 찾으면, 너는 불멸의 존재가 될 거야." - P280

비록 나는 가끔 그 안에서 내가 손님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가 주인이라는 것을 확신하기도 한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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