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읽던 순간이 떠오른다. 위트 넘치는 문체에 감탄하며 페이지를 넘기던 중에 나는 뒤늦게 그 작품이 퀴어 소설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말을 꺼내지 않는다면 아무도 몰랐을 테지만, 내가 가진 세상의 편협함에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거의 동시에 친구에게서 ‘퀴어‘라는 단어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다들 숨기고 살지만 세상에는 그런 사람이 아주 많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때 나는 그건 전부 그 애의 착각일 거라는 생각을 아주 조그맣게 했던 것 같다. 살면서 내가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을 본 건 고등학교 때 딱 한 번이 유일했으니까. 세상의 일부를 못 본 척 지나치는 건 아주 쉬웠고, 그렇게 나의 전체를 이루는 무언가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세상을 기울어진 채로 보고 있었는지를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을 읽는 동안 알아차린 것이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작가 박상영의 작품에 관한 기억을 끄집어낸 것은 작가 김혜진의 작품 또한 그렇게 읽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너‘와 ‘나‘라는 인칭으로만 등장한 그들의 삶을 추측하고, 또 오해하다가 마침내 어떤 문장에 이르러서야 나는 어버버거리며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어떤 이들의 삶을 왜곡하는 나 자신으로 인해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너‘와 ‘나‘의 언저리에 생겨난 공백 덕분에 그들의 삶 자체에 집중하고, 공감하기가 수월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른 것들은 전부 배제해 놓고 ‘너‘와 ‘나‘라는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현실 속 내 주변의 수많은 너의 얼굴이 되고, 또 금세 나 자신의 얼굴이 된다.
소설 속 ‘너‘와 ‘나‘를 향해, 또 지금 여기의 너와 나를 향해 사람들은 어쭙잖은 호기심을 내보이고, 이해와 존중이라는 단어를 남용한다. 조금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도 사람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내 의도를 추측하고, 오해하고, 또 지적하고 비난하기도 했다. 일상성의 항상성이 붕괴될까 노심초사하던 타인들이 끝내 선택한 것은 비정상을 향한 이해와 관용이었다. 무엇 때문에 내 방식을 일일이 설명하고, 내 존재를 승인받아야만 하는지, 그런 것들이 내게 주는 무력감과 억울함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내가 ˝남들과 다를 바 없는, 흔하고 흔해빠진 연인(201쪽)˝을 향해 꺼내놓은 말들은 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상을 미워하면서도 그곳에 동화되어 있는 나 자신을 ‘너‘와 ‘나‘를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발견한다.
『너라는 생활』 속 ‘너‘와 ‘나‘는 정말이지 그 누구도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그들 자신이기를 원했던 사람들 전부였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적 약자이던 그들에게 세상을 좀 요령 있게 살아보라고 충고하고 싶던 적도 있었다. 다 이해한다는 말로 그들을 세상의 바깥으로 슬쩍 밀어내고 돌아서고 싶던 적도 아주 많았다. 그들의 편에 서겠다고 선언한다면 내가 누릴 수 있는 것은 고작 ˝우리가 볼 수 없었고 확인할 수 없었던 광장이라는 신기루 같은 미래(231쪽)˝ 뿐이리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겪게 될 어떤 곤란함 때문에 아주 사소한 격려와 위로를 바라던 ‘너‘를 두고 돌아서려니 마음이 편치 않다. ‘너‘의 얼굴이 또 언제 ‘나‘의 것이 될지 모르기에 나는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골목 쪽을 다시금 이끌리듯 바라보고 있었다(172쪽)˝.
